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독사지옥(14)]
분명 죽었을 터인 강이란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이게 의미하는 건 한 가지밖에 없다.
초월자의 강림.
내 스탯을 베껴 모든 스탯이 0이 되어 버린 탓에 ‘피의 살육자’가 강이란의 몸에 강림할 수 있게 된 거다.
눈앞에서 본인의 심장을 터뜨리고도 강이란이 멀쩡히 웃을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할 방도는 그것 외엔 없었다.
“자기들, 혹시 내가 무서워? 눈에 두려움이 가득한데?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야! 그래, 이거였어. 자기들 눈에 공포가 새겨질 때 차오르는 희열. 난 이걸 다시 느끼고 싶었다고!”
혀를 할짝대던 강이란이 허공에 손가락을 휘저었다. 그의 손짓을 따라 바닥에 흩뿌려진 혈흔이 떠오르더니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혈흔이 만들어낸 건 붉은 단검.
강이란. 아니, ‘피의 살육자’는 혈액으로 이루어진 단검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맞아. 이 감촉이지. 피에 적셔질 때의 끈적임, 내가 이걸 잊고 지냈다니.”
‘피의 살육자’는 단검으로 자신의 팔뚝을 찔러보며 탄성을 질러댔다. 본인의 팔에서 흐르는 피를 맛보며 전율에 떠는 ‘피의 살육자’의 모습은 두렵기 그지없었다.
“무슨 스킬을 썼기에 죽은 놈이 되살아난 건진 모르겠지만 잘됐네. 이러면 내 손으로 강이란한테 복수할 수 있다는 거잖아.”
저 모습이 두렵지도 않은지 송태섭은 인질로 삼은 군인을 끌고 앞으로 나섰다.
“현아, 난 알아서 빠져나갈 테니까 다른 일행 데리고 먼저 나가 있어.”
“네?”
“이번엔 네가 날 믿어줄 차례야.”
송태섭은 자신을 상대하겠다는 말에 어이없어하는 ‘피의 살육자’ 바로 앞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코앞에서 인질로 삼은 군인의 목을 대검으로 그었다.
[플레이어 ‘송태섭’이 직업 승급 조건, ‘단시간에 플레이어 일곱 명 쓰러뜨리기’를 달성하였습니다.]
[플레이어 ‘송태섭’의 직업이 ‘광전사’로 승급합니다.]
“정현! 지금 당장 ‘퀴네에’ 쓰고 도망쳐!”
송태섭이 갑자기 발로 책상을 쳐냈다. 그에 부딪힌 난 제어실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내가 제어실 밖으로 나간 것을 본 송태섭은 그 즉시 본인의 대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의 검은 제어실 문 쪽 벽을 베었고, 묵직한 타격을 받은 벽은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플레이어 ‘송태섭’이 ‘광기’에 휩싸여 이성을 잃습니다.]
“당장 내게서 멀리 도망쳐! 어? 방금 내가 뭐라고? 도망치라고 했나? 수진이는 도망가지 못했잖아. 수진이는 왜? 왜 도망 못 갔지? 다 강이란 네 놈 때문이야. 맞아. 네 놈 때문에 수진이가 죽었어! 네 놈 때문에!”
“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수진이? 내가 살아 있을 적에 죽인 사람 중에 그런 이름은 없는걸?”
“말 돌리지 마! 전부 네 놈 때문이잖아!”
무너진 벽 뒤로 들리던 송태섭의 광기 어린 괴성과 ‘피의 살육자’의 웃음소리가 어느덧 굉음으로 바뀌었다. 무너진 벽에 가려져 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필멸자와 초월자 간의 싸움이 시작되었음은 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완전히 이성을 놓으셨네.”
송태섭이 ‘광전사’로 직업을 승급한 건 이전에 딱 한 번 본 적 있다. 그때 송태섭은 나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죽이려 들었었다.
본인도 이성을 잃어 적과 아군조차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직업 승급을 택했다는 건.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겠다는 거겠지.”
송태섭이 시간을 벌어주는데 여기에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광전사’로 승급했다지만 송태섭은 B급 헌터다. B급 헌터가 강림한 초월자를 상대할 수 있을 리는 없다.
