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전야 (2)]
“그나저나 식당 안 열 생각이면, 내 상대나 해주는 건 어때?”
곰 수인이 키 차이를 무시한 채 억지로 어깨동무한 탓에 헤드록 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불편한 건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본인 할 말만 이어갔다.
“지금껏 계속 바쁘다고 무시했잖아. 어때, 형씨? 여기서라도 좋으니까 한 판 붙어줄 거지?”
커다란 주먹으로 허공을 휘젓는 곰 수인은 잘도 웃으면서 싸우자는 이야기를 한다.
“하-”
이걸 예상했기에 이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우리 주둔지의 ‘축생계’ 주민 중 이 근처에 사는 괴수 사냥꾼들은 다른 수인들보다 호전적이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싸움을 통해야만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뭐, 그중 몇몇은 그냥 싸움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제가 대신 상대해드리겠습니다.”
“그쪽은 됐어. 난 이쪽 형씨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한성수가 끼어들어 나 대신 귀찮음을 떠안으려 했지만, 곰 수인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형씨도 나랑 싸울 기회를 남한테 뺏기고 싶진 않을 거잖아? 그렇지?”
이쯤 되니 지난번 시련 이후 보상이랍시고 주어진 ‘통역’이란 특성이 짜증 나기만 한다.
‘통역’이란 특성이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저쪽도, 내 쪽도 서로의 말을 하나도 이해 못 했을 텐데. 그랬더라면 지금처럼 귀찮은 일을 겪을 필요 없이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었을 거다.
“대체 어떻게 된 형씨이길래, 우리가 수십 년간 고전하고 있던 ‘베헤모스’를 혼자 쓰러뜨렸는지 이번에야말로 알아내야겠어!”
곰 수인이 말했듯 이런 상황이 된 건 얼마 전의 일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일정한 주기마다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간다는 ‘베헤모스’ 이야기를 들은 게 화근이었다.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베헤모스’란 괴수 이야기는 식당에서 식사하던 손님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곧 SSS급 괴수가 마을을 지나갈 때가 되었는데 그로 인해 피난을 가려는 사람들 때문에 고민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타지에서 거금을 주고 부른 거물급 괴수 사냥꾼 일당마저 토벌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든 생각은 내가 그 괴수를 쓰러뜨려야겠다는 거였다. 괴수를 먹고 ‘식탐’으로 강한 능력을 하나 얻는 동시에 퇴치한 보상으로 현상금까지 타낼 기회라고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때 마침 이화 일행은 원정을 나갔고 이나은은 나머지 일행과 함께 주인장의 심부름을 하러 간 참이라 홀로 그 괴수를 쓰러뜨리러 갔다.
‘베헤모스’는 매머드처럼 생겼는데 네 개의 상아로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분쇄하며 한 걸음씩 마을을 향해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 크기는 너무나 거대해 ‘베헤모스’가 한 발짝 내디디면 마치 산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더군다나 신체의 강도는 ‘레비아탄’ 못지않아서 어떠한 공격도 통하지 않는 듯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물론 그래 봤자 괴수는 괴수. 식사를 시작한 내 앞에선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홀로 괴수를 쓰러뜨리고 현상금 지급자에게 먹다 남은 시체를 꺼내 보이니 한순간에 소문이 퍼져 버렸다. 그 뒤로 2주나 지났는데도 나를 보는 괴수 사냥꾼마다 저 곰 수인처럼 싸우자며 다가오기 시작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그냥 운이 좋았다니까요.”
“형씨, 내가 아무리 멍청해도 그런 거에 속아 넘어갈 것 같아!”
역시 이런 말로는 안 넘어가 주나.
“이따 식당 문 열어야 해요. 시간 없으니까 비켜주세요.”
“에이- 형씨, 한판 붙는 게 얼마나 걸린다고.”
왜인지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끈질기게 달라붙는 것 같다. 보통 이쯤 되면 제풀에 꺾여 물러서곤 했는데.
그때 박다현이 외쳤다.
“여우 언니다!”
