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전야 (4)]
이상한 종교단체. ‘캠비온 녹스’의 추방 등등. 듣고 넘길 수 없는 이야기가 여럿 나왔으나 자세한 내용을 캐물을 시간은 없었다.
“재료 손질해야 하니까, 일단 돌아가죠.”
워울프와의 갑작스러운 만남 탓에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지금 돌아간다 쳐도 식당 오픈 시간까지 음식을 준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필이면 VIP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는 날이라 시간이 너무 아슬아슬하다.
“베어허그 아저씨랑 서 헌터는 바로 식당으로 와 주세요. 물어볼 게 있거든요.”
“형씨! 왜 나만 베어허그 아저씨인데!”
항의하는 곰 수인 옆, 여우 수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정현 씨. 정보상의 시간을 뺏는 건 값이 많이 드는데. 알지?”
친분이 있다지만, 여우 수인이 지인이라고 정보료를 깎아준 적은 없다. 그녀에게 어떤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값을 지급할 각오를 해야 한다.
이 근방 괴수들의 정보나 ‘축생계’에 엮인 여러 비밀스러운 정보를 알아내는 데에 이미 꽤 많은 지출을 한 터라 당분간은 이용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을 것 같다.
“알고 있어요. 그래도 부탁드릴게요.”
“부탁이라니? 귀중한 손님께 시간 내드리는 건 당연하지. 집에 들렀다가 천천히 갈 테니 음식은 늘 먹던 거로 부탁해. 어차피 일찍 가봤자 정현 씨 관심은 못 받잖아?”
VIP에 관해선 이미 알고 있었나.
“형씨, 나도 늘 먹던 메뉴로 부탁할게.”
두 수인은 그렇게 말하곤 앞장서 마을로 돌아갔다. 여우 수인이 VIP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캐묻고 싶었으나 시간을 더 낭비할 수 없었던 터라 그들의 뒤를 따라 식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
VIP가 제일 좋아하는 요리는 ‘만티코어 꼬리 볶음’이다. 매번 올 때마다 그 요리만을 고집해 따로 주문받지 않아도 알아서 음식을 준비해드리고 있다.
“이제 올 때가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시간이 되자 식당 문을 열고 로브를 쓴 두 수인이 들어왔다.
“제가 도와드릴 게 있습니까?”
“딱히. 오늘은 ‘검은 숲’에서 고생했으니까 박다현 헌터 데리고 안에 들어가서 쉬어.”
“알겠습니다.”
“절대. 밖으로. 나오게. 하면. 안 돼.”
VIP를 보고 눈을 반짝이는 박다현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경고하자 한성수는 본인만 믿으라며 호언장담했다. 그러곤 박다현을 들어 올리더니 식당에 딸린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박다현이 발버둥 치며 저항했으나, 당연하게도 한성수의 힘을 이겨낼 리 없었다.
“방해꾼도 없어졌으니, 이제 요리에 집중해볼까?”
소매를 걷어붙인 뒤, 화력을 키웠다. ‘만티코어’ 꼬리에 그을음이 생길 때까지 익힌 후, 미리 썰어둔 다른 채소를 넣어 함께 볶기 시작했다.
‘레시피’를 이용하면 이런 번거로운 과정 없이 요리를 완성할 수 있었으나, VIP에게 대접하는 음식이다. 그에게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선 요리하는 과정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냄새가 좋군.”
보랏빛 연기를 걷으며 목소리가 들린 쪽을 보니 VIP가 입맛을 다시며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완성됩니다.”
곧 열기를 못 이긴 ‘만티코어’ 꼬리 껍질이 살짝 벌어졌다. 껍질이 벌어지면 속살이 다 익었다는 뜻. 이제 향신료만 뿌리면 요리가 완성된다.
“여기 있습니다.”
완성된 요리를 VIP 앞에 가져가자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매주 이곳에서 식사하는 이유가 이 음식 때문이라네. 다른 곳에선 찾아볼 수 없거든. 그러고 보니 자네는 ‘독 내성’ 특성이 없어 이 별미를 즐기지 못하겠군.”
