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거해지옥(3)]
이해인이 죽은 뒤. 한참 동안 조재헌의 비명 섞인 울음이 이어졌으나, 그 외에 추가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은 채 하루가 끝났다.
잠에서 깨어나 이제는 익숙해진 벽난로 밖으로 나왔을 때도 어제까지 살아남은 인원 전원이 모여 간밤에 별다른 일이 없었음을 알려 주었다.
“빠짐없이 모였다는 건 이해인 헌터가 늑대 카드의 마지막 주인이었다는 거겠군.”
“그, 그건 모르는 거죠. 혹시 이 중에서 늑대 카드를 가진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 다들 카드부터 꺼내세요.”
카드를 꺼내라고 말한 조재헌은 우리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식도를 겨눴다. 며칠간 누군가 죽는 걸 쭉 봐와서 그런지 신경이 잔뜩 곤두선 듯했다.
“자, 보게. 내 카드는 염소 카드라네. 그러니 이만 안심하고 칼은 그 자리에 내려두게나.”
“아직이에요. 다른 사람들도 빨리 보여주세요.”
“그러다 자네가 다칠까 봐 그러네. 칼은 내려두고 카드 확인해도 충분하지 않나?”
“그냥 놔두세요. 덤벼들면 그때 가서 때려눕히면 돼요.”
조재헌의 행동이 어이없었는지 이나은은 한숨을 쉬며 본인의 카드를 들어 올렸다. 그 뒤로 나와 이승현의 카드까지 전부 염소가 그려져 있음을 확인하고서야 조재헌은 식도를 내려놓았다.
“그쪽도 카드는 보여주셔야죠.”
이나은의 요구에 보여준 조재헌의 카드 역시 염소 카드. 모두가 어제 갖고 있던 카드를 그대로 갖고 있었다.
“이러면 정말 끝난 거네요. 시련 끝날 때까지 마음 놓고 있어도 되겠어요.”
“근데 뭔가 이상하지 않아?”
“어떤 게요?”
“지금까지 겪었던 시련을 생각하면 이렇게 나흘 만에 끝나도록 설계하진 않았을 것 같아서.”
문득 든 생각을 말하자 조재헌이 괜히 무서운 소리는 말라고 투덜댔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요. 벌써 세 명이나 죽었으니 남은 사람들끼리라도 편히 지내라는 초월자님들의 배려겠죠.”
초월자들의 배려? 지금껏 그들이 우리를 배려해준 적이 있었던가?
초월자가 그간 우리에게 해온 짓을 생각하면 아직 뭔가 더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그래도 집 안에서 나갈 수 있게 될 때까진 다들 긴장의 끈을 놓지 말게. 정현 헌터의 말대로 남은 사흘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으니.”
노인의 경고가 무색하게 남은 하루 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려는데 별안간 이나은이 뜬금없는 말을 했다.
“정현 헌터가 뭔가 이상하다고 해서 계속 생각해봤거든요. 그러다 알아챈 게 있어요.”
“알아챈 거?”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에요. 저희가 아침마다 이상한 곳에서 깨어나잖아요.”
“응. 그게 왜?”
“제 카드 좀 보세요.”
굳이 보지 않아도 이나은의 카드엔 장롱 안에 숨은 염소가 그려져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무언가 특별한 게 더 있을까 싶어 집중해서 그림을 살폈다. 그러다 보니 이나은이 알아챘다는 게 뭔지 눈치챘다.
“염소가 숨은 장소에서 우리가 깨어나고 있다는 거지?”
“네. 정현 헌터는 매번 벽난로 안에서 깨어나고, 임성윤 헌터는 매번 주방에 있는 탁자 밑에서 깨어나잖아요.”
“그러네. 내가 왜 이걸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
“저도 알아챈 지 얼마 안 됐어요.”
이나은은 노인이 거실에 있는 탁자 밑에서 깨어난다면 식탁보 때문에 따뜻하기라도 했을 텐데, 굳이 주방에 있는 탁자 밑에서 깨어나 허리만 배기고 불편하겠다고 생각하다가 이 사실을 알아냈다고 덧붙였다.
“굳이 염소가 숨은 장소에서 깨어나게 만든 이유가 있겠지?”
물음에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이나은이 입을 뗐을 땐 이미 괘종시계가 울리고 있었다.
“늑대 카드 가진 사람은 분명히 없었잖아요? 이게 대체 어떻게….”
“우린 다 죽을 거예요. 다 죽을 거라고요!”
