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거해지옥(2)]
“이건 대체….”
지금까지 밝혀진 규칙을 종합해보면 이번 시련은 마피아 게임과 비슷하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염소 카드를 지닌 플레이어는 진실만을 말해야 합니다’, ‘염소 카드를 지닌 플레이어는 다른 플레이어를 죽일 수 없습니다’ 같은 규칙들이 왜 있나 했는데, 전부 이걸 위한 빌드업이었나.
“그래도 저 인간이 대주교부터 죽여서 다행이네요. 저 인간만 투표로 처형하면 남은 사람들끼리는 서로를 죽일 수 없는 거잖아요.”
추가 규칙을 읽고 동요하는 사람들 속에서 이나은이 말했다. 그녀의 말에 마른 남자가 찬성했다.
“그렇게 해요! 굳이 회사 측 인간을 살려둘 이유는 없잖아요. 분명 손만 자유로워지면 저희를 해치려 들 거예요.”
그가 찬성한 이후 하나둘 동의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노인과 내가 침묵한 가운데 모두가 이나은의 의견에 동조하자 삼촌은 당황한 듯 몸을 떨었다. 염소 카드를 지닌 플레이어는 본인을 죽일 수 없다는 규칙을 보고 안심하고 있었던 것 같다.
“투표 시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덩치 큰 남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공에서 종이 여덟 장과 펜 여덟 개가 떨어졌다.
종이에는 각기 다른 장소에 숨은 염소 일곱 마리와 늑대 두 마리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중 한 늑대에는 X자가 처져 있었다. 남은 늑대의 배에는 당연히도 바늘 자국이 있었다.
“이게 투표용진가 보네요.”
“서둘러 투표하죠. 이 늑대 위에 X자를 치면 되겠죠?”
마른 남자의 재촉에 투표는 자연스레 진행되었다.
언젠가 회사 측과 상대할 때 쓸 인질로 삼촌을 붙잡아두고 싶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아 결국 펜과 종이를 들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처럼 배에 바늘 자국이 있는 늑대에 X자를 쳤다.
그렇게 배에 바늘 자국이 있는 늑대에 X자가 쳐진 투표용지가 여섯 장 모였다.
삼촌은 허탈했는지 투표용지엔 손도 대지 않고 별말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여성의 말에 대한 답변이라도 되는 듯 집안의 빛이 모두 사라졌다.
잠시 후 빛이 돌아왔을 땐, 갈라진 복부에 돌을 가득 채운 삼촌이 탁자 위에 누워 있었다.
투표가 종료된 이후, 우리는 삼촌과 대주교의 시체부터 집 안 구석으로 옮겼다. 그런 다음 주방으로 돌아오니 탁자에 튀어 있던 핏자국은 완전히 지워져 있고, 대신에 빵 일곱 개와 우유 일곱 잔이 놓여 있었다.
“음식은 제공해주겠다는 건가.”
불평하며 빵을 물었는데 독 내성 관련 글씨는 새겨지지 않았다. 혹시 몰라 우유까지 마셔 보았으나 마찬가지로 독 내성 특성은 발동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음식에 독은 없나 보다.
“먹어도 될 것 같아요.”
이미 열심히 빵을 먹고 있는 실험체 분들과 달리 노인과 이나은은 내 허락이 떨어진 후에야 식사를 시작했다. 그 뒤로 한동안 다들 조용히 식사에만 집중했다.
빵을 뜯으며 여기 없는 다른 일행들은 어떻게 시련을 보내고 있을지 걱정하고 있는 와중 여성분이 화두를 열었다.
“혹시 이름이 어떻게 돼요? 서로 이름이라도 알고 지내면, 긴장이 조금은 풀릴 것 같아서요.”
몸을 떨고 있는 걸 보니, 아까 죽은 삼촌의 모습을 본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하다. 그런 그녀의 심정을 알아챘는지 노인이 먼저 본인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그를 시작으로 하나둘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렇게 알게 된 덩치 큰 남성의 이름은 이승현, 마른 남성의 이름은 조재헌이었다.