VIP는 동행자의 대꾸도 듣지 않은 채 곧장 젓가락을 들었다. 식당에 다른 손님이 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 난 차분히 그가 식사를 마치기만을 기다렸다.
[플레이어 ‘렉스’가 ‘만티코어 꼬리 볶음’을 먹어 신체의 강도 스탯이 영구적으로 5 상승합니다.]
“오늘도 잘 먹었네. 대금은 이 친구에게 받게나.”
VIP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행자가 비늘이 잔뜩 달린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는 ‘만티코어 꼬리 볶음’에 매긴 값어치보다 좀 더 많은 금덩어리가 있었다. 고개를 숙이며 그를 받으니 VIP는 반대편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명했다.
그에 식당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동행자가 입을 열었다.
“곧 다른 손님들이 올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오히려 이 몸이 자네에게 물어보고 싶네. 자네는 따로 식사하지 않아도 괜찮겠는가? 아직 저녁을 먹지 않은 것으로 아네만.”
“전 괜찮습니다.”
“아니, 이 몸의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러네. 주방장, 이 친구가 먹을 만한 건 뭐 없나? 값은 제대로 치르겠네.”
“좋아하는 거라도 말해주신다면, 그에 맞춰드릴게요.”
“정 그렇다면, 전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아무거나’라. 제일 어려운 주문을 받고 말았다.
“잠시만요.”
주방으로 향하며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마침 찬장에 올려져 있던 ‘불개’의 고깃덩어리가 보였다.
“어차피 베어허그 아저씨 때문에 요리해야 했으니.”
[‘불고기’의 메인 재료 ‘불개’와 접촉하였습니다.]
[‘불고기’ 레시피의 조건을 만족하였습니다.]
[‘평범한 요리’ 등급에 따라 50% 확률로 조리가 시작됩니다.]
[‘탐욕의 수행자’ 특성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확률을 조작합니다.]
[확률 조작 성공! 100% 확률로 조리가 시작됩니다.]
[‘불고기’ 조리를 시작합니다.]
VIP와 달리 별다른 노력을 기울일 필요는 없던 터라 ‘레시피’를 이용해 서둘러 요리를 만들고 동행자에게 건네주었다.
허기진 참이었는지 딱히 식사할 생각 없다던 동행자는 음식을 보자마자 허겁지겁 입속으로 털어 넣기 시작했다.
“이 친구 음식값은 금 대신 이걸로 치르러 하는데 괜찮겠는가?”
VIP의 양손에 들린 건 맥주잔이다.
“저야 좋죠.”
어차피 VIP 심기를 거스를 수도 없을뿐더러 술을 마실 기회는 좀처럼 없는 터라 기꺼이 술잔을 받았다. VIP는 오늘을 위해 미리 준비했는지 고급스러운 병에 담긴 술을 따라 주었다.
“자네와 이 몸을 만나게 해준 운명에 건배하지.”
푸른빛 액체. 무엇으로 만든 건진 모르겠지만, 독은 아니겠지. 독이라 해도 ‘독 내성’ 특성이 있으니 상관없긴 하지만.
내가 마시기만을 기다리는 눈치라 잔을 부딪친 후 액체를 한 입 들이켰다.
비슷한 맛을 찾자면 포도주? 하지만 약간 더 시큼한 맛이 난다.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재료로 만들어진 술 같다.
“다른 주민에게 우리의 모습을 보일 순 없으니, 자네에게 들려줄 이야기만 간략하게 하겠네. 요 며칠 동안 자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마음에 입이 근질거렸단 말이지.”
흥미가 동해 의자를 끌어당겨 VIP 쪽으로 귀를 가까이했다.
“어떤 건데요?”
“최근 이 몸이 다스리는 영지의 여관에 워울프가 몰렸다네.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일이 벌어졌으니 이상하게 여기는 게 당연하지 않나?”
하기야 아까 만난 두 워울프도 렉스의 영지로 오면 본인들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이 친구에게 그들이 어떠한 목적으로 이 몸의 영지에 모이는지 알아내게 했다네. 그랬더니, 그들이 캠비온을 찾고 있다는 게 아닌가!”
