[17. 독사지옥(12)]
“내 고유 능력의 단점은 항상 누군가의 스탯을 베껴야 한다는 거야. 그 점을 이용해서 내 모든 스탯을 0으로 만들겠다는 자기 생각은 완벽했어.”
본인을 쓰러뜨리겠다고 선언한 뒤 ‘퀴네에’를 써 모습을 감추기까지 했는데, 정작 강이란은 지금 이 상황을 즐기는 건지 손뼉을 치며 능력에 관한 설명을 이어갔다.
“그런데 자기는 내가 베낄 스탯을 어떻게 고르는지까지는 생각해본 적 없나 보네?”
태연하게 제 할 말을 늘어놓는 저 자식의 페이스에 말려선 안 된다. 어차피 별 영양가 없는 말일 게 뻔하니 무시하고 식도를 휘두르는 데에만 집중-
“뭐야?”
“내 주변에 있는 헌터나 괴수 머리 위엔 항상 스탯이 적혀 있거든. 그걸 보고 원하는 스탯을 고르면 되는 거야.”
식도를 휘둘렀으나 닿는 건 없었다. 강이란이 한 발짝 물러난 탓에 식도는 심장을 찌르지 못한 채 허공을 갈랐다.
“묘기를 부려서 모습을 감추어도, 고유 능력의 적용 범위 내에 있으면 난 자기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거지.”
이후 몇 분 동안 휘두른 식도는 단 한 번도 강이란의 몸에 닿지 못했다.
“‘레비아탄’까지 쓰러뜨렸다고 해서 살짝 긴장했는데, 자기 실력 형편없네. 움직임이 너무 뻔하잖아.”
내 움직임이 뻔한 것도 뻔한 거겠지만, 머리 위에 적힌 스탯만 보고 모든 공격을 피하는 저 자식의 움직임이 더 말이 안 된다. 대체 어떻게 된 반사 신경인지, 두려움을 넘어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움직임도 슬슬 느려지는데, 이제 내 차롄가?”
목 쪽을 향해 식도를 그었으나, 강이란이 상체를 뒤로 완전히 꺾은 탓에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무리하게 올린 속도를 감당 못 한 내가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윽.”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강이란의 팔꿈치가 등 쪽을 가격했다. 충격에 균형을 잃고 몸이 앞으로 기울어질 때, 이번엔 복부에 강이란의 발차기가 날아왔다.
이어지는 주먹질과 발차기.
강이란은 단검을 쓰지 않고도 ‘퀴네에’를 쓴 날 너무나 간단히 제압했다.
“원래라면 자기한테 힘을 합쳐서 회사를 무너뜨리자고 제안하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까진 없겠네.”
강이란의 주먹이 명치를 가격해 결국 몸이 앞으로 꺾이고.
“걱정하진 마. 자기 동료들도 곧 자기처럼 될 거니까.”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 내 안면으로 다가오는 단검에 저항조차 못 하고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죽음의 경계로 이동합니다.]
***
“컥.”
짧은 신음과 함께 눈이 뜨였다.
단검에 찔린 얼굴 쪽은 아직도 화끈거리는 듯하다.
「당분간 못 볼 거라고 큰소리치지 않았나?」
얼굴을 매만지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내 모습이 웃겼는지 초월자는 한참 동안 웃었다.
「자네가 직접 그자와 싸우는 것도 의미 없어졌는데.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
강이란의 고유 능력에 관한 힌트를 주며 직접 싸울 것을 권해 놓고 인제 와서 비웃고 있다니. 어이가 없다.
「비웃다니? 이 몸은 그저 궁금해하는 거라네. 여기까지 몰린 자네가 무엇을 택할지 말이야.」
“강림해달라는 부탁은 절대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강이란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긴 했지만, 이번 죽음으로 알아낸 건 확실히 많다. 강이란이 지닌 고유 능력도 파악했고, 그를 이용해서 모든 스탯을 0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까지 알아냈다.
남은 건 모든 스탯이 0이 된 강이란을 내가 쓰러뜨리는 것뿐.
