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16화 (117/168)

[17. 독사지옥(17)]

주인장을 따라 상가 1층에 있는 점포 안으로 들어가니 김아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임성윤 헌터님, 아직 교대 시간 아니지 않아요?”

그렇게 묻던 김아람은 노인 뒤에 서 있던 나를 보고는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를 깨달은 듯, 점포 안의 방문을 열어주었다.

“이쪽이에요.”

고맙게도 김아람은 실험실 안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대주교가 갇혀 있는 곳으로 곧장 날 들여보내 주었다.

“난 그 인간 시끄럽게 떠드는 거 듣기 싫으니 이만 가볼게.”

도망치듯 자리를 떠난 주인장을 뒤로하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철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주교가 의자에 묶인 왼손을 미친 듯이 움직이면서 나는 소리였다.

“시끄러워도 이해해주세요.”

김아람이 다가가 입에 물린 수건을 풀어주자 대주교는 외쳤다.

“불경합니다! 신을 모시는 자의 손과 입을 봉하다니! 어찌 이리 불경할 수가 있느냐 말입니다! 당신 같은 이교도 때문에 벌써 하루 동안 기도를 드리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대들을 구원하기 위해 온 신의 사자를 이렇게 대접하다니, 어이가 없습니다! 아아- 아닙니다. 이 또한 시련일 게 분명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 큰 믿음을 가지고 기도한다면 신께선 저를 구원해주실 겁니다.”

그 뒤로 대주교는 한참 동안 믿음에 관해서 궤변을 늘어놓았다. 도저히 대화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아 보여 어이없는 눈빛으로 대주교를 바라보고 있자 김아람은 미안해하는 눈치로 말했다.

“깨어난 뒤로 이런 헛소리만 늘어놓긴 했는데, 중간중간 중요한 말도 껴 있어서 정현 헌터에게도 직접 들려주고 싶었거든요.”

“중요한 말을 해줄 정신 상태는 아닌 것 같은데?”

그때였다.

“구원을 위한 준비는 거의 끝났습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강남 실험실을 공격하는 걸 멈추고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강남 실험실에서의 실험이 완전히 끝나야만 낙원으로 갈 수 있단 말입니다!”

“낙원? 그곳은 또 어딘가?”

“낙원도 모르고 지냈다니. 이런 힘겨운 세상 속에서 당신들은 단 하나의 희망조차 품을 수 없었던 겁니까? 아아- 슬픕니다. 어찌 이런 불쌍한 사람을 제게 보내주셨나이까. 좋습니다. 제가 당신들에게 가르침을 주도록 하겠습니다. 낙원은 초월자님들이 지내시는 곳, 믿음이 충실한 이들은 이제 곧 교주님께 선택받아 낙원으로 가게 될 겁니다.”

“잠깐만. 자네 방금 뭐라고 했나?”

“물론 여러분은 너무나 많은 죄를 지었기에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지상에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바퀴벌레 신을 믿고 기도를 드린다면 다음 생엔 바퀴벌레로 환생할 수 있을 겁니다! 질긴 생명력으로 완전히 망해버린 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 바퀴벌레로 환생하는 것만이 당신들이 구원받을 길이란 말입니다!”

낙원에 관한 짧은 이야기 이후 대주교는 바퀴벌레를 찬양하는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가 바퀴벌레의 질긴 생명력에 관한 찬양을 5분 정도 늘어놓았을 때, 김아람은 더는 안 되겠다며 수건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직접 들려주고 싶었던 말은 들었으니, 이만 입 좀 틀어막을게요.”

“들려주고 싶었다는 게 낙원에 관한 이야기였어?”

“네.”

“이 사람 말대로라면 초월자님들이 지내시는 곳이 낙원이란 말이지? 강남 실험실에선 낙원으로 가는 방법에 관해 연구하던 거고. 그냥 이 사람이 지어낸 헛소리 아니야?”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는데요. 공덕 실험실에서 연구하던 게 결국은 초월자님이 인간의 몸을 빌려 지상으로 내려올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이었잖아요. 그 연구가 성공해서 초월자님이 강이란의 몸에 강림할 수 있었던 거고요.”

‘피의 살육자’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김아람은 망설이다 말을 덧붙였다.

“또 공방전 때는 초월자님께서 ‘현신’이란 방법으로 지상으로 내려오기도 했었죠.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봤을 땐, 모든 초월자님은 지상으로 내려올 수 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김아람의 말대로다. 강림이냐 현신이냐에 따라 본인의 초월력을 얼마큼 쓸 수 있는지에 차이가 있지만, 초월자가 지상으로 내려올 수 있다는 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 반대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자네 말은 우리가 초월자님들이 계신 곳으로 가는 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마냥 헛소리라고만 볼 순 없다는 거죠. 회사에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강남 실험실에서 낙원으로 가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지은정이 그런 말을 했었다.

‘그리고 강남 쪽의 실험실에선 정반대의 실험을 하고 있다는데, 두 곳의 실험이 성공하기만 하면 인류에게 다시 희망이 생긴다고 했었어요.’

그땐 인위적으로 스탯을 올릴 방법을 찾는다고 여겼는데, 만일 그게 아니라 초월자가 있는 곳으로 가는 방법을 찾던 거였다면. 그렇게 생각하면 두 곳의 실험이 성공하기만 하면 인류에게 다시 희망이 생긴다고 말한 것도 설명된다. 그들은 인류를 초월자들이 지내시는 낙원이란 곳으로 보내 시련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거였다.

“회사에서 전 인류를 구원할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게 헛소리는 아니었나 보네.”