VIP는 온몸의 비늘을 꼿꼿이 세우며 웃더니 뒤늦게라도 체면을 차리려는 건지 헛기침을 하곤 말을 이었다.
“그들 주장으로는 캠비온이 모여 사는 마을이 이곳과 이 몸의 영지 사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데. 그 말이 떠오르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네. 어찌 되었든 이건 서론에 불과하고, 자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이다음이라네.”
VIP는 잔에 담긴 술을 한 번에 들이켜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본 적 없는 캠비온이란 종족의 실재 여부는 둘째 치고, 그들에게 정보를 준 집단이 특이하더군.”
“종교단체라고 들었어요.”
“오호라, 역시 자네도 대충은 알고 있었군. 그러면 그것도 아나? 그 종교단체가 아주 특이한 신을 믿고 있거든.”
“특이한 신이라 하면?”
“바퀴벌레 신.”
“네?”
“자네가 관심 있을 것 같아서 꼭 말해주고 싶었네. 오늘도 맛있는 요리 감사하네. 다음 주 이 시간에 또 보지.”
말을 마친 VIP는 동행인과 함께 식당 밖으로 나섰다. 본래 같으면 바깥까지 배웅해드려야 했으나, 당혹감에 발이 묶였다.
바퀴벌레 신이라니.
내가 아는 한 그 신을 믿는 종교단체는 딱 한 군데다.
회사 소속의 사이비 종교집단.
즉, ‘캠비온’을 찾고 있는 건 회사란 뜻.
“대체 왜?”
뜬금없이 알게 된 그들의 알 수 없는 행적에 의문을 표할 때, 곰 수인이 다른 수인 셋을 데리고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곰 수인은 본인의 일행과 함께 테이블 하나를 차지한 채 나를 불렀다.
“형씨, 오늘도 맛나게 부탁할게. 여기 셋은 각자 돈 낼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랑 똑같은 메뉴로 줘.”
멍하게 서 있다가 물어봐야 할 것이 있다는 게 떠오른 난 아까 만든 ‘불고기’를 접시에 덜어 그들 앞에 가져갔다. 접시를 놓으며 들으니 그들은 최근 도는 소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서쪽에 새로운 괴물이 나타났다는 이야기 들었어?”
“S급으로 이루어진 괴수 사냥꾼 무리를 궤멸했다던 괴물 말인가? 그거 ‘베헤모스’가 한 짓인지 알았는데, 아니었나?”
“그게 말이지. 최근에 조사를 위해 서쪽에 S급 괴수 사냥꾼 둘이 추가로 파견됐었는데, 하나만 겨우 돌아와서 한 말이 괴물이 실은 괴수가 아니라는 거야.”
“괴수가 아니라고? 에이, 이 형씨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괴수가 아니면 대체 괴물의 정체가 뭔데?”
“그것까진 나도 모르지. 어디 한 번 우리끼리 확인해보러 가보는 건 어때? 정체를 밝혀내기만 한다면 많은 금을 쥘 수 있을 거야.”
“목숨 귀한 줄 모르는 형씨일세. 현상금도 안 걸린 괴물 잡으러 가서 뭐 하려고?”
일행의 말에 어이없어하던 곰 수인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는 형씨들끼리 하고 있어. 난 이 형씨랑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일행끼리만 놓아두고 곰 수인은 자신의 접시를 갖고 주방에 붙은 바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형씨,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건 뭐야?”
“시련의 MC였다는 사실 말고 ‘캠비온 녹스’에 관해 따로 들은 게 있으세요?”
“‘캠비온 녹스’에 관한 이야기라….”
곰 수인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한 가지 소문이 떠올랐다며 그에 관해 알려주었다.
“‘녹스’가 추방된 이후에 퍼진 소문이 하나 있었거든. ‘녹스’처럼 초월자님들의 눈에 띄면 그분들이 지내는 곳에서 살 수 있다는 거였나? 대충 그런 소문이었어.”
“하기야 ‘캠비온 녹스’가 ‘축생계’로 추방되었다면, 반대로 누군가 초월자님들이 지내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니까요.”
“그렇지. 그런데 ‘녹스’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으니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를 노릇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