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29화 (130/168)

[21. 전야 (6)]

“그거?”

“정말 모르시겠어요?”

김아람은 멀뚱멀뚱 본인만을 바라보는 우리 셋이 당황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박쥐 이야기잖아요.”

박쥐? 어느 부분에서 박쥐를 연상한 거지?

전설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아도 김아람의 사고를 따라잡을 수 없어 설명을 요구했다.

“네발짐승하고 새 사이에서 이랬다저랬다 편 바꾸다가 양쪽 모두에게 버려진 박쥐 이야기. 한 번쯤 들어보시지 않았어요?”

“그 이야기는 들어본 적 있지. 근데 그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온….”

아, 4와 2가 동물 다리 수라는 건가.

“…건지 이제야 알겠네.”

4는 네발짐승, 2는 새라고 바꾸어 읽으니 그제야 전설의 내용이 이해가 갔다.

“아람이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나저나 아람이도 대단하다. 듣자마자 바로 답을 찾아버렸네.”

“수연 언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직 답을 찾은 건 아니에요. 이 전설이 왜 ‘캠비온’의 마을과 연관되어 있는지는 모르겠거든요.”

확실히 박쥐 이야기가 어떻게 ‘캠비온’의 마을 위치를 알려준다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의문스러운 건 하나 더 있어요. 현 오빠가 아까 이 전설이 서 헌터의 선대로부터 대대로 전해졌다 했잖아요.”

“그랬지.”

“그러면 왜 지금까지 이게 박쥐 이야기란 걸 알아내지 못했을까요? 이쪽저쪽 붙는 박쥐 이야기는 널리 알려졌을 텐데….”

김아람이 전설을 듣자마자 박쥐 이야기를 떠올린 건 대단하긴 하지만, 정보상이란 직업을 물려받아 온 여우 수인 가문에서 이 정도도 생각해내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김아람이 저런 의문을 품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흠- 이거에 관해선 조금 더 조사해봐야 할 것 같네요. 그나저나 현 오빠는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으신 거예요? 회사의 흔적을 쫓으실 건가요?”

“주둔지의 수인들에게 이목을 끌 만한 행동을 하고 싶진 않으니, 일단은 서울에 기어들어 온 세력부터 조용히 조사해보려고. 회사를 본격적으로 쫓을지는 원정 나가 있는 사람들까지 돌아온 후에 정해야 할 것 같아.”

“하기야 섣불리 움직였다가 저희 주둔지의 수인분들하고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겠죠. 그러면 일단 종교단체부터 조사하겠단 거죠?”

“그러려고. 직접 만나서 회사가 엮인 일인 건지부터 확실히 해야겠어.”

“직접 만난다고요? 어디 숨어 있는지 아세요?”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김아람과 수연이가 식사하는 동안, 난 이나은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알아보러 간다더니, 어디로 가는 거예요?”

렉스 영지로 가서 워울프를 만나볼 줄 알았다며 이나은은 주둔지 내부로 들어가는 날 붙잡았다.

“여긴 감옥 쪽이잖아요.”

“맞아.”

지금 향하는 곳은 수인들이 만들어 둔 감옥. 중립을 선언하기 전까진 이 주둔지 역시 여러 세력 간의 권력 다툼에 휩싸인 터라 이 감옥을 포로들을 가두는 장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다 중립을 선언한 후에는 사용할 일이 없어졌으나, ‘인간계’와 합쳐지며 주둔지를 공유하게 된 김에 우리가 대신 이용하는 중이다.

“그 사람한테 물어보려고요? 아는 게 있을까요?”

“그래도 회사 중요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이야. 분명 캐물을 게 남아 있을 거야.”

조금 더 걸어 감옥에 도착했다. 감옥 주변에는 움막 하나 없었다. ‘인간계’의 버려진 빌딩 몇이 저 멀리에 보였으나 그마저도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지 않아 버려진 곳이라는 느낌이 확 든다.

“그럼 가보자.”

감옥 문을 열고 지하로 내려갔다.