“일행들을 지금처럼 배치하고 내가 홀로 강이란을 맡는다. 이게 최선이야. 이것 외에 실험실 폭파를 막으면서 강이란을 쓰러뜨릴 방법은 없어.”
「작전에 변화를 주지 않겠다는 거군. 그렇다면 다시 그자와 싸울 생각인 건가?」
“그래야지.”
스탯이 의미 없어진 상태에서 나와 그 자식의 가장 큰 차이점은 경험치다. 강이란은 멸망 이전부터 살인을 저지르며 대인전에서 경험치를 쌓아왔지만, 난 괴수만 상대했을 뿐 대인전 경험은 없다시피 하다.
「그렇기에 자네가 패배할 수밖에 없는 싸움 아닌가? 굳이 그자와 다시 싸우려는 이유는 뭐지? 그자를 이길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이길 방법이야 있지. 나도 경험치를 쌓으면 돼.”
「경험치를 쌓는다? 귀환한 뒤, 따로 훈련이라도 할 생각인가?」
편의점에서 나선 이후 강이란과 만날 때까지. 김화영과 했었던 전투 훈련을 할 시간은 없다.
「그렇다면 무슨 생각인 거지?」
“그 자식과 달리 내겐 ‘CONTINUE?’ 특성이 있잖아.”
내 말에 초월자는 ‘죽음의 경계’가 떠나가라 웃었다.
「설마 죽음을 반복하며 부족한 경험치를 쌓겠다는 건가?」
“공정하게 싸울 생각은 없다고 처음부터 말했어. 그 자식 쓰러뜨리려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뭐든 써먹어야지.”
「역시 자네는 재밌어. 이 몸의 기대를 항상 충족시켜주다니 맘에 드는군. 이래서야 자네를 도와줄 수밖에 없잖아.」
[‘이름 없는 자’님이 최근 저장 지점을 앞당깁니다.]
[CONTINUE?]
[최근 저장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
“도와준다니 어떤 걸?”
“자기 움직임도 슬슬 느려지는데, 이제 내 차롄가?”
“뭐?”
본래라면 이나은의 목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왜 강이란의 목소리가?
생각을 마치기도 전, 별안간 발을 헛디뎠다. 그리고 등 쪽에 고통이 느껴졌다. 그제야 강이란의 팔꿈치에 찍혀 균형을 잃은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를 깨달았을 땐, 이미 강이란의 발차기가 복부를 가격한 후였다.
그 뒤로 이어지는 주먹질과 발차기.
귀환하자마자 정신없이 얻어맞은 난 강이란에게 제압당했다.
“원래라면 자기한테 힘을 합쳐서 회사를 무너뜨리자고 제안하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까진 없겠네.”
마무리로 강이란의 주먹이 명치를 가격해 몸이 앞으로 꺾이고.
“걱정하진 마. 자기 동료들도 곧 자기처럼 될 거니까.”
정신을 수습할 틈도 없이 안면으로 다가오는 단검을 보며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죽음의 경계로 이동합니다.]
***
“망할.”
「이 몸의 도움까지 받았는데, 원하는 대로 경험치는 좀 쌓았나?」
도와준다는 게 귀환 시점을 강이란과 싸우기 시작한 시점으로 바꾼 거였다니.
“그런 건 미리 알려주면 좋았잖아.”
「그래서야 하나도 재미없지 않은가.」
“재미없어서 미안하네.”
하필이면 내가 맞기 시작할 때를 귀환 시점으로 잡은 것도 참 악랄하다.
「자네가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이 몸의 배려라네.」
“됐고. 더 할 말 없으니 여기서 빨리 내보내기나 해줘.”
「내보내달라?」
“항상 그쪽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귀환시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의외로 눈치는 빠르군. 알겠네.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CONTINUE?]
[최근 저장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
“자기 움직임도 슬슬 느려지는데, 이제 내 차롄가?”
“저 말을 듣자마자 내가 발을 헛디디는 거지?”
귀환 직후 발을 헛디뎌 강이란의 공격에 연속해서 얻어맞게 된다는 걸 떠올려 몸을 아예 굴렸다. 바닥에서 한 바퀴 굴러 강이란의 뒤편에 서니, 틈이 보였다. 순간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진 스탯이 적힌 글씨를 찾는 중인지 두리번거리는 탓에 강이란의 뒤편이 무방비해진 거다.
