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전야 (5)]
“그걸 밝혀내려고 회사가 ‘캠비온’을 추적하던 거였나.”
곰 수인의 말을 듣고 나니 회사가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러면 ‘캠비온’의 마을이 이 근방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이야기는요? 혹시 들어본 적 있어요?”
“형씨, 그거야 애들이나 믿는 옛이야기지.”
옛이야기? 그런 이야기가 있긴 있다는 건가?
“자세한 내용 들려주실 수 있나요?”
“왜? 나중에 형씨네 말썽꾸러기가 말 안 들을 때 들려주려고?”
말썽꾸러기라면 박다현을 말하는 건가? 고작 옛이야기 듣고 잠잠해지진 않을 것 같긴 하지만, 곰 수인이 저렇게 오해하고 있도록 놓아둬도 별문제는 없을 것 같다.
“그런 셈이죠.”
“안타깝게 됐네. 세세한 내용까지는 기억 안 나거든. 나쁜 짓 많이 하면 ‘캠비온’이 와서 잡아간다는 둥. 그런 이야기였는데…. 형씨네는 어렸을 때 이 이야기 못 들어봤어?”
“들어봤을 리가 없잖아요. 애초에 ‘캠비온’이란 종족 자체가 존재하지 않던 곳이었는데.”
“하기야 그렇겠네. 어쨌든 내가 기억하는 건 이게 다야. 나쁜 짓 하면 근처에 있는 숨겨진 마을에서 ‘캠비온’이 나와서 잡아간다. 끝. 도움 좀 됐나?”
근처에 있는 숨겨진 마을이라.
‘캠비온’을 잡는다던 워울프가 이 주변을 배회하고, 렉스 영주까지 그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걸 보면 분명 헛소리만은 아닐 거다.
회사도 그렇게 생각해서 워울프를 고용해 움직이고 있는 거겠지.
더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려면 여우 수인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다.
“감사합니다. 도움 됐어요.”
“그래? 잠깐! 형씨, 겨우 이거 물어보려던 거야? 형씨한테 엄청나게 큰 도움을 줘서 다음에 한판 붙자 하려 했는데, 이러면 계획대로 안 되잖아!”
“안타깝게 됐네요.”
“우리 일을 남 일처럼 이야기하지 말라고!”
“저한텐 남 일 맞아요.”
대충 대꾸해준 뒤, 여우 수인에게 대접할 요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곰 수인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불고기’를 입에 꾸역꾸역 집어넣다가 내가 관심을 주지 않자 일행에게로 돌아가 버렸다. 기분 상한 게 분명하다. 자고 일어나면 왜 기분 상했는지도 까먹겠지만, 좋은 인상을 유지하려면 성의는 보이는 게 맞는 것 같다.
“내일 꿀단지라도 보내드려야겠네.”
선물을 보내야겠다고 다짐하며 채소 손질을 끝냈다. 샐러드에 드레싱을 뿌릴 때쯤 여우 수인이 식당에 도착했다. 그녀는 곰 수인의 인사는 무시한 채 곧장 내 앞에 자리 잡았다.
완성된 샐러드를 가져다주자, 그녀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아틀라스 씨는 왜 저리 뚱한 표정이야?”
“그야 서 헌터가 인사를 무시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난 아틀라스 씨가 내 인사 무시해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은데? 물론 할 생각도 없지만.”
이러면서 자주 어울려 다니니 참 알 수 없는 관계다.
“아틀라스 씨한텐 궁금한 거 다 물어봤나 보네?”
“네. 이제 서 헌터한테 물어볼 차례에요.”
“그래서 정현 씨가 내게 듣고 싶은 건?”
“‘캠비온’ 마을에 관한 거예요.”
“흠, 아틀라스 씨한테 못 들었어?”
“어린애들한테 들려주는 옛이야기는 들었죠. 그런데 제가 알고 싶은 건, 이야기가 아니라 마을의 정확한 위치예요.”
일부로 말끝을 강조했으나, 여우 수인은 표정 변화 없이 눈썹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정현 씨, 고작 옛이야기를 진지하게 믿는 타입?”
“워울프를 고용한 측에서 ‘캠비온’의 마을이 이 근처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상, 의심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고용한 측이라면 종교단체? 거기가 이상한 거겠지. 내가 오랜 시간 정보상으로 이 마을에서 활동했는데, 여태껏 ‘캠비온’의 마을에 들어갔다는 수인은 만나본 적 없어. 이 근처에서 ‘캠비온’을 봤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없고.”
“마냥 이상하다고만 보긴 뭐해서요.”
“정현 씨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종교단체 배후에 있는 회사가 ‘캠비온’을 찾는 이유는 금방 유추할 수 있다. 그들은 현재 ‘캠비온 녹스’를 찾고 있는 거다.