분명 크로노스라면 낙원으로 가는 게 가능한 건지 알고 있을 거다. 다음에 ‘죽음의 경계’로 갔을 땐, 인간이 초월자가 사는 세계에 갈 수 있는 건지 물어봐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대주교와의 불쾌한 대면을 끝냈다.

교대한 건지 방 밖으로 나온 사람은 노인이 아닌 김아람이었다. 그녀와 함께 내가 누워 있던 점포로 돌아가려는데, 김아람이 나를 멈춰 세웠다.

“정현 헌터님, 드릴 게 있어요.”

그녀가 건넨 건 조그마한 카드 한 장. 카드엔 벌벌 떨고 있는 염소가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뭐야?”

“올바른 그림 족자를 찾기 위한 힌트예요. 정현 헌터님이 기절하고 얼마 안 지나서 그곳에 있던 사람 앞에 한 장씩 떨어졌어요. 제 카드는 이거예요.”

김아람이 보여준 카드엔 벽시계 속에 숨은 염소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염소가 그려진 그림 족자를 찾아야 하나?”

“네. 그런 것 같아요. 임성윤 헌터님의 카드에도 염소가 그려져 있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의 카드는 확인해봤어?”

“대놓고 물어보진 않고, 슬쩍 몇 개 봤는데 전부가 같은 그림은 아니었어요.”

밭을 갈고 있는 소. 집 안에 숨어 있는 돼지. 항아리 밑에 웅크린 두꺼비 등. 생각 외로 카드엔 여러 종류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렇게까지 다양한 동물 그림이 있다는 건, 사람마다 들어가야 할 그림 족자가 따로 배정되어 있다는 뜻인가?”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신혜진 헌터님께서 사람을 써서 이 근처에 배치된 그림 족자는 전부 확인해주시겠다고 했으니 일단은 기다리고 있죠.”

“알겠어.”

카드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마치고 점포 밖으로 나서니 글씨가 새겨졌다.

[강남 구청 지하의 실험실이 파괴되었습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후원 미션’을 클리어했습니다.]

[성공 보상을 선택해주시길 바랍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과의 전속 계약 / 술 한 병 지급]

“잘 끝났구나.”

“다친 사람은 없겠죠? 괜히 걱정되네요.”

[플레이어 정현이 성공 보상을 선택하였습니다.]

[플레이어 정현에게 술 한 병이 지급됩니다.]

성공 보상으로 받은 술 한 병을 ‘특급 냉장고’에 집어넣고 있으니 송지아가 우리를 향해 뛰어왔다. 왜 저리 급하게 뛰어오나 궁금해하는데 그녀가 외쳤다.

“강남 실험실로 갔던 분들 돌아오셨어요!”

송지아를 따라 대장간으로 가니, 그녀의 말대로 강남 실험실 쪽으로 갔던 일행이 모여 있었다. 다들 지친 기색이었지만 다행히도 크게 다친 사람은 없어 보였다.

“저항군분들은 바로 노들섬으로 돌아가셨어요.”

“다친 사람은 없고?”

“몇 분이 크게 다치시긴 했는데, 임수연 헌터가 노력해준 덕분에 전투 도중에 죽은 사람은 없어요.”

이나은이 주인장에게 강남 쪽 상황을 보고하는 와중, 이화가 내게 다가왔다.

“오빠, 정신 차렸구나. 다행이다. 몸은 좀 괜찮아?”

“방금까지 싸우다 온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잖아. 너야말로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수연 언니가 이미 다 치료해줬지. 정말 한시도 안 쉬고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부상자 치료해줘서 우리 쪽에서 큰 피해 없이 이길 수 있었어. 지금도 다친 사람 치료한다면서 바로 부상자 모여 있는 점포 쪽으로 뛰어가더라.”

이화는 나를 끌고 복도로 나서며 강남 쪽에서의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강남역에 도착했을 땐, 저항군분들이 작전대로 강남 곳곳으로 적들을 분산시킨 이후더라고. 흩어진 강이란 세력의 헌터들도 서초 쪽 빌딩을 지키러 돌아오는 대신 전부 도망쳤어. 그래서 강남 실험실이 있는 강남구청까지 별다른 방해 없이 갈 수 있었어. 가는 도중에 실험실 안으로 진입할 사람들하고도 별 탈 없이 합류했고.”

아무래도 강이란이 죽었다는 사실이 ‘후원 미션’에 덧붙여져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듯하다.

“덕분에 강남 실험실에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진입했어. 대신 그곳에 있던 회사 측 헌터들 때문에 분전 좀 했지. 수가 많은 건 아닌데, 강한 헌터가 좀 있더라고. 그렇게 싸우다 하루가 지났는데, 서울 곳곳에서 난리가 난 거야.”

이화가 언급한 난리란 노인이 이야기해줬던 내용과 같았다. 우리가 공덕 실험실을 파괴하고 구해준 실험체가 강남에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실험체의 가족이 회사에 반기를 들며 일어난 난리였다.

“거기에다 나은이가 말 그대로 날뛰어주어서, 회사 측 헌터들도 상황이 점점 심상치 않아진다고 여겼는지 하나둘 도망치더라고. 전력실에서 자료를 폐기하던 한 사람만 빼고 말이야.”

“한 사람? 누군데?”

“저 안에 갇혀 있거든. 오빠도 잘 아는 사람일 거야.”

이화가 데리고 간 점포 안에는 동현이 형이 있었다. 형은 누군가의 목에 칼을 겨눈 채 서 있었는데 이화가 잠깐 자리 비켜줄 수 있겠냐고 묻자 알겠다며 칼을 치우고 밖으로 나가 주었다.

자신의 목을 겨누던 칼이 치워지자 잡혀 있던 사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튀어나온 첫마디는 욕이었다.

“삼촌, 오랜만에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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