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23화 (1부 완결) (124/168)

[20. 일곱 번째 판결]

놀랍게도 움직이고 있는 사람은 조재헌이었다. 그는 미친 듯이 중얼거리며 집 안을 배회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내가 안 죽인다면…. 내가 다른 사람을 죽여야만….”

숨죽인 채 시야가 허락하는 한도에서 바깥의 상황을 지켜보는데 그가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저 방은 이승현이 잠들어 있는 곳, 곧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뻔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이승현의 죽음을 방관한 셈이 되는 거지만, 나서봤자 막을 방도가 없는 걸 알기에 무기력하게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재헌의 목소리는 한참 뒤에야 다시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어쩔 수 없었어! 정말 어쩔 수 없었다고! 끝까지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었어. 난 잘못한 게 없어. 내가 죽기 전에 다른 사람을 죽인 것뿐이야.”

그 뒤로 한동안 집 안을 배회하던 조재헌은 화장실 쪽으로 돌아갔다. 화장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뒤로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참을 더 상황을 살피다 괘종시계에서 나와 최대한 기척을 죽인 채 이승현이 있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승현은 이불에서 얼굴만 빼놓은 채로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코에 손을 가져다 대니 숨을 쉬고 있지는 않았다. 몸에 상처는 없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근처에 놓인 베개로 질식사당한 듯하다.

그의 옆에는 늑대 카드 한 장이 버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조재헌은 노인이 했던 방식을 그대로 이용해 이승현이 자살했다는 식으로 우리를 속이려고 한 듯하다.

상황 파악이 끝난 후, 조심히 벽난로로 돌아갔다. 다행히 그때까지도 조재헌은 화장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자리에 누운 난 그 상태로 한참을 뒤척이다가 어느 순간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예상대로 조재헌의 비명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조재헌은 이승현의 시체를 발견했다면서 우리에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었다.

“여기 시체가 있다고요! 빨리 오세요!”

이나은과 함께 방 안으로 뛰어들어가니 조재헌이 바닥에서 뭔가를 주워 보였다.

“여기 늑대 카드가 있어요. 이해인 헌터처럼 자살한 거겠죠?”

“섣불리 단정 지을 순 없죠. 저번에도 임성윤 헌터가 이런 식으로 자살한 것처럼 꾸미려고 했잖아요.”

이나은의 말에 조재헌은 불안한 듯 눈치를 살피다 내게도 대화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저 사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봤어요.”

“네?”

“어제는 괘종시계 안의 비밀 공간에서 8시가 되길 기다렸거든요. 그랬는데, 다른 곳에 있을 때와 달리 잠에 빠지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밤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볼 수 있었어요. 조재헌 헌터, 당신이 이승현 헌터를 죽이고 나오는 걸 말이에요.”

내 말에 조재헌은 반발하고 나섰다.

“거짓말이야! 저 인간이 늑대 카드를 갖고 있어서 거짓말하는 거라고!”

“그건 아닐걸요.”

조재헌의 반발에 몸을 탈탈 털면서까지 염소 카드 외에 다른 카드는 갖고 있지 않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이나은 헌터, 염소 카드를 가진 사람은 진실만을 말할 수 있다는 거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죠. 저도 염소 카드, 보이죠? 그럼 늑대 카드를 가진 사람이 누군지 뻔해졌네요. 투표용지 주세요.”

“안 돼! 너희 둘이 늑대 카드를 가진 거지? 그래서 짜고 날 죽이려는 거잖아! 안 돼. 안 된다고. 죽기 싫어. 난 죽기 싫어! 이대로 셋이 시련이 끝날 때까지 사이좋게 지내는 거야. 어때?”

“그러기엔 전과가 화려하셔서요.”

그 말을 들은 조재헌이 움찔했다. 그러곤 투표용지를 빼앗을 생각이었는지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나은이 복부를 걷어차 그대로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렇게 투표를 통해 또 한 명의 헌터가 죽음을 맞이했다. 암전되었다 빛이 돌아왔을 땐, 죽기 싫다던 조재헌의 입에 늑대 카드가 물려 있었다.