‘축생계’로 추방당한 ‘캠비온 녹스’가 여태껏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가 있을 만한 곳은 한 군데. 지금까지 다른 종족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캠비온’의 마을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캠비온’을 잡으면 ‘캠비온’의 마을에 들어갈 수 있다.
‘캠비온’의 마을에 들어가면 ‘캠비온 녹스’와 만날 수 있다.
이러한 판단하에 워울프를 시켜 ‘캠비온’을 찾는 중인 것 같다.
여기까지 설명했을 때, 여우 수인이 말을 끊었다.
“종교단체. 아니, 회사에서 ‘캠비온’을 찾는 이유는 ‘캠비온 녹스’를 찾기 위함이란 말이지? 그런데 그게 내가 물은 것에 관한 답은 되지 못한 것 같은데? 난 정현 씨가 왜 이 근처에 ‘캠비온’의 마을이 있다는 그들의 말을 신용하는지를 물었어.”
“아무 의미 없는 짓을 위해 세력을 파견할 놈들이 아니거든요.”
서울에 있는 모든 시설을 버리고 춘천으로 도망친 회사가 다시 이곳에 본인들의 세력을 보냈다는 건, 그만큼 ‘캠비온’을 붙잡는 게 중요하단 의미다.
“그러니 ‘캠비온’을 잡기 위해 여러 정보를 모았을 테고. 그중 이 근처에 ‘캠비온’의 마을이 있다는 정보도 있었을 거예요. 물론 옛이야기는 아니겠죠. 그런 걸 믿고 움직일 정도로 멍청하진 않거든요.”
내가 생각한 이유를 차분히 설명하니 여우 수인은 먹는 걸 멈추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정현 씨는 회사란 집단을 높게 평가하나 봐.”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주의하는 거죠. 여러 일이 있었거든요.”
“결론은 그 집단이 어딘가에서 ‘캠비온’의 마을이 이 근처에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는 거지?”
“네. ‘인간계’와 ‘축생계’가 합쳐진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회사가 정보를 얻었다면, 서 헌터는 이미 그 정보를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거든요.”
“정현 씨한테 높게 평가받고 있었구나.”
“제 말 틀렸나요?”
“생각보다 비쌀 텐데, 괜찮겠어?”
미리 준비해둔 금덩어리 여러 개를 여우 수인 앞에 올려뒀다. 그를 대답으로 받아들였는지,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정보상은 가업으로 잇는 중이야. 그래서 선대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여럿 있지. 그중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캠비온’ 마을에 관한 전설도 있어.”
‘4와 2가 싸움을 준비하네.’
‘4에게 본인이 4라 말하고.’
‘2에게 본인이 2라 말하니.’
‘4와 2가 화해한 후, 그가 있을 자리는 없었네.’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그는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었네.’
“전설은 여기까지.”
“이게 ‘캠비온’ 마을에 관한 전설이라고요?”
“난 그렇게 전해 들었어. 해석은 정현 씨 몫이야. 부끄럽지만, 난 해석에 실패했거든.”
아무래도 나 홀로 시를 해석하기는 힘들 것 같다. 차후 이나은 일행이 돌아오면 함께 머리를 맞대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금은 받을 수 없어.”
“네? 아깐 생각보다 비쌀 거라고.”
“그거야 농이지. 정현 씨, 너무 진지하기만 하면 다현이가 싫어할 거야.”
의외의 면에 놀라며 내주었던 금덩어리를 챙기는데, 여우 수인이 꼬리로 내 팔목을 붙잡았다.
“단, 가문에서 오랜 시간 간직해온 전설을 이대로 넘겨줄 순 없지. 정현 씨도 내 부탁 하나 들어줘야겠어.”
“부탁이라면?”
“‘캠비온’ 마을에 관한 전설은 우리 가문에서 대대로 간직해온 이야기야. 대체 어떤 경로를 통해 종교단체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알아내야겠어. 이건 정보상으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거든.”
하기야 정보상의 입장에선 중요한 문제이긴 하다.
“알겠어요. 제가 한번 조사해볼게요.”
“우리 마을에서 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다 보면 버려진 성이 하나 있거든. 거기 숨어 지내며 일하는 ‘렙틸리언’ 정보상이 있는데, 그자를 조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예로부터 내 정보들을 탐냈거든. 지금 당장에 수상한 건 그자뿐이네.”
강을 건너서 남쪽으로 가라는 건. 동작구까지 가야 한다는 건가.
