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전야 (3)]
기대한다는 말에 저주라도 걸어둔 것일까? 그 뒤로 난 일곱 번 정도 ‘죽음의 경계’를 들락거려야 했다.
죽음을 여덟 번 겪고 나서야 ‘게리온’은 힘을 잃은 채 꼬리를 늘어뜨렸다.
“생각만큼 쉬운 상대는 아니었네.”
‘게리온’과의 전투를 복기해보면, 합은 단순했다. 꼬리로 공격하는 걸 방패로 막다가 지상에 내려온 틈에 몸에 올라타 날개 하나를 절단. 세로축으로 거리를 벌리지 못하게 만든 이후부턴 ‘만티코어’를 상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방패로 손톱과 꼬리 공격을 막다가 기회를 봐서 식도 꽂아 넣기를 반복. 그 과정을 거쳐 ‘게리온’을 퇴치할 수 있었다.
다만, 날개를 절단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있었다. 날개를 자르려다가 죽음을 다섯 번 반복했을 땐, 하마터면 살점을 물어뜯는다는 필승법을 쓸 뻔했다.
전투력을 키운다는 명목하에 필승법은 ‘베헤모스’나 ‘레비아탄’과 같이 도저히 전투로 쓰러뜨릴 수 없는 괴수를 만났을 때만 쓰기로 정했다. 만약 유혹에 넘어가 필승법을 썼다면 스스로 세운 목표를 깨는 셈. 결과적으로 그런 일 없이 ‘게리온’을 해치웠으니 나 자신을 칭찬하는 의미에서 오늘은 이만 괴수와의 전투를 끝내도 될 것 같다.
“참, ‘독 내성’ 특성을 준 ‘히드라’한테 감사해야겠네. 그 특성이 없었더라면 이미 내 몸은 녹았을 테니깐.”
주변에 흩뿌려진 ‘게리온’의 보랏빛 혈액을 보니 ‘히드라’에게 감사 인사를 안 할 수 없었다. ‘만티코어’의 혈액보다 독성이 훨씬 강한 모양인지 혈액에 닿은 지표면이나 나무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녹아내리고 있다. 만약 내게 ‘독 내성’ 특성이 없었더라면 어떤 끔찍한 일을 겪었을지는 쉬이 짐작이 갔다.
“그럼 가볼까?”
‘게리온’을 상대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을 오래 지체했다. 다른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게리온’의 시체를 ‘특급 냉장고’에 넣었다.
“‘게리온’으로는 뭘 요리해보지?”
‘게리온’만큼은 현상금을 받은 뒤, 반드시 요리해서 먹을 생각이다. 그래야만 미식 수치가 절반 이상 채워진다.
미식 수치 달성 보상으로 주어지는 ‘미식가’ 특성이 정확히 어떤 효과를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시련 이전에 얻어두기 위해선 한시 빨리 여러 괴수를 요리해 먹을 필요가 있다.
“끝나셨습니까?”
“오빠, 하도 기다려도 안 와서 우리가 직접 행차했어.”
“행차란 단어는 그럴 때 쓰는 게 아니야.”
꼬투리를 잡으며 돌아보니 아까 헤어진 일행들이 상처 없이 말끔한 상태로 서 있었다.
“형씨, ‘만티코어’는 넉넉하게 열 마리 정도 잡아 넣어뒀어.”
“그 정도면 일주일은 거뜬히 버티겠네.”
“우리 둘이 도와줬다는 사실 절대 잊지 말라고.”
“네네. 장부에 달아둘 테니 이따가 가게 돌아가면 뭐 먹을지 생각하고 계세요.”
건성으로 대답하는데 묘하게 거슬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 소리라기엔 조금 크다.
“잠시, 다들 조용히 해주세요.”
나름 강한 어조로 말한 탓인지 모두 입을 다물었고, 곧 그 소리가 어느 방향에서 들려오는지 알 수 있었다.
북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이쪽을 향하는 중이었다.