아침이 되어 벽난로에서 기어 나오는데 조재헌의 외침이 들렸다. 외침이 들려온 곳으로 황급히 달려가니 다들 괘종시계의 시계추 부분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계추는 무언가에 걸려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승현이 시계추의 움직임을 방해한 물체를 밖으로 끌어내고 있었는데, 다들 그 물체를 보고 충격을 받은 듯했다.
“이 사람은 누구예요?”
이승현이 끌어낸 건 처음 보는 한 남성. 지금껏 어디에 있다가 왜 이제야 괘종시계 안쪽에서 나온 건지 의문이었는데, 그 답을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었다.
“혹시 이 사람이 누군지 아는 분 있나요?”
남성의 시체를 가리키며 물으니 다들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또 저번처럼 늑대 카드를 가진 사람일까요?”
이승현의 물음에 이나은이 그의 품에서 카드를 찾아냈다.
“그건 아니네요.”
남자가 갖고 있던 카드엔 괘종시계 안에 숨어 있는 염소가 그려져 있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염소는 총 일곱 마리. 처음에 모였을 때, 왜 굳이 늑대 카드를 두 명에게 주었나 싶었다. 늑대 카드를 한 명에게만 주고 남은 일곱 명에게 염소 카드를 주면 동화 속 등장인물의 수와 똑같지 않은가. 그러면서 염소 카드를 지닌 플레이어 일곱 명과 늑대 카드를 지닌 플레이어 한 명이 남아 있으면 특별한 보상을 준다는 조건을 넣은 것도 이상했다. 그랬는데 마지막 염소 카드를 지닌 사람이 지금껏 숨어 있을 줄이야.
“이래서 빵하고 우유를 하나씩 더 줬던 거였군.”
“뒤편에 비밀 공간이 있어요. 아마 시련 시작된 이후로 계속 여기 숨어 있었던 것 같아요.”
이나은의 말대로 시계추 뒤편엔 어딘가로 이어진 통로가 있었다. 이나은과 눈빛을 주고받은 뒤 몸을 최대한 낮춰 통로를 기어가니 생각보다 큰 공동이 나왔다. 공동은 두 사람이 쭈그릴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었는데 바닥엔 시계추까지 이어진 핏자국이 있었다.
빵부스러기가 널린 바닥을 살피니 곧 피 묻은 부지깽이를 찾을 수 있었다.
“이게 흉기인가 보네.”
예상 시나리오는 잠에 빠져있던 동안, 부지깽이로 살해당했다는 것. 살아남기 위해 괘종시계 밖으로 기어나가다 완전히 죽음을 맞이한 듯하다.
“근데 그러면 살해당하는 와중에 잠에서 깨어났다는 거잖아. 그게 아니라면 핏자국이 이렇게 바깥으로 이어질 리가 없는데….”
의문만 더 생긴 채 괘종시계 밖으로 나오니 조재헌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지금 우리 중에 누군가 늑대 카드를 갖고 있다는 거잖아! 시체는 내버려 두고 다들 카드부터 보여줘.”
조재헌의 말에 다들 인상을 쓰면서도 카드를 꺼내 들었다.
“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들의 카드는 어제 본 것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누, 누군가는 늑대 카드를 갖고 있어야 하는 거잖아!”
조재헌의 말을 무시하고 카드를 다시 품에 넣으려다가 문득 어제 이나은이랑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카드에 그려진 염소가 숨은 장소에서 깨어난다.”
그 사실을 염두에 두며 카드를 바라보니 이상한 점이 보였다.
“혹시 오늘 아침에 다들 어디서 깨어났어요? 전 다들 알다시피 벽난로 안에서 깨어났거든요.”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대체 뭘 하려는 거냐고 묻는 조재헌과 달리 내 의도를 파악한 이나은은 곧바로 자신이 깨어난 장소를 말해주었다. 이나은에 이어 노인까지 본인이 깨어난 장소를 말해주자 이승현과 조재헌도 어디서 깨어났는지 알려 주었다.
이나은은 장롱 안에서. 노인은 주방에 있는 탁자 아래에서. 이승현은 방 안에 있는 이불 아래에서. 마지막으로 조재헌은 화장실 안의 뒤집힌 거대한 세숫대야 밑에서 깨어났다고 했다.
그걸 들으며 카드를 보니 그제야 누가 범인인 줄 알게 되었다.
“투표할게요.”
투표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허공에서 종이 다섯 장과 볼펜 다섯 개가 떨어졌다.
“누가 범인인지 알아차린 건가?”
노인의 물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물음에 답하는 대신 투표용지에서 탁자 밑에 숨은 염소를 찾아 X자를 쳤다.
“자네, 왜 날?”
“아침마다 저희는 각자가 가진 카드에 그려진 염소가 숨은 장소에서 깨어나고 있어요.”