박다현이 가리킨 곳에는 언제 나왔는지 여우 수인이 꼬리로 상체를 감싼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곰 수인과 마찬가지로 우리와 안면을 트고 있는 그녀 역시 괴수 사냥꾼인 터라 이곳에 살고 있다. 세세히 따지면 정보상에 가깝긴 하지만, 괴수 사냥꾼을 겸직으로 삼고 있는 만큼 스탯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높다고 한다.
“여우 언니도 숲에 갈 거야? 그럼 우리랑 같이 가자. 저 오빠들은 너무 조용해서 재미없어.”
품에 안긴 박다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여우 수인은 우리에게 어떤 상황이 닥칠지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입맛을 다시는 걸 보니, 아마 우리가 한판 붙길 기대하는 듯하다.
“형씨, 구경꾼들도 하나둘 나오는데 멋없게 또 내뺄 거야?”
구경꾼이라곤 여우 수인 외엔 보이지 않지만, 곰 수인이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기에 따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지금 오래도록 시비를 걸고 있는 것도 여우 수인에게 잘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내가 거기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다.
“한성수 헌터, 지금이야. 뛰자.”
“네, 알겠습니다. 박다현 헌터는 제가 챙기겠습니다.”
여우 수인에 눈길이 팔려 헤드록이 느슨해진 사이, 곰 수인의 품에서 벗어나 숲 쪽으로 온 힘을 다해 달렸다.
“형씨! 형씨!”
내 뒤로는 애타게 나를 찾는 곰 수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질 뿐이었다.
‘검은 숲’은 이 부근의 나무가 다른 곳과 달리 유별나게 검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보기에도 거의 숯에 가까울 정도로 나무가 검었기에 ‘검은 숲’이란 이름을 들으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금부터 우리가 붙잡을 괴수는 ‘검은 숲’의 주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만티코어’.
‘만티코어’는 A급 괴수로 호랑이의 몸에 전갈의 꼬리, 인간의 얼굴을 합친 모습이다. 가죽은 비싸게 팔리고, 의외로 고기가 별미라 요새 자주 잡고 있다. 최근 식당에 오기 시작한 VIP 고객님께서도 ‘만티코어’ 꼬리 요리를 즐기고 계시기도 하고.
숲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니 귀를 찢는 듯한 피리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들은 한성수가 귀를 틀어막으며 말했다.
“울음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서식지에 도착한 거 같습니다.”
“평소 하던 것처럼 하자.”
내 손짓에 우리를 따라온 여우 수인과 곰 수인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두 분은 딱히 도와주시지 않아도 되는데….”
“형씨, 말을 그리 섭섭하게 하면 쓰나! 팍팍 도와줄게! 대신에 이따 우리 밥이나 한 끼 차려줘.”
“그러면 한성수 헌터랑 박다현 헌터 좀 도와주세요.”
두 수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넷은 각자 맡은 일을 하기 위해 움직였다.
메인은 박다현. 박다현이 ‘이면’에 최대한 많은 ‘만티코어’를 가둘 수 있도록 나머지 셋이 보조하기만 하면 된다.
저들이 ‘이면’에 ‘만티코어’를 가두는 동안 내가 할 일은 최근 현상금이 붙은 괴수를 잡는 것. 넷을 두고 좀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자 그 괴수를 마주할 수 있었다.
며칠 전 ‘검은 숲’에 들어간 괴수 사냥꾼 셋을 마을로 돌아오지 못하게 만든 저 괴수.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벌써 괴수 사냥꾼 셋을 죽인 탓에 현상금이 두둑하게 붙어 있다.
일반적인 ‘만티코어’보다 배로 크고 몸통엔 박쥐의 날개까지 달린 저 괴수는 고고하게 다른 ‘만티코어’ 시체를 뜯어먹고 있었다.
‘만티코어’와 닮은 저 괴수의 이름은 ‘게리온’. S급 괴수로 ‘만티코어’와는 격이 다른 괴수다.