“위층으로 올라가서 다른 일행을 데려와….”
‘난 알아서 빠져나갈 테니까 다른 일행 데리고 먼저 나가 있어.’
‘이번엔 네가 날 믿어줄 차례야.’
원래 같으면 다른 일행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돌아오는 게 맞다. 그렇지만, 자신을 믿어달라는 그의 말이 자꾸만 맘에 걸린다.
“망할.”
욕설을 내뱉으며 제어실에서 몸을 돌렸다.
방침은 정했다.
송태섭이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일행을 데리고 실험실 밖으로 탈출한다. 이게 내가 정한 방침이다.
송태섭이 저렇게까지 말하면서 ‘피의 살육자’를 맡은 건, 분명 혼자서는 도망칠 방법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 믿고 방침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면 우선 위층으로 가야겠네.”
강이란과 싸우느라 완전히 지친 몸을 억지로 이끌고 실험동 로비까지 달렸다.
실험동 로비에서 위층으로 올라갈 방법은 두 가지. 잠깐 고민하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시간조차 아깝다는 생각에 캐비닛 안으로 들어갔다.
캐비닛을 통해 도착한 소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나은 헌터랑 이화는 어디 간 거지?”
두 사람의 위치를 파악하고자 CCTV를 확인하는데 의아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뭐야?”
내 눈에 띈 건 제어실 내부를 보여주는 화면이었다. 화면 속에선 묵직한 대검을 미친 듯이 휘두르는 송태섭이 ‘피의 살육자’를 압도하고 있었다.
제어실에 흩뿌려진 피로 무수히 많은 창과 단검을 만들어 던지는데도 ‘피의 살육자’는 송태섭의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그가 던진 무기는 송태섭의 대검에 모두 막혀 다시 사방에 흩뿌려지고 있었다.
“‘광전사’라는 직업도 ‘괴수 요리사’처럼 특별한 게 있는 건가? 저대로 확실히 이겨줬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송태섭이 이기고 있으나, 문제는 상대가 강림한 초월자란 거다.
초월자가 단순히 즐기고 있거나 강림한 신체에 적응하는 중이라면 송태섭이 밀리는 것도 시간문제다.
“빨리 다른 일행부터 찾아야겠네. 그래서 두 사람은 어디 있는 거야?”
제어실 화면에서 다른 화면으로 시선을 옮기다 보니 소장실에서 살짝 떨어진 통로에 서 있는 이나은과 이화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둘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소장실에서 뛰쳐나갔다.
정신없이 달려 이나은과 이화의 모습이 보였던 통로에 다다랐을 때, 별안간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의 대리자인 제 말을 믿으십시오! 정해진 죽음을 거부하시면 안 됩니다! 그대들은 신의 심판을 받아 오늘 이 자리에서 구원받을 운명이란 말입니다! 죽음만이 당신이 구원받을 길입니다! 아아- 신의 뜻을 읽지 못한다니 불쌍하도다. 제가 여기서 당신을 구원해드릴 테니, 죽음에 순응하고 짐을 내려놓으시면 됩니다!”
외침이 들려온 곳. 이나은이 대주교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대주교의 손에서 권총이 떨어지는 걸 보니, 총을 쏜 건 저 사람인가 보다.
“아직도 떠들 기운이 남아 있었어? 지겹네, 정말.”
이나은이 복부를 무릎으로 찍자 대주교의 몸이 축 늘어졌다.
“이나은 헌터!”
이나은은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축 늘어진 대주교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뒤, 내 쪽으로 달려왔다.
“정현 헌터, 괜찮으세요?”
“어. 난 괜찮아. 그보다 이화는?”
“정이화 헌터라면 허상헌 아저씨 데리고 앞서가셨어요. 저는 저 시끄러운 자식 끌고 가느라 뒤처졌고요. 근데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잖아요! 방송 들었는데, 강이란은요? 그 자식 어떻게 됐어요?”
“강이란은….”
송태섭이 맡은 상태라 말하려다 말을 끊었다. 그렇게 말했다간 이나은이 송태섭을 돕겠다고 제어실로 갈 것만 같았다.