입구에 걸린 횃불을 든 채 통로를 걸으니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더군다나 발밑에선 벌레들이 기어가는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한시 빨리 나가고 싶단 생각밖에 안 드는 곳이다.

“아무도 관리 안 해서 그런지 상태가 심각한데요?”

“어쩔 수 없지. 이런 곳에 인력을 쏟을 순 없잖아.”

“그건 맞죠. 근데 아까부터 무슨 소리 안 들려요?”

나와 이나은의 말소리가 통로에 울려서일까? 저 아래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꺼내줘! 제발 여기서 꺼내달라고!”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의 정체는 삼촌의 비명이었다. 이곳에 갇힌 지 한 달이나 되었는데도, 아직 저럴 기운이 남아 있다니. 다른 의미에서 대단하긴 하다.

삼촌의 비명을 배경음 삼아 조금 더 내려가니 쇠창살이 즐비한 복도가 나왔다. 삼촌의 비명은 그 끝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삼촌이 갇힌 감방 앞에 가니 쇠창살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가 곧장 우리 쪽으로 달려 나와 울부짖은 탓이었다.

“제발,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여기서만 내보내 줘. 팔다리를 묶든, 입을 막든 상관 안 할게. 제발. 제발, 여기서만 내보내 줘. 여기 혼자 온종일 갇혀 있으면 미칠 것만 같단 말이야!”

옷깃을 붙잡은 채 매달리는 게 심기에 거슬렸는지 이나은은 쇠창살을 발로 걷어찼다. 창살은 안쪽으로 살짝 휘며 삼촌의 머리에 부딪혔고, 그는 그 충격에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여태껏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아세요. 정현 헌터랑 정이화 헌터 아니었으면, 지금쯤.”

“그쯤 해둬. 정성훈 헌터, 물어볼 게 하나 있어.”

물어볼 게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삼촌의 자세가 바뀌었다. 좌절감에 빠진 표정에서 한순간에 여유로운 표정으로 돌변한 삼촌을 보니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물어볼 거? 뭐지?”

“회사의 종교단체에서 ‘캠비온’을 쫓고 있어. 그 이유 알 것 같아?”

“‘캠비온’? 그 메인 MC 말하는 건가? 내가 알 리가 없잖아. 여기 내내 갇혀 있었는데, 회사에서 뭘 하는지 어떻게 알겠어? 지금이라도 내보내 준다면….”

저 말에 거짓이 없다면, ‘캠비온’을 쫓는 건 삼촌이 우리에게 붙잡힌 이후 결정된 사항. 아마 지난번 시련 이후에 내린 결정일 거다.

“그러면 종교단체가 여전히 서울에 남아 있다면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을 것 같아?”

“그건 또 왜?”

“묻는 말에나 답하세요.”

이나은이 살기를 내뿜자 삼촌은 잠깐 뒷걸음질 쳤으나, 그것도 잠시. 곧 거만한 태도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서울 외곽에 광신도 무리가 있을 만한 곳이 있긴 하지. 아- 그러고 보니 대주교가 저번 시련을 클리어하지 못해서 정보처가 나밖에 없구나?”

분하지만, 삼촌의 말대로다. 대주교는 목이 잘린 채 그림 족자에서 튀어나왔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삼촌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시간 낭비하기 싫어서 찾아온 거니까, 착각하지 마. 서울 외곽 정확히 어디에 광신도 무리가 있는지나 답해.”

“삼촌한테 거짓말하면 못쓰지. 굳이 삼촌한테까지 찾아온 걸 보니, 급한 거 아니야? 그런 식으로 협박했다간 원하는 대답 못 들을걸?”

‘인간계’와 ‘축생계’가 합쳐지고 이제 고작 한 달이 지났다. 아무리 여우 수인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인간에 관한 정보를 모을 수 있을 리는 없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종교단체나 회사가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종교단체에 관한 정보를 얻을 방법은 두 가지. 렉스 영주의 영지에 가서 워울프를 만나거나 삼촌에게 직접 묻는 거였다.