바스락거리며 풀을 밟으며 이동하는 소리. ‘만티코어’의 발소리라기엔 특유의 기이한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고, 그 외 다른 괴수의 발소리라기에도 움직임이 너무나 조심스럽다.
“혹시 이 근방에 ‘만티코어’ 외에 다른 괴수가 있나요?”
물음에 여우 수인은 고개를 저었다. 눈빛을 보니 그녀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한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저희 말고 ‘검은 숲’에 들어온 괴수 사냥꾼은요?”
이번 물음에도 그녀는 잠자코 고개만을 저었다. 그제야 곰 수인도 무슨 사태인지 짐작한 듯 등에 멘 거대한 도끼를 장비했다.
“요컨대 형씨 말은 다른 구역의 괴수 사냥꾼이 기어들어 왔다는 거지?”
“인간인지 수인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인간계’와 ‘축생계’가 합쳐진 이후 상당히 많은 구역에서 인간과 수인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만약 저들이 인간과 수인이 섞일 수 없다는 쪽에 선동하는 인물이라면 우리 일행을 좋게 볼 리는 없었다.
모두가 그를 알고 있기에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무기를 겨눈 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는데, 곰 수인이 말했다.
“다른 구역에서 우리 구역을 공격하기 위해 미리 정찰 나온 거 아니야? 저쪽은 우리를 발견 못 했을 테니, 우리가 먼저 치자.”
“‘만티코어’들이 그 난리를 쳤는데, 저희가 이 근처 어딘가에 있다는 걸 저쪽이 모른다고요? 저희 위치가 발각되었으니까 여기로 똑바로 걸어오고 있겠죠.”
“정현 씨 말이 맞아. 소리는 정확히 여기로 향하고 있어.”
여우 수인 앞에서 대놓고 본인을 반박한 데에 불만인 듯 보였으나, 그녀가 내 말에 맞장구쳐준 만큼 곰 수인 역시 입을 다문 채 도끼를 잡은 손에 힘을 더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야. 가만히 있다간 저쪽이 우위를 점하게 하는 셈인걸?”
여우 수인의 말대로다. 상대측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이대로 기다리고 있어선 안 된다.
“박다현 헌터, 지금 당장 우리 전부 ‘이면’으로 옮겨줘. 남은 공간 있지?”
“으응? 꼭 해야 해?”
“괴수가 갇혀 있지 않은 공간 없어?”
“그런 건 아니야. 딱 한 군데 남아 있는데, 내 프라이빗한 공간으로 쓰려고 했어.”
“그 단어는 또 어디서 배운 거야. 그러면…. 이화 돌아오면 한 시간 동안 놀아달라 할게.”
“으- 너무해. 그럼 어쩔 수 없네.”
이화에게는 미안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와중 박다현이 거울 조각을 들어 올렸다.
“바로 이동할게.”
곧 거울 조각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검은 숲’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면’으로 넘어온 거다.
“뭐야? 형씨, 여긴 어디야? 세상이 꿈틀거리잖아!”
“‘이면’이에요.”
“‘이면’? 말로만 듣던 ‘이면’이 이런 곳이었어? 그보다 여기 괴수들 잡아두는 곳 아녔어? 우리가 여긴 왜 온 거야?”
“여기 숨어 있다가 저쪽이 이 근처로 오면 기습해서 덮칠 거거든요. 박다현 헌터, 한성수 헌터랑 ‘이면’ 밖에 있다가 누구 보이면 베어허그 아저씨부터 바로 내보내 줘. 한성수 헌터는 혹시 모르니까 박다현 헌터 곁에서 잘 지켜줘.”
“네. 맡기신 대로 하겠습니다.”
“형씨! 베어허그라고 부르지 좀 말라니깐! 형씨는 형씨를 인간이라 부르면 좋아? 이름으로 부르라고, 이름으로.”
