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24화 (2부) (125/168)

[21. 전야 (1)]

그림 족자 안에서의 시련이 끝난 뒤, 벌써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길다면 길다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을 그 시간 동안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

서울 대부분을 뒤덮은 초목과 겨울임에도 기분 나쁘리만큼 덥고 습한 날씨. 이 두 가지만 이야기해도 세상은 한 달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 거다.

뭐, 굳이 서울 전체를 볼 것도 없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용산 거리만 보아도 그렇다.

분명 투기장을 점령하러 용산역으로 향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근방에는 다 무너져가는 건물들만 즐비하게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온통 넝쿨과 풀이 건물 외벽을 뒤덮고, 도시 외곽은 완전히 숲이 점령한 상태. 한 달 전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변화는 이게 다가 아니었다.

이제는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검수지옥’이 구현되었을 당시처럼 고작 울창하게 초목이 자라난 것뿐이었다면 우리가 적응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을 거다.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 건 ‘인간계’와 ‘축생계’가 합쳐진다는 글씨가 새겨진 이후 뜬금없이 튀어나온 저 집들이다. 거리 곳곳에 생겨난 움막과 그 안에서 지내는 주민들. ‘인간계’의 평행세계라고 추정 중인 ‘축생계’에서 넘어온 그들의 생김새를 본다면 왜 우리가 적응에 그토록 어려움을 겪었는지 바로 알 수 있을 거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해?”

호탕한 목소리에 새로운 주민들에 관한 생각을 접었다.

길거리에서 시선을 돌려 나를 부른 방향을 보니 주인장이 망치를 든 채 나무에 기대 있었다. 그녀는 망치로 나무 밑동을 두드리며 물었다.

“요거 때문이야? ‘축생계’라고 했나? 거기랑 합쳐진 지 한 달이나 지났는데, 이젠 익숙해질 때 되지 않았어?”

“그러는 본인도 밤에는 밖에 안 나가려 하잖아요.”

야행성인 ‘축생계’ 주민들을 피해 밤마다 대장간에 박혀 있는 걸 비꼬아 말하자, 주인장은 멋쩍은 듯 웃고는 몸을 돌렸다.

“쩝. 할 말 없게 만드네. 해 지기 전에 빨리 돌아가기나 하자고. 물건은 구해왔지?”

“네. 이나은 헌터가 이번엔 고생했으니 값 좀 더 쳐달래요.”

“우리도 적자라니까.”

그 말을 끝으로 주인장은 묵묵히 대장간 쪽으로 나아갔다.

한동안 침묵을 유지한 채 숲을 헤쳐 전자상가로 나아가는데, 별안간 주인장이 고개를 돌렸다.

“혹시 생각은 정리됐어?”

왜 평소와 달리 아르바이트생을 보내지 않고 본인이 직접 행차했는지 궁금하던 차였는데, 역시 저걸 물어보기 위해서였나.

“생각이라니, 어떤 거요?”

일부러 모른 척 시치미를 떼자 주인장은 망치를 빙빙 돌리며 똑같은 물음을 던졌다.

“뭘 묻는 건지 알잖아. 괜히 내 시간 뺏지 말고 정리됐는지나 말해.”

“‘축생계’랑 합쳐지면서 세상이 완전히 바뀌기도 했고, 회사의 흔적을 추격하는 일도 남아 있고. 그럴 생각할 겨를 없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더 중요한 거지. 한 달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변할지 모르는데 주둔지를 이끌 사람이 아직도 없다는 건 큰 문제 아니야?”

정론이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 중심이 되어줄 인물이 없다는 건 문제이긴 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굳이 나서서 그 역할을 맡고 싶지는 않다.

연구실을 파괴하고 회사를 서울에서 몰아낸 것으로 내 역할은 끝난 거다. 회사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뒤치다꺼리는 본인의 몫. 변화한 세상에 적응하는 거나 다음 있을 시련에서 살아남는 것까지 내가 신경 써줄 필요는 없다.

다만 주인장이 내게 저런 말을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기에 딱히 대꾸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노들섬에선…. 됐다. 너한테 재촉할 처지가 아닌 걸 알면서도 계속 이러네.”