망설였다간 공격할 기회를 놓칠 것만 같아 서둘러 목을 향해 식도를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반응 속도가 워낙에 빠른 탓에 식도는 어깻죽지를 긁은 데에서 그쳤다.
“그래도 어찌어찌 상처를 입히긴 했네.”
처음으로 낸 성과에 만족하며 다시 전투 자세를 취했다.
김화영에게 배운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빈틈을 보이지 말라는 것. 고작 상처 한 번 입혔다고 마음 놓을 여유는 내겐 없었다.
“자기 실력 형편없다는 말은 수정해야겠네. 볼 만한 정도? 그 정도라 해두자.”
본인에게 상처를 입혔기 때문인지 강이란의 표정이 한층 진지해졌다. 그는 어느새 단검 두 자루를 빙빙 돌리며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라면 자기한테 힘을 합쳐서 회사를 무너뜨리자고 제안하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까진 없겠네. 지금부턴 제대로 상대해줄게.”
강이란은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다가와 단검을 휘둘렀다. 빠른 속도지만 김화영보다는 아니다. 간신히 식도로 받아쳐 내자, 이번엔 반대편 손에 쥔 단검이 내 옆구리를 노리고 다가왔다.
‘오른손으로 검을 휘두를 거면, 왼손은 쉬게 두지 마.’
김화영의 말을 염두에 두고 있던 터라 팔뚝으로 단검을 받아낼 수 있었다. 왼팔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몸통이 베인 것보다야 낫다.
“검에 분명 자기 피가 묻어 있는데, 베는 느낌은 없다니. 자기가 쓴 투구, 보통 장비는 아닌가 보네.”
이후 강이란은 단검 두 자루로 공격을 퍼부었다. 칼춤을 추는 듯한 그의 몸놀림에 팔 곳곳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아직 버틸 만은 했다.
강이란을 이기는 방법은 그의 빈틈을 노리는 것. 지금은 방어에 집중하며 틈을 찾을 때다.
“자기, 이렇게 공격만 받아내다가 과다출혈로 죽는 거 아니야? 그렇게 시시하게 죽을 건 아니지?”
내가 점점 구석으로 몰리자 강이란의 표정이 돌아왔다. 눈꼬리가 찢어지도록 신나게 웃으며 나를 비웃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저 자식이 저렇게 웃을 때가 내가 노리던 틈.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식도를….
“자기, 내가 방심이라도 할 것 같았어? 아까 말했잖아. 지금부턴 제대로 상대해주겠다고.”
흐릿해져 가는 시야에 마지막으로 비춘 건 강이란이 던진 단검이 내 가슴팍에 꽂혀 있던 거였다.
[죽음의 경계로 이동합니다.]
***
벌써 서른 번째 귀환인가.
“그렇게 시시하게 죽을 건 아니지?”
저 도발에 넘어가면 강이란이 단검을 던진다. 그가 던진 단검은 어떻게 해도 심장에 정확히 꽂히니 저 도발에 넘어가선 안 된다.
“자기, 의외로 침착하네. 좋아. 계속 즐겨볼까?”
도발에 넘어가지 않은 채 프라이팬으로 몸쪽을 가드하고 있자 강이란의 표정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은 강이란은 엄청난 속공을 퍼부었다.
왼쪽 몸통.
왼쪽 옆구리.
오른쪽 옆구리.
오른쪽 다리.
다시 오른쪽 옆구리.
그다음은 정수리.
하지만 이미 여러 차례 죽음을 경험한 난 저 자식의 공격 순서를 완전히 외워버렸다. 어느덧 익숙해진 강이란의 공격 템포에 맞춰 몸을 움직이자 제어실 벽에 닿았다.
“저번엔 벽이 있는 줄도 모르고 뒷걸음질 치려다 죽었으니까, 이번엔 아예 몸을 숙여서….”
몸이 벽에 닿자마자 다리를 굽힌 뒤, 곧장 주먹을 뻗었다. 강이란의 급소에 주먹이 꽂히고, 그로써 두 번째 유효타를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