“이름으로 부르려면 그쪽하고 직접 겨뤄야 한다면서요.”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동안, 박다현은 한성수를 데리고 ‘이면’ 밖으로 나섰다. 시끄럽게 옆에서 쫑알대던 곰 수인이 모습을 감춘 것은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잠시 후 나와 여우 수인 역시 ‘이면’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한성수와 곰 수인이 무기를 땅에 내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반대편에는 처음 보는 두 수인이 있었다.
검은 털이 온몸을 덮어 얼굴까지 가린 터라 생김새는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들이 늑대 수인이란 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형씨들 ‘검은 숲’에 따로 볼 일이 있어서 온 거고, 딱히 우리랑 싸울 생각은 없대.”
곰 수인은 늑대 수인의 말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속에 무슨 의도를 품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저들의 말을 믿고 경계심을 푼 게 어이가 없었다.
난 곰 수인처럼 저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줄 생각이 없었기에 진위를 밝혀내기 위해 늑대 수인을 바라보며 고갯짓했다.
“베어허그 아저씨 말이 맞나요?”
“맞다. 워울프는 지금 ‘검은 숲’에 볼일이 있다.”
“워울프?”
고개를 갸웃하자, 여우 수인이 설명을 덧붙였다.
“정현 씨는 저들을 한 번도 본 적 없으니 잘 모르겠구나. 정현 씨가 인간이고, 아틀라스 씨가 베어허그고, 내가 미호인 거랑 같아. 워울프는 저들 종족을 일컫는 말이야.”
“하기야 늑대 수인에게도 종족 본연의 명칭이 있는 건 당연하겠네요.”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뒤, 다소 강압적인 태도로 물었다.
“볼일이라면 무엇이지? 애초에 어디서 온 거야?”
내 물음에 두 워울프는 서로의 얼굴만을 마주 볼 뿐이었다.
“형씨, 워울프가 따로 모여 지내는 구역은 없어. 그냥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게 숙명인 형씨들이야. 대다수 형씨가 괴수를 잡고 현상금을 받으면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녀.”
우위를 점하려다 무지를 드러내고 말았다. 실수를 인지하며 이번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볼 일은?”
“근처에서 캠비온 보지 못했나? 이 근처에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혹시 그대의 거처에서 지내는 중인가?”
여우 수인이 고개를 젓자, 키 큰 쪽의 워울프가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한 정보라 했다.”
“어떤 정보상에게 얻은 정보인지는 모르겠지만, 사기당했나 보네요.”
“일부러 이 멀리까지 왔는데, 시간 낭비였나.”
“형씨들, 근데 캠비온은 왜 찾는 거야? 태어나서 한 번도 못 본 종족인데, 진짜 존재하기는 한 거야?”
“캠비온은 실재한다. 무엇보다 인간 중 이상한 종교를 설파하는 자들이 캠비온 생포에 거액의 현상금을 건 상태다. 일족의 부흥을 위해선 반드시 캠비온을 생포해야 한다.”
“뭐, 형씨들도 형씨들의 사정이 있는 거니까. 그래도 허황한 걸 쫓다가 너무 진 빼진 말고.”
“혹시 캠비온에 관한 정보를 얻게 된다면 렉스의 영지에서 우리를 찾아라. 보상은 두둑이 해주겠다.”
그 말을 끝으로 워울프 둘은 다시 숲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둘이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궁금했던 것을 물어볼 수 있었다.
“캠비온이란 종족은 또 뭐야?”
“형씨들의 표현을 빌린다면 박쥐 수인이라고 해야 하나? 형씨들, 들어본 적 없어? ‘녹스’가 추방된 건 엄청난 화제였는데.”
‘녹스’? 설마 ‘캠비온 녹스’? 어쩐지 입에 잘 달라붙는다 싶었다. 그나저나 곰 수인의 말에 이상한 표현이 섞여 있다.
“추방?”
“형씨들, 우리 세계에 관해서 너무 관심 없는 거 아냐? 시련을 진행하는 메인 MC가 ‘녹스’에서 ‘멀린’ 님으로 바뀐 후의 일이야. ‘녹스’가 ‘축생계’ 어딘가로 추방당했다는 글씨가 모두에게 새겨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