“아니에요. 그럴 수 있죠.”

그림 족자에 들어가기 전, 주둔지 대표 건으로 했던 이야기에 관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이번에도 대화는 끝났다. 대신에 주인장은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네 동생 쪽은 소득 있대?”

“돌아와 봐야 제대로 알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말을 끝까지 잇지 않은 채 고개를 젓자 주인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은 현재 김화영과 노인, 동현이 형을 데리고 원정을 나가 있다. 원정의 목적은 ‘축생계’와 합쳐진 이후 변화한 서울 지형을 파악하기 위함이지만, 사라진 노들섬 주민들을 찾는 목적 또한 있었다.

지난번 시련이 끝난 후, 합정역에 모인 우리는 주변 환경이 완전히 뒤바뀐 것을 보고 우선 노들섬 주민들과 연락을 취하고자 했다. 그러나 주인장이 가진 모종의 연락 수단에 답변은 단 한 개도 오지 않았다.

차후 노들섬에 직접 가보았으나, 그곳은 유령 도시인 것처럼 너무나 조용했다. 어디에서도 사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그들이 향했던 그림 족자가 있던 곳으로 가보았을 때조차 그들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전원이 시련을 클리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최소한 신체의 일부가 잘려 있는 시체라도 발견되어야 했다. 그런데 그조차 발견되지 않았으니 그들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던 건 틀림없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이화가 일행 몇 명과 함께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들의 흔적을 추적하는 중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들의 행방에 관한 실마리는 없었고, 의문만 커질 뿐이었다.

“대체 다들 어디에 숨은 거야? 숨을 거면 말이라도 하든가. 너희 일행한테만 괜히 민폐잖아.”

“괜찮아요. 어차피 원정은 나갈 수밖에 없었어요. ‘축생계’에서 넘어온 모든 주민이 저희랑 함께 지내는 분들처럼 인간에게 호의적이란 보장은 없으니까요. 서울에 남아 있을 회사의 흔적도 추적해야 하고요.”

이화의 원정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대장간에 도착했다.

대장간에 도착하자 주인장은 송우석과 송지아 남매를 시켜 ‘특급 냉장고’에 넣어온 장비 재료들을 창고로 옮기게 시켰다.

그럼 물건을 전달했으니, 이젠 대금을 받을 차례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번엔 ‘와이번’류 괴수들 잡느라 고생했다고 이나은 헌터가 값 제대로 치러달라….”

“에이- 우리끼리 섭섭하게 왜 그래?”

이나은의 당부를 전했으나 주인장은 능청스럽게 조그만 금덩어리 몇 개를 던져 줄 뿐이었다.

이 투박하게 깎인 네모난 금덩어리는 ‘축생계’ 주민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화폐다.

괴수가 하늘에서 쏟아진 후, 완전히 경제 체계가 붕괴해버린 ‘인간계’와 달리 ‘축생계’는 경제 체계가 기존과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괴수나 초월자, 스탯 등이 존재하는 게 당연한 세계에서 문명이 발전해왔기에 시련의 시작 여부와 상관없이 사회가 완전히 붕괴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들도 시련이 시작되었을 때, 무척이나 당황하긴 했다지만.

어찌 되었든 지금 주인장이 준 양이면 본래 받아야 할 액수보다 적은 건 분명하다.

“이거만 받고 돌아가면 분명 화낼걸요.”

“어차피 장비는 내가 만들어주고, 음식은 네가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잖아. 그럼 딱히 돈 쓸 덴 없는 거 아냐?”

“정보료가 워낙 비싸서요. 이 정도론 감당이 안 돼요.”

불평에 주인장은 금덩어리 두어 개를 더 얹어주었다.

“이 정도면 됐지?”

“네. 혹시 또 필요하신 재료 있어요?”

“적어뒀는데, 어디 뒀더라? 잠시만 있어 봐.”

주인장은 잡동사니가 어지러이 놓인 책상 위에서 구겨진 쪽지 하나를 찾아냈다. 쪽지엔 장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와 그 재료가 어떤 괴수에게서 나오는지 적혀 있었다.

