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18화 (119/168)

[17. 독사지옥(19)]

시간이 흘러 어느덧 시련 종료까지 이틀 남은 시점이 되었다. 그동안 용산 전자상가의 모습은 많이 바뀌었다. 새로 합류한 헌터들이 대장간 근처에 거처를 하나둘 마련하면서 주둔지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강남 실험실에 갔던 사람들이 돌아온 날. 주인장은 남고 싶으면 남아도 되지만 엔간해선 본인이 원하는 곳으로 떠나라고 강조했기에, 실험실에서 구출한 분들과 회사에서 빠져나온 분들 대다수가 이곳에 남겠다고 결정했을 때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이후 불평이란 불평은 다 하면서도 점포를 하나둘 열어주고 침구류를 갖다 주는 등 새로 합류한 분들이 거처를 마련할 수 있도록 협력해주었다. 한성수의 말에 따르면 북적이는 용산 전자상가의 모습을 보고 몰래 미소 짓고 있었다고 하니 지금 이런 상황이 마냥 싫지만은 않은 듯하다.

지금처럼 밥을 한데 모여 먹을 수 있도록 식당가를 개방해준 것도 주인장의 배려였다. 이왕 같이 지낼 거면 얼굴이나 빨리 익히라던가.

주인장의 배려로 버려진 푸드코트는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내가 만든 요리를 먹는 모습을 볼 때마다 멸망 이후 이런 광경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잘 먹겠습니다.”

물론 괴수를 재료 삼아 만든 요리임을 밝혔을 땐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랬던 사람들도 사흘 동안 제법 익숙해졌는지 지금은 거리낌 없이 식사를 배급받고 있다.

덕분에 식량 조달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초월자들의 따뜻한 배려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괴수는 넘쳐나는 상황이니, 그들을 식량 삼는다면 먹을 게 부족할 일은 없었다.

식량 조달 문제가 해결된 건 좋긴 한데, 괴수 요리에 거리낌이 없어진 게 허기 때문인지 맛에 만족해서인지 궁금하긴 하다. 직접 묻고 싶어도 일단은 저분들이 밝은 표정으로 식사하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내가 맛을 물어본다면 그 자리에 붙잡힌 채 고맙다는 인사를 한세월 듣게 될 게 뻔했다.

이틀 전 저분들에게 붙잡혀 한 시간가량 감사 인사를 받은 걸 떠올리며 몸을 떨고 있으니, 앞에 앉아 식사 중이던 이화가 스튜를 먹다 말고 물었다.

“오빠, 이건 뭐로 만든 거야?”

“항상 그랬듯이 모르는 편이 더 나을 텐데.”

“그래도 궁금하잖아.”

“‘어글리 베지터블’ 기억나?”

“그저께 잡은 괴수들? 엄청나게 큰 채소에 눈코입 달린 정도면 음식 재료로 썼다고 해도 괜찮은데? 왜 괜히 겁주고 그래.”

“스튜 안에 들어 있는 채소는 그 괴수한테서 나온 거고. 고기는 ‘어글리 베지터블’ 파먹던 괴수한테서 나온 건데….”

“뭐? 그 애벌레?”

이화는 ‘어글리 베지터블’을 갉아먹던 거대한 애벌레가 떠올랐는지 표정을 한껏 찡그리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모르는 편이 낫다고 했잖아. 김아람 헌터한테는 비밀이야. 알았다간 기겁할 거야.”

다른 사람들은 재료에 관해 듣지 못했길 바라며 남은 스튜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식자재를 구하기 힘든 지금 상황에선 ‘거잠’의 모습이 징그럽든 말든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어차피 원재료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고 먹으면 충분히 맛을 즐길 순 있었다.

“이게 애벌레 조각이라 이거지. 그래도 오빠가 만든 거니까 눈 딱 감고 먹으면 맛은 있는데….”

이화가 수저로 스튜를 뒤적거리는 걸 보며 애벌레 이야기를 계속하게 두면 안 되겠다 싶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오늘도 소득 없었어?”

“소득? 삼촌 이야기하는 거야?”

고개를 끄덕이자 이화는 한숨부터 쉬었다.

“여전히 별 이야기 안 하더라. 본인은 허수아비 같은 느낌이라 회사에서 특별히 알려준 게 없대.”

“또 거짓말하고 있는 거 아니야?”

“주먹 좀 썼는데도 같은 말만 하는 걸 보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 혹시 동현 오빠 쪽은 어땠어? 회사 관련해서 뭐라도 좀 들었어?”

“별반 다를 거 없어.”

어지간히도 시달렸는지 동현이 형은 다시는 대주교를 심문하기 싫다며 불평했다.

“대주교라고 했나? 그 인간 입은 막아 두는 게 나은 것 같더라.”

대주교의 바퀴벌레 신 찬양은 여러 번 들어봤기에 동현이 형이 짜증 내는 이유는 잘 알 것 같다.

“회사 관련 정보는 하나도 못 얻은 거네.”

회사가 서울에서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들은 지 벌써 3일이나 지났는데 그 외의 정보에 관해선 전혀 알아내고 있질 못하니 답답할 따름이다.

“수연 언니, 허상헌 헌터 쪽은 어때?”

이화의 물음에 수연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오늘도 깨어날 기미는 없었어.”

“그래? 나은이 실망하겠네. 스킬 ‘축복’ 써서 기절 상태에서 깨우면 안 되는 거야?”

“그 스킬을 써서 깨우면 몸에 부담이 많이 되거든. 그래서 긴급한 상황이 아니면 되도록 안 쓰려고.”

회사나 신기 등 허상헌에게도 물어볼 게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지만, 수연이가 저렇게까지 말하니 재촉할 순 없을 것 같다.

“오빠는?”

“난 왜?”