서로의 이름을 밝힌 후 하루가 끝날 때까지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거실 한편에 자리 잡아 휴식을 취했다. 괴수도 없고, 우리를 위협하는 적도 이번 시련 동안은 없다는 점 때문이었을까? 괘종시계가 저녁 8시를 알릴 때까지 편안한 시간은 지속되었다.
“또 여기야?”
다음 날 아침. 이번에도 난 벽난로 안에서 깨어났다. 분명 거실 쪽에 한데 모여 잠들었는데 대체 누가 옮겨놓는 건지. 다른 사람들도 다른 곳으로 옮겨진 건 마찬가지였는지 집 안 곳곳에서 주방의 탁자로 모이고 있었다. 그들을 보며 아무런 생각 없이 벽난로에서 기어 나오고 있는데, 이승현이 물었다.
“이해인 헌터는요?”
그 말이 시발점이 되어 모두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췄다.
“나오고 있는 중 아닐까요?”
시간이 흐르고 조재헌이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그때까지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지 않았는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는 게 나을 것 같네.”
집안을 샅샅이 뒤진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즈음 조재헌의 비명이 들렸다.
“그만! 제발 그만 시련을 끝내줘!”
조재헌의 비명이 들린 주방 쪽으로 가니 그는 바닥에 쭈그린 채 찬장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린 찬장 안에는 이해인이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문제는 그녀가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는 거였다.
“이해인 헌터가 이런 곳에서 죽었다니…. 내 실책이네. 주방 탁자 밑에서 잠들었음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네.”
“임성윤 헌터 잘못은 아니죠. 규칙상 한번 잠들면 다음 날 아침 8시가 되기 전까진 깨어나지 못하는 거잖아요. 눈치채지 못한 게 당연해요. 그보다 늑대 카드를 가진 사람은 이제 없는 거 아니었나?”
“싫어. 이젠 싫어. 제발 끝내줘. 난 죽기 싫다고.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진 않단 말이야.”
이나은이 의문을 제기한 순간. 바닥에 쭈그려 있던 조재헌이 비명을 지르며 어딘가로 달려갔다.
“저 인간은 또 왜?”
이나은이 뒤를 쫓으려는데 탁자 위에 족자 하나가 떨어졌다. 이나은을 멈춰 세우고 확인한 족자의 내용은 이러했다.
[추가 규칙 2]
- 늑대 카드를 지닌 플레이어가 살해당하거나 투표로 처형당하면 저녁 8시에 남은 플레이어 중 한 명에게 늑대 카드가 주어집니다.
- 초월자님들의 재미를 위해 마지막 추가 규칙은 이틀 뒤 밝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추가 규칙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이러면 말이 달라지네요. 저희 중 누군가의 카드가 늑대 카드로 바뀌었단 거잖아요. 그러면 시체를 다시 제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는데요. 살해 방식을 보면 누구일지 추론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겠군. 그러면 내가 조재헌 헌터를 데려올 테니 자네들이 이해인 헌터를 살펴봐 주게나.”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조재헌 헌터가 이상한 짓을 하진 않을지 걱정되네요.”
노인이 조재헌이 사라진 방향으로 가려 하자 이승현이 그를 따라나섰다.
“잠깐만요. 혹시 모르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끼리는 카드를 서로 공개하죠.”
내 말에 떠나려던 두 사람이 멈췄다.
“따로 떨어졌을 때, 늑대 카드를 지닌 사람하고 단둘이 남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내 경고가 일리 있다고 전원이 동의해주어 카드를 서로에게 공개했다. 다행히도 여기 남은 사람들의 카드는 전부 염소 카드였다.
“그러면 조재헌 헌터의 카드가 늑대 카드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군.”
“단순히 가능성이 큰 게 아니라 100%인 거 아닌가요? 가자마자 붙잡아두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그건 조재헌 헌터의 카드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뒤에 해도 충분하네. 그래도 투표 시간 끝나기 전에 이곳으로 데려오긴 해야 할 것 같군. 서둘러 조재헌 헌터한테 가서 카드부터 확인해보지.”
“그럼 그쪽은 두 분께 맡길게요.”