이곳을 떠나 동작구에 다녀오기 위해선 시간이 오래 걸릴뿐더러, 인간을 모조리 학살한 수인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곳이라 위험하기도 하다. 필요에 따라선 우선순위를 뒤로 미뤄야만 할 것 같다.
***
여우 수인에게 정보를 얻은 뒤로는 다른 손님들을 봤다. 여섯 팀 정도를 받은 후에야 식당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
“영업 끝났나요?”
“오늘은 여기까지예요. 죄송해요.”
마감 시간이 한참 지나고서야 들어온 손님이 대체 누군지 어이가 없어 돌아보니, 이나은이 서 있었다.
“너무 정 없는 거 아니에요?”
그녀는 여태 남아 음료를 마시고 있던 여우 수인 옆에 자리 잡았다.
“사흘 만에 돌아온 건가?”
“벌써 그렇게나 됐어요? 어쩐지 배 엄청 고프더라.”
“다른 사람들은?”
“곧 올 거예요. 주인장 아주머니부터 보고 온다더라고요.”
“너한테 안부 전해달라고 했었는데, 얼굴 좀 비춰.”
“갔다가 또 무리한 요구 받을 것 같아서요.”
이나은은 질색이라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지난번 주인장과 만났을 때, 와이번류 괴수를 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게 떠올랐던 모양이다.
간단한 요리를 내주며 살피니, 여우 수인과 대화하는 이나은의 기분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아직 이상한 종교단체에 관한 이야기는 접하지 않은 게 틀림없다.
“이나은 양, 이번엔 어디까지 갔다 왔어?”
“이번에도 저번처럼 서쪽으로 쭉 가서 숲 너머 하늘공원까지 갔다 왔어요.”
“하늘공원?”
“나무 적어지면서 갈대 많아지는 고원이요.”
“너희는 거길 하늘공원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네. 거기까지 갔으면, 또 와이번 잡다 온 거야?”
“네.”
대화를 들으며 이나은이 식사를 마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난 후에야 ‘검은 숲’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캠비온’과 ‘워울프’, 그 배후에 있는 종교단체에 관해 이야기하자 역시나 이나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놈들 아직 서울에 남아 있던 거네요. ‘캠비온 녹스’는 왜 찾으려는 걸까요?”
“아무래도 회사에서 알아내려는 게 초월자님들이 지내는 곳으로 가는 방법이었으니까, 그곳에서 온 ‘캠비온 녹스’에게 뭔갈 알아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아니면 ‘캠비온 녹스’가 다음에 있을 시련에 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한 거일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겠네. 그런데 정현 씨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거야?”
지난번 회사에 관해 들은 적 있던 여우 수인은 내 말에 동의의 뜻을 밝히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우리가 회사와 잘못 엮였다간 그 피해가 주둔지에 돌아올 수 있기에 떠보는 듯하다.
“저 혼자 결정할 건 아닌 것 같아요. 회사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건, 저희 일행 중 여러 사람에게 의미가 있거든요. 일단 일행이 모이기 전까진 정보를 더 모아봐야죠. 서 헌터 부탁도 물론 들어드리고요.”
“나야 정현 씨가 조사를 대신해주기만 하면 되지만, 다른 수인들은 그러지 않을 수도 있어. 이곳 주둔지는 중립을 우선시하거든. 다른 세력과 괜스레 엮였다간 평화를 깨는 행위로 보고 정현 씨를 따르는 인간들에게 책임을 물릴 수도 있다는 거 알아둬.”
조심스레 경고하곤 여우 수인은 이제 자신이 낄 때가 아닌 것 같다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가는 길에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던 곰 수인과 일행들마저 끌고 가주었다. 우리끼리 대화하라는 여우 수인 나름의 배려인 듯하다.
수인들이 나가고 나니, 김아람과 함께 수연이가 식당 안에 들어왔다. 다들 피로에 찌든 걸 보니, 이나은이 이번에도 무리하게 괴수를 사냥하고 다녔나 보다.
“너무 무리하진 말라니까.”
“다음 시련까지 얼마 안 남았어요. 여유로울 때, 최대한 강해져야죠. 그러는 정현 헌터도 계속 무리하는 것 같던데요?”
뒤편의 ‘게리온’ 시체를 가리키는 이나은에게 따로 할 말은 없었다.
“현아, 아까 들어오는 길에 서 헌터님 만났거든. 서 헌터님이 너한테 워울프에 관한 이야기 들으라던대. 무슨 이야기야?”
수연이가 끼어들고 그 옆에서 김아람이 호기심 가득 찬 표정으로 바라보아, 다시 한번 ‘검은 숲’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들려주었다. 이번엔 ‘캠비온’ 마을에 관한 전설까지 함께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니, 김아람이 손가락 하나를 뻗으며 말했다.
“이거 그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