조재헌마저 죽어 이나은과 단둘이 남게 되자 절로 숙연해졌다. 오늘 밤엔 괘종시계 안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만 이야기한 채 별다른 말 없이 하루를 보냈다.

마침내 8시가 되고, 괘종시계 안 비밀 공간에 있던 우리는 누구에게 늑대 카드가 돌아갔는지 볼 수 있었다.

[플레이어 ‘정현’에게 ‘굶주린 늑대 카드’가 귀속됩니다.]

[‘셋째 염소 카드’가 귀속 해지됩니다.]

[‘굶주린 늑대 카드’를 지닌 플레이어는 하루에 한 번 다른 플레이어를 죽일 수 있습니다.]

[‘굶주린 늑대 카드’를 지닌 플레이어는 ‘염소 카드’를 지닌 다른 모든 플레이어를 죽여야만 생존합니다.]

[‘굶주린 늑대 카드’를 지닌 플레이어가 ‘염소 카드’를 지닌 세 명 이상의 플레이어를 죽일 시 본인을 제외한 다른 모든 플레이어가 즉사하게 됩니다.]

“제길.”

늑대 카드를 지니면 주어지는 조건을 읊어주자 이나은은 낙담했다.

“이래서 다들 누군가를 죽였던 거구나. 결국 저희 둘 중 한 명만 살아남을 수 있단 거네요.”

“늑대 카드를 지닌 사람이 두 명에서 한 명으로 준 순간부터 이 집에선 한 명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야. 어쩐지 시련이 너무 쉽다 했어.”

“늑대 카드는 왜 줄어들었을까요?”

“남은 플레이어 중 한 명에게 랜덤으로 주어진다니까, 첫날 늑대 카드를 갖게 된 임성윤 헌터에게 우리 삼촌의 늑대 카드까지 주어진 게 아닐까?”

늑대 카드를 얻으며 여러 의문이 해결되었지만, 단 한 가지 문제. 둘 중 여기서 누가 살아나갈 지만은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수밖에 없나.”

물론 홀로 죽음을 맞이한 뒤 ‘CONTINUE?’ 특성을 이용해서 첫날로 돌아가 나와 이나은을 제외한 다른 모두를 죽이는 방법이 있다. 우리 둘 모두가 늑대 카드를 갖게 될 때까지 귀환을 반복한다면 함께 이 집에서 나갈 수 있긴 하다.

“그래도 일단 다른 방법은 없는지 찾아봐야겠네.”

이나은에게 둘 모두가 살아나갈 방법을 찾아보자고 이야기하려는데 그녀는 괘종시계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 뒤를 쫓아 밖으로 향하니 이나은은 어디서 구했는지 식도를 들고 있었다.

“잠깐만. 너 지금 뭐 하려는 거야?”

“전 염소 카드를 갖고 있으니 정현 헌터를 죽일 수 없어요. 그러면 제가 뭐 하려는 건지 바로 견적 나오지 않아요? 절 죽이세요. 그래야만 정현 헌터가 살아남을 수 있어요.”

“아직 시련이 끝날 때까진 시간이 여유롭잖아. 둘 모두가 살아나갈 방법을 생각해보자.”

“아니에요. 정현 헌터라면 알 거 아니에요. 이번 시련에선 한 명만 살아남을 수 있어요. 둘 모두가 살 방법 따윈 없다고요. 그러니까 정현 헌터라도….”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볼 테니까 조금만 시간을 줘. 게다가 너 아직 회사랑도 풀어야 할 게 남았잖아.”

“그까짓 건 정현 헌터가 대신해 주면 돼요. 정현 헌터가 어떻게든 해결해주리라고 믿어요.”

내가 해결해준다고 믿는다고? 평소에도 저런 말을 하긴 했지만, 그것만 믿고 본인의 죽음을 택하는 건….

“…역시 진짜가 아니구나.”

회사랑 풀어야 할 걸, 그까짓 것이라고 표현해준 덕분에 모든 게 이해가 갔다.

“진짜가 아니라고요?”

“이만 시련은 끝내자.”

이나은에게 다가가 식도를 빼앗았다. 그녀는 내가 본인을 찌르려고 했는지 알았던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한데, 이나은 헌터라면 회사랑 풀어야 할 일을 그까짓 거라고 말하진 않았을 거야. 그리고 둘 다 살아나갈 방법을 내가 떠올릴 거라면서 기다려줬을 거고.”