노인과 이승현이 자리를 떠난 뒤, 난 이나은과 함께 찬장 쪽으로 향했다. 찬장에서 이해인을 끌어 내리니 목에 그어진 선명한 칼자국이 보였다. 잠든 사이에 그어진 터라 별다른 저항조차 못 하고 죽은 듯하다.
“좀 무섭긴 하네요. 밤에 잠들면 죽는 순간까지도 깨어나지 못하나 보죠?”
“그러게. 근데 이러면 누구나 이해인 헌터를 죽일 수 있었겠네. 여기 주방에만 해도 식도는 몇 개나 꽂혀 있으니깐.”
“어차피 조재헌 헌터가 이해인 헌터를 죽인 거 아닌가요? 그런데 굳이 왜 죽인 걸까요? 서로 죽이지 않더라도 다 같이 시련을 클리어할 수 있는 거잖아요. 평소에 원한이라도 쌓여 있었던 걸까요?”
그녀의 물음에 답하려는데 이해인의 바지에서 무언가 빠져나왔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바지에서 빠져나온 건 한 장의 카드. 그 카드엔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 늑대가 그려져 있었다.
“뭐야? 이 카드가 왜 여기에 있어요? 그럼 염소 카드를 가진 사람이 늑대 카드를 가진 사람을 죽였다는 거예요? 규칙에 따르면 그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렇지? 염소 카드를 지닌 사람이 이해인 헌터를 죽이지는 않았을 거야.”
“그러면 왜 이 카드가 여기서?”
의문을 풀기 위해 찬장 위로 기어 올라가 내부를 샅샅이 뒤진 결과, 피 묻은 식도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이게 살해 도군가 보네.”
“본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예요? 왜죠? 그럴 기미가 전혀 안 보였는데?”
“늑대 카드에 뭔가 비밀이 있는 것 같은데?”
이해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생각에 잠기려는데 저 멀리에서 노인이 우리를 불렀다.
“자네들, 얼른 이곳으로 와보게나!”
다급한 그의 말에 생각을 미뤄두고 현관문 쪽으로 달려가니, 이승현과 노인이 바라보는 가운데 펑펑 울고 있는 조재헌이 보였다.
“우린 다 죽을 거야. 여기 갇힌 채로 다 죽을 거라고!”
그는 모두가 죽을 거라고 외치며 문고리를 정신없이 돌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문고리는 그의 손에서 헛돌 뿐,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어이없어하며 이나은이 조재헌을 밀치고 대신 문을 열려고 시도했으나, 문은 굳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린 다 여기 갇힌 신세라고! 늑대 카드를 가진 사람이 죽이기만을 기다려야 한다고!”
“시끄러우니까 그만 우세요. 어차피 시련이 끝나면 문도 다시 열릴 거고, 무엇보다 늑대 카드를 가진 사람한테 죽기만을 기다릴 필요도 없거든요. 따라오기나 하세요.”
이나은은 우는 소리를 듣기 싫다며 조재헌을 끌고 이해인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가 바닥에 떨어진 늑대 카드를 보여주었다.
“자, 봤죠? 늑대 카드를 가진 사람이 자살했으니까, 이제 새로운 늑대 카드가 누군가한테 주어질 일은 없어요.”
“추가 규칙 기억 안 나세요? 늑대 카드를 가진 사람이 죽으면 다른 사람한테….”
“추가 규칙은 늑대 카드를 가진 플레이어가 살해당하거나 투표로 처형당할 때 다른 플레이어한테 늑대 카드가 돌아간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이해인 헌터는 자살을 택했잖아요? 그러니 늑대 카드는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렇지만.”
“뭐, 걱정된다면 내일 일어나자마자 다시 한번 서로 가진 카드를 확인해보죠. 그랬는데 누군가한테 늑대 카드가 주어져 있다면 수갑으로 손을 채워두기로 해요. 그러면 다들 안심하고 시련이 끝날 때까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테니.”
이나은의 말에 결국 조재헌도 고개를 끄덕였다.
“참, 그리고 카드는 보여주실래요? 조재헌 헌터가 늑대 카드를 가지고서 연기하는 거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 자리에서 다시 한번 각자의 카드를 공개했는데, 역시나 다들 염소 카드를 갖고 있었다.
“됐죠? 그러니 그만 좀 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