“여기 지내는 사람들 모두가 먹을 요리를 며칠 내내 만들고 있으니까 힘들진 않나 해서.”

대답하려니 전에 지은정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치료, 스탯 상승, 무기 제공 등. 차후 실험실을 만든 놈들하고 맞붙는 데 필요한 건 전부 저희 측에서 준비할 겁니다.’

“힘들더라도 차후에 회사랑 전투할 걸 생각하면 저분들 스탯을 이렇게라도 조금씩 올려주는 게 맞아.”

용산 전자상가에서 지내는 인원은 백 명가량. 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선 많은 양의 요리를 끼니마다 만들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요리사를 자청한 이유는 강한 패를 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회사 본부가 춘천으로 도망쳤다지만, 언제 춘천의 세력을 업고 서울을 탈환하러 올지 모르는 일이다. 회사와 다시 맞붙게 될 때를 대비하기 위해선 괴수 요리로 스탯을 올리는 방식을 써서라도 수중에 있는 말을 조금씩 강하게 만들어두는 편이 낫다.

“그보다 다른 사람들은 밥 안 먹고 어디 갔어?”

“임성윤 헌터님이라면 아까까지만 해도 애들 놀아 주시다가, 김화영 헌터님하고 같이 공덕역 쪽으로 가셨어.”

수연이의 말에 속이 울렁거렸다.

며칠 전부터 노인은 이 시간만 되면 공덕역으로 갔다. 그 근처에 있다 보면 송태섭을 만날 수 있을 거란 이유에서였다. 원래는 나도 노인을 따라가려 했으나 식사를 담당해야 하는 바람에 나 대신 김화영이 노인과 함께해주고 있었다.

“이나은 헌터는 아람이랑 성수 데리고 훈련 중이었어.”

“아직도요?”

몇 시간 전부터 시작한 훈련이 아직도 안 끝났다니. 몸만 풀겠다며 김아람과 한성수를 끌고 가놓고 너무 혹사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공덕역 쪽으로 간 사람들 밥도 푸는 김에 이나은 쪽도 데려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날게.”

노인과 김화영이 돌아왔을 때 먹을 수 있도록 두 사람분의 스튜를 따로 보관해두고 이나은 쪽이 훈련하고 있다던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 올라가자 이나은이 홀로 김아람과 한성수를 상대하고 있는 게 보였다. 오전에 점포에서 쉬었던 두 사람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나은은 몸이 쑤셔서 안 되겠다며 이 근처의 괴수를 싹 정리하고 돌아온 참이다. 그래놓고 몇 시간 째 훈련을 이어가고 있다니. 몸 풀겠다고 훈련하는 것치고는 강도가 너무 세다.

“크흠.”

크게 헛기침하자 김아람이 생명을 불어 넣어준 그림 병사가 제일 먼저 멈추었다. 그다음으로 나를 알아챈 건 한성수. 땀을 뻘뻘 흘리는 그는 나를 보자마자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시간이 어느새 이렇게 되었냐며 잠에서 깨어나는 김아람 쪽으로 달려갔다.

마지막으로 나를 알아챈 건 이나은. 그녀는 그림 병사의 몸을 주먹으로 관통한 이후에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훈련을 방해하고 싶었던 건 아닌데, 너네도 저녁은 먹어야지.”

“죄송해요. 저희까지 먹어야 빨리 뒷정리하실 텐데,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아니야. 이따 있을 회담까지는 시간 좀 있으니까 너희 먹을 시간은 충분해.”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이화 오빠답습니다.”

내 말을 듣고 푸드코트로 내려가려는 김아람과 한성수와 달리 이나은은 몸을 푹 숙인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온종일 몸을 혹사한 탓에 대답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둘 먼저 내려가 있어. 이나은 헌터는 내가 데리고 내려갈게.”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나은을 힐끗 바라보더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두 사람이 내려간 뒤 특급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건네자 이나은은 조용히 그를 받아들었다. 이나은은 단숨에 물 한 병을 비우고는 고맙다고 인사했다.

“허상헌 아저씨는 아직도 안 깨어났대요?”

“응.”

“신기에 관해서는 여전히 정보를 못 얻은 거네요.”

“당장 급한 것도 아닌데, 기다려야지. 그나저나 넌 시련 끝날 때까지 쉬는 게 낫지 않겠어? 강남 쪽에서도 한 번도 안 쉬었다며. 아무리 수연이 스킬로 피로를 해소했다 하더라도, 쉴 수 있을 땐 쉬어 둬야지.”

내 말에 이나은이 물병을 꽉 쥐어 찌그러뜨렸다.

“제가 어떻게 쉬고 있겠어요. S급 헌터나 되면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데….”

뜻밖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지금까지 전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잖아요. 부대장이든 강이란이든 가장 힘든 상대는 제가 맡는 게 맞는데 전부 정현 헌터한테 떠넘기기나 하고…. 적어도 이번만큼은, 강이란만큼은 제 손으로 처리했어야 했는데….”

해가 지고 있어서인지 이나은의 표정은 평소보다도 더 어두워 보였다.

“정현 헌터는 어떻게 해서 강이란을 쓰러뜨린 거예요? 비전투원이잖아요. 그런데 대체 어떻게….”

주먹을 꽉 쥔 이나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침묵을 지키고 있자니 이나은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도 정현 헌터만 쓸 수 있는 방법으로 이긴 거겠죠. 알아봤자 제가 쓸 수 없을 테니 됐어요.”

고개를 젓던 이나은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래서야 그때랑 다를 바가 없어요. 어떻게서든 강해져야 해요. 저한테 남은 건 이젠….”

이나은은 말을 끊고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아니에요. 밥 먹으러 갈게요.”

그러곤 조용히 서 있는 날 지나쳐 아래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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