“어렴풋이 그건 알고 있었다네. 실제로 난 탁자 아래에서 깨어났고.”
“저도 몇 번 봤어요. 임성윤 헌터는 그때마다 주방의 탁자 아래에서 깨어났어요.”
“임성윤 헌터가 가진 카드를 자세히 봐봐.”
이나은은 노인이 가진 카드를 바라보더니 말문이 막혔다.
“그림 속 염소는 식탁보가 깔린 탁자 아래에 숨어 있잖아. 식탁보가 깔린 탁자는 주방에 있는 게 아니라, 거실 한 가운데 있는 거고.”
“하지만 내가 주방에 있는 탁자에서 매번 깨어났다는 건 사실이라네. 염소 카드를 가진 것도 사실이고. 아마 깨어나는 장소가 잘못 설정된 걸 거네.”
“그럴 리가요. 그러면 몸 좀 수색해봐도 될까요?”
내 눈짓에 이나은이 노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 뒷걸음질 치며 본인은 늑대 카드를 갖고 있지 않다고 부인할 뿐이었다.
“제 생각이 맞는다면 임성윤 헌터는 대주교가 죽은 날 늑대 카드를 갖게 되었을 거예요.”
“그랬다면 내가 염소 카드를 갖고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추가 규칙은 늑대 카드를 지닌 플레이어가 살해당하거나 투표로 처형당하면 저녁 8시에 남은 플레이어 중 한 명에게 늑대 카드를 준다는 거였어요. 저는 당연히 염소 카드가 늑대 카드로 바뀌는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고 염소 카드가 있는 상태에서 늑대 카드를 준 거였어요.”
“아니야. 아니라네.”
“이해인 헌터도 임성윤 헌터한테 살해당한 거였어요. 살해한 다음에 본인의 카드를 놓고 이해인 헌터의 염소 카드는 어딘가에 숨긴 거예요. 그래야 늑대 카드를 가진 사람이 없는 줄 알고 다들 안심하고 있을 테니까요.”
비밀을 밝히자 노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왜 그러신 거예요? 왜 아무 잘못 없는 두 사람을 살해하신 거예요?”
노인은 내 말에 잠자코 있다가 목청 높여 외쳤다.
“자네 때문에 우리 태섭이가 죽은 게 아닌가! 그때 일만 생각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자네를 찢어 죽여도 마땅치 않네!”
노인은 나를 죽일 듯 달려들었으나 이나은에게 발이 걸려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빛이 사라졌다. 이승현과 조재헌이 투표를 하면서 노인을 선택한 사람이 절반을 넘은 것이다.
다시 빛이 생겨났을 때, 노인은 삼촌이 죽은 것과 똑같은 모습을 한 채 탁자 위에 누워 있었다.
그의 가슴엔 늑대 카드가 꽂혀 있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것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 노인을 떠올리며 복잡한 기분으로 괘종시계가 여덟 번 울리길 기다렸다.
‘뎅-’
노인에게 물어볼 것은 많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부터 죽인 이유. 왜 인제 와서야 나를 죽이려고 했는지 등등.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답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뎅-’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여덟 번째 종소리가 울렸다.
[‘괘종시계’의 소리로부터 보호됩니다.]
[‘수면’ 상태에 빠지지 않습니다.]
“예상대로네.”
그리고 난 괘종시계 안의 비밀 공간에서 그대로 깨어 있었다.
처음 괘종시계 안 비밀 공간을 살폈을 때 바닥에 빵 부스러기가 널려 있던 게 이상했다. 그러다 동화 속 내용이 떠올랐다. 괘종시계 안에 숨어 있던 막내 염소의 재치로 인해 결국 늑대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게.
동화 속 내용과 이번 시련이 연관되어 있으니 괘종시계 안에 숨은 염소 카드를 지닌 사람은 남다른 행동을 취할 수 있을 거라 여겼고, 그래서 8시가 되기 직전 이곳으로 들어왔다.
그랬는데 역시나 괘종시계 안의 공간에 있으면 잠들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었다.
비밀 공간에 숨어 있던 사람이 단 한 번도 우리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면서 배고픔은 어떻게 버틴 건지 궁금했는데, 밤마다 돌아다니며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은 것 같다. 그러다 노인에게 모습을 들켜 살해당한 거고.
어찌 되었든 밤에 잠들지 않는다는 건 염소 카드를 지닌 측한텐 기회나 다름없다. 조금씩 괘종시계 바깥을 향해 기어가자 움직이는 시계추 사이로 바깥의 풍경이 보였다.
그 상태로 얼마나 오래 밖을 지켜봤을까. 마침내 누군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