그 말을 끝으로 식도를 휘둘렀다.

식도로 내 목을 긋자 집 안의 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빛이 돌아왔을 때, 난 의자에 앉은 채로 깨어났다.

“뭐야?”

깨어나자마자 목을 더듬거렸는데 상처는 전혀 없었다.

“역시 그랬구나.”

노인이 나를 죽이려 달려들었을 때부터 이상했다. 송태섭의 희생을 욕보이지 말자고 하신 분이 인제 와서 나 때문에 그가 죽었다며 화를 내다니.

그것부터 시작해서 이나은의 마지막 발언까지. 역시나 내가 알고 지낸 사람들이 할 만한 언행은 아니었다. 그래서 떠오른 것이 이 모든 게 환상이 아니겠냐는 것. 김아람의 악몽 스킬처럼 누군가 만들어낸 환상 속에 내가 갇혀 있는 거라면 거기서 나가는 방법은 간단했다.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

혹시나 잘못되면 ‘CONTINUE?’ 특성이 있다고 믿으며 죽음을 택했는데, 생각대로 환상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 외의 사람은 없었다. 처음부터 난 이 집에 홀로 있었던 거다.

처음 집 안에 들어온 뒤로 닫혀 있던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 문을 통해 집 밖으로 나가니 허공에 붓글씨가 크게 적혔다.

[시련이 종료되었습니다.]

[플레이어 ‘정현’은 그림 감상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플레이어 ‘정현’, ‘시련’ 통과!]

“저 집에서 잠든 뒤로 일주일이나 지난 거야? 내가 그렇게나 오래 잠들어 있었다고?”

「너무 빨리 시련이 끝났다고 당황해하시는 분이 많아서 이야기해드리는 건데, 그림 족자 안의 시간은 현실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흐른다네요.」

「또 곧 그림 족자 밖으로 나가면 다른 플레이어들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만약 꿈속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거나 최후까지 생존해 있었다면 말이에요.」

「뭐, 시련을 클리어하지 못했더라도 룰렛을 돌려서 ‘머리’나 ‘몸통’이 나오지 않는다면 만나볼 순 있겠네요.」

「그럼 ‘태산대왕 님의 판결’을 보겠습니다.」

[태산대왕의 판결이 시작됩니다.]

[본인의 생존을 위해 거짓말을 일삼은 플레이어들의 모습에 분노하며 태산대왕이 유죄 판결을 내립니다.]

[U+2641 행성의 죄악 수치가 10 상승합니다.]

[U+2641 행성의 죄악 수치가 70이 되었습니다.]

[‘균형을 재는 자’님이 ‘천상도’로 이어진 문을 봉합니다.]

[‘축생계’와 ‘인간계’가 가까워집니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평상시와 달리 죄악 수치 이후에 몇 가지 신경 쓰이는 문장이 보인다.

「시련도 끝났으니 어서 그림 족자 밖으로 나가주세요. 그림 족자 빨리 치워야 하거든요.」

그 뒤로 붓글씨는 쓰이지 않았다.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길 끝에 놓인 거울이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거울은 탁해서 내 모습은 비치지 않고 일렁거리기만 했다.

“어쩌라는 거야?”

혹시나 해서 일렁이는 부분에 손을 가져다 대자 몸이 끌려가더니 어딘가로 던져졌다.

몸을 일으켰을 땐, 나 말고도 그림 족자에서 내쳐진 일행들이 하나둘 보였다. 이나은과 이화 등 몸을 일으키는 일행이 보여 약간은 안심하며 그들에게 다가가려는데 글씨가 새겨졌다.

[U+2641 행성의 ‘인간계’와 ‘축생계’가 합쳐집니다.]

‘인간계’와 ‘축생계’가 합쳐진다는 글씨가 새겨지자마자 엄청난 진동이 일었다. 이후 땅이 갈라지더니 처음 보는 거대한 나무들이 자라났다.

순식간에 자라나는 나무들 사이 또 하나의 글씨가 새겨졌다.

[다음 ‘시련’은 44일 후 시작됩니다.]

(1부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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