“…내가 쓰러뜨렸으니까 이제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돼.”
“네? 정현 헌터가 쓰러뜨렸다고요?”
“방법은 나중에 말해줄 테니까, 일단은 밖으로 나가자.”
어쩐지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던 이나은은 내가 재촉하자 말없이 나를 따라와 줬다. 이나은을 도와 대주교를 끌고 나아가며 작전 과장에 관해 물으니 초월자가 순간 이동시켰다는 답이 돌아왔다.
“작전 과장만 순간 이동시키고 대주교는 여기 남겨둔 거야?”
“네. 싸우다가 점점 밀리니까 바로 도망치더라고요. 여기 대주교는 본인이 말하길 저희에게 믿음을 전파해야 해서 여기에 남았다네요.”
전과 달리 대주교만을 남겨둔 상황에 의문을 품는데 저 앞에 허상헌 헌터를 업은 이화가 보였다.
이나은과 마찬가지로 이화 역시 나를 보자마자 강이란은 어떻게 된 건지부터 물었다.
“제어실로 불러들인 다음에 쓰러뜨렸어.”
“뭐? 불러들였다고? 처음에 짰던 작전은 그게 아니었잖아. 그리고 오빠, 비전투계 직업인 거 아녔어? 따로 우리한테 이야기하지 않은 수가 있었던 거야?”
“아직은 적진 한가운데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설명은 나가서 다 해줄게.”
동생에게도 대답 대신 여기서 나가자고 재촉했다. 재촉하며 출입구 쪽으로 몸을 밀자 할 말 많아 보이던 두 사람은 입을 다문 채 앞으로 나아갔다.
출입구가 보이는 통로에는 열댓 명쯤 되는 군인이 쓰러져 있었다. 그들 사이사이에는 실험체도 몇 명 쓰러져 있었다.
“맞다. 그러고 보니 실험체 분들하고는 언제 거래했던 거야?”
“예전에 마포에서 만났을 때 대화 나눌 기회가 있었어.”
“마포? 그 빌딩에서?”
“응.”
간략하게 설명하며 공중전화부스 쪽을 바라보니 지은정이 홀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사하셨구나. 혹시 다른 분들은 어디 갔나요?”
“이름이 정확하게는 기억 안 나는데 한성수 헌터? 그분과 함께 밖으로 나갔어요. 참, 그분이 다른 분들을 지켜야 해서 먼저 나가게 되었다고 죄송하다는 말 전해달라고 했어요.”
한성수는 실험체들과 밖으로 나갔고, 이나은과 이화는 나와 함께 있다. 그러니 어디 있는지 파악되지 않는 일행은 이제 두 사람뿐이다.
“혹시 김화영 헌터나 백민기 헌터는….”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라 둘의 생김새까지 묘사해주었으나, 지은정은 본 적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백민기 헌터 말대로라면 전력실에도 밖으로 나갈 방법이 따로 있는 거잖아요. 아마 밖에서 저희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나은이 말이 맞아. 작전대로 움직였다면 지금쯤 밖에 있을 거야.”
“그러기엔 아직도 불이 켜져 있으니까.”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천장에 달린 등이 모두 꺼졌다.
“이제 여기서 빠져나가면 되는 거죠? 그런데 불 꺼지니까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네요.”
“공중전화부스는 이쪽이에요.”
컴컴한 어둠 속, 지은정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가니 그녀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다들 부스 안으로 들어오셨나요?”
“네. 출발해도 돼요.”
제일 끝에서 이화가 말하자 지은정은 알겠다며 전화카드를 꽂을 테니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찾았다. 이제 전화카드 꽂을게요.”
그때였다.
‘관리자 권한에 따라 공덕 실험실이 곧 폭파됩니다.’
‘실험실 내에 남아 계신 분들은 서둘러 밖으로 대피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실험실은 1분 뒤 자동으로 폭파됩니다.’
“잠시만요!”
들려선 안 될 방송. 그 방송을 듣고 다급히 외쳤을 땐, 공중전화부스는 이미 빙빙 돌기 시작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