‘궁중 식도’를 뽑아 들고 다가가자 ‘게리온’은 식사를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내가 본인과 싸울 생각인 걸 눈치챘는지 찢어진 입을 벌려 가느다란 비명을 질렀다.
“그럼 해볼까.”
굳이 ‘퀴네에’를 쓰지는 않았다. ‘퀴네에’로 모습을 감추고 괴수를 상대하는 건 치트키를 쓰는 거나 다름없다. 그래서야 전투에 익숙해질 수 없다.
강이란을 상대할 때처럼 내가 또 한 번 헌터와 싸울 기회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을 거듭하고서라도 다른 헌터를 쓰러뜨리기 위해선 내가 최소한 평범한 인간 수준 이상으로 몸을 쓸 수 있다는 게 전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최근 괴수랑 싸울 때는 ‘퀴네에’를 사용하지 않고 전투에 임하고 있다.
“식도랑 방패만으로도 괜찮으려나?”
[‘빛나는 눈의 전략가’님이 ‘방패만’이라고 한 데에 실망합니다.]
“어유, 제가 무슨 말실수를. 이것도 사기템이라면 사기템이니까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왼손에 든 신기를 바라보며 감사 인사를 드린 뒤, 곧장 ‘게리온’을 향해 달려들었다.
‘만티코어’와는 종종 싸워봤기에 무엇을 제일 조심해야 할지는 알고 있다. 적을 공격할 때 주로 사용하는 저 전갈 꼬리. 저것을 주의하며 등에 식도를 꽂아 넣으면 쓰러뜨리는 건 어렵지 않다.
***
꼬리만 주의하며 등에 식도를 꽂아 넣으면 쓰러뜨리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제길.”
시원하게 달려든 대가로 날아오른 ‘게리온’의 꼬리에 찔려 즉사. 죽음 한 번 안 겪고 ‘게리온’을 쓰러뜨리지 못할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허무하게 리타이어할 줄이야.
「처음 보는 적에게 아무 대책 없이 덤벼든 그 용기는 칭찬해주겠네.」
「용기 있는 게 아니라 단순히 겁이 없는 건가? 그건 아니길 바라네.」
「그보다 여긴 자네 집도 아닌데 요새 너무 자주 들락거리는 거 아닌가?」
저 초월자가 불평하는 대로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죽음의 경계’에 들락거리고 있긴 하다.
「본인의 죽음을 그렇게 소모적으로 이용하는 건 좋지 않을 텐데?」
“소모적이라니? 아니지. 모든 특성 0이라는 개 같은 제약 안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거 잘 알잖아. 경험이라도 쌓아서 다음 시련에서 쓸만한 카드를 만들어두려면 어쩔 수 없어.”
「자네가 점점 죽음을 꺼리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하는 말이었네.」
꺼리지 않는다?
그럴 리 없다.
죽을 때마다 겪는 그 두려움, 고통은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단순히 죽음을 통해 경험을 익히는 것 외에 내가 강해질 다른 방법이 없기에 이 방식을 택한 것뿐. 다른 방식으로 강해질 수 있다면 거리낌 없이 그것을 택했을 거다.
「자네와 전속 계약 맺은 친구가 죽음을 반복한다는 걸 알면 분명 꺼릴 거라네.」
“그 초월자가 내 ‘CONTINUE?’ 특성에 관해 따로 알 방법이 없다며.”
「그냥 그렇다는 거네.」
“역시 그쪽하고 전속 계약을 맺었어야 했나.”
「이 몸이 전에 말하지 않았나?」
「이 몸은 이곳에 묶인 신세. 여기서 벗어나기 전까진 자네와 전속 계약 맺을 방법이 없다네.」
“그걸 처음 만났을 때 말해주길 바라긴 했지. 어쨌든 잡담은 여기까지. 요새 너무 자주 봐서 이제 할 말도 더 없다.”
「돌려보내달라는 거군.」
「언제나 그렇지만, 이번 괴수를 상대하는 동안 몇 번이나 ‘죽음의 경계’를 방문할지 기대하고 있겠네.」
[CONTINUE?]
[최근 저장 지점으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