“이나은 헌터한테 전해줄게요.”

“나은이는 아직도 숲속?”

“아무래도 오늘 중으로 나올 것 같진 않네요. 그럼 저도 바쁘니 이만 가볼게요.”

“알겠어. 안부 전해주고 다음엔 얼굴 좀 비추라 해.”

전자상가에서 나와 향한 곳은 바로 앞의 허름한 건물. ‘축생계’ 주민에게 얻어 쓰고 있는 움막이다.

움막의 용도는 식당.

이전에 ‘괴수 요리사’로 직업 승급하며 얻은 ‘식당’ 개업의 장소로 이곳을 지정하니 요리에 필요한 설비가 저절로 갖춰졌다. 그래서 면적이 좁아 손님을 별로 받을 수 없다는 단점을 감수하고 이 주둔지의 주민들에게 괴수 요리를 판매하는 공간으로 쓰고 있다.

“언니는요?”

“숲에 있어.”

식당 문을 열자마자 박다현이 쪼르르 다가왔다. 노인하고 내가 친해서인지, 딱히 잘해주지 않았는데도 과거 공포의 대상이었던 나를 이젠 꽤 잘 따른다.

“오빠보단 언니가 더 재미있는데.”

“재미없어서 미안하네. 그보다 ‘이면’에 괴수는 좀 남아 있어? 요새 재료를 좀 많이 쓴 거 같은데?”

“정답! 어제 오빠가 해치운 게 마지막 괴수.”

“그럼 또 몇 마리 잡아 와야겠네. 한성수 헌터!”

한성수를 부르자 냅다 내 앞까지 달려왔다. 뭔가 바삐 하고 있던 것 같았는데, 이렇게까지 빠릿빠릿하게 달려 나오니 미안한 기분이 든다. 편하게 대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이화의 오빠라는 이유만으로 저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왜 부르셨습니까?”

“그… 괴수 좀 잡으러 숲에 가자고. 지금 하던 일 있으면 그거 끝내고 가도 돼.”

“아닙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알겠어.”

잠시 기다리자 한성수는 얼마 전 주인장에게 새로 받은 너클을 양손에 낀 채 다시 나타났다.

“준비 끝났습니다.”

“그럼 출발하자.”

현재 식당 일을 돕고 있는 사람은 이 두 명. 난 두 사람과 함께 숲으로 길을 나섰다.

식당에서 판매하는 모든 메뉴의 재료는 괴수. 다행히 우리 주둔지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있는 ‘검은 숲’에선 괴수가 많이 출몰해 재료가 부족할 일은 없었다.

‘검은 숲’에 가까워지자 움막은 하나둘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이 근처에 사는 건 모두 괴수 사냥꾼. ‘축생계’ 주민 중 괴수를 사냥하는 헌터들이 여기서 지낸다. 이들의 성격을 아는지라 한성수는 물론 박다현마저도 긴장한 듯 말수가 확 적어졌다.

“형씨! 오늘은 식당 안 여나?”

아니나 다를까 지나가는 우리를 봤는지 한 주민이 움막에서 나왔다.

“아직 잘 시간 아닌가.”

낭패란 생각에 조용히 중얼거리며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주민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축생계’ 주민을 마주하게 되었다.

하의만을 걸친 주민의 우락부락한 상체는 갈색 털로 뒤덮여 있고 곳곳에 흉터가 나 있다. 보기 흉한데 가리지 않는 이유는 상처가 강함을 상징하기 때문이었던가? 그래서인지 머리 위로 자란 잘린 귀도 그는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우리가 빤히 쳐다보는 걸 눈치챘는지 그는 어울리지 않게 얼굴을 붉혔다.

예의가 아닌 걸 알지만, 그를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한 달이나 되었어도 곰이 우리를 바라보고 얼굴을 붉히는 건 익숙해질 리가 없다.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보면 부끄럽다니까.”

곰 수인은 그렇게 말하며 두꺼운 발톱이 자란 손으로 내 등을 툭툭 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