워울프를 섣불리 만났다간, 회사의 움직임을 우리가 눈치챘다는 게 들통날 수 있으니 삼촌에게서 정보를 빼내려 한 거였는데. 이걸 기회 삼아 우위에 서려 할 줄이야. 너무나 삼촌다워서 할 말이 없다.

“날 데려가. 그럼 내가 거기까지 안내해줄게. 삼촌이 조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 감옥에서 빼줄 때까진 다른 말은 안 해줄 거야.”

***

“정말 이대로 출발하려고요?”

“응. 그동안 ‘캠비온’ 마을에 관한 정보 좀 얻어줘.”

“최대한 알아보긴 할게요. 그것보다, 너무 위험한 거 아니에요?”

숲의 입구. 김아람이 내 손에 들린 거울 조각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나은 헌터랑 같이 가니까 괜찮아. 여차하면 박다현 헌터 스킬로 돌아올 수도 있고. 그러니 우린 걱정하지 말고 한성수 헌터랑 같이 다른 사람들 잘 지켜줘.”

“알겠어요.”

“내일 동생 일행이 원정에서 돌아오면 그간에 있었던 일 잘 말해주고.”

“다시 당부하지만, 삼촌이란 인간 너무 믿지 마세요.”

나도 삼촌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어 불안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박다현까지 데려가기로 한 거다. 박다현의 ‘이면’에 삼촌을 가둬둔 뒤 이동하면 그가 뒷공작을 꾸미진 못할 테니.

다만, ‘이면’에 갇힌 이후 시도 때도 없이 말을 거는 삼촌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정보를 하나라도 더 캐내려는 건지, 아니면 오랜 시간 감옥에 갇혀 있어 외로움이 커서인 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본인의 말에 대답 안 했다간 제대로 안내 안 해준다고 엄포까지 놓은 상태라 무시할 수도 없다는 게 문제다.

삼촌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 들으려면 거울 조각을 항상 들고 다녀야 해서 이나은과 번갈아 가며 짐을 떠안고는 있는데. 출발도 전에 이 정도니 도착할 때까지 얼마나 진이 빠질지 걱정이다.

“믿는 거 이전에, 입이나 닫았으면 좋겠다. 그럼 가볼게.”

그런 걱정을 안고 길을 나선 게 벌써 이틀 전.

우리는 우선 삼촌의 말에 따라 동작대교 쪽으로 이동했다.

동작대교까지 이어진 숲 근처엔 우리 주둔지 외에 다른 주둔지가 없었기에 별다른 문제 없이 괴수만을 상대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다음에는 다리를 건너 현충원 근처의 숲으로 갔다.

숲에 다다르자 삼촌은 이 근방 교회에 종교단체가 숨어 있다고 말했고, 우리를 그 교회가 있는 곳까지 안내했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와! 성 엄청 커! 저기 왕자님하고 공주님 사는 거야?”

…여우 수인이 언급했던 고성이었단 거다.

“왕자님하고 공주님만 있으면 좋으련만. 정성훈 헌터, 정말 여기가 맞아?”

거울 조각에 대고 말하자 곧 답이 돌아왔다.

“여기 안에선 바깥 풍경이 전혀 안 보이는 거 몰라? 그 꼬맹이가 들고 다니는 거울 조각이라도 줘야 내가 보고 답할 거 아냐!”

박다현이 들고 다니는 거울 조각은 외부와 이어져 있는데, 그걸 우리가 순순히 줄 리가 있나.

“교회가 있다고 한 곳에 웬 동화에 나올 법한 오래된 성이 있으니까 하는 말이에요.”

“성? 그럴 리가. 애초에 한국에 그런 성이 어디 있어?”

한국엔 당연히 저런 성이 없다. 서양 기사 이야기 배경으로 어울릴 법한 저 성은 ‘축생계’와 합쳐진 후 생겨난 게 틀림없다.

“그러면 교회의 모습이라도 말해주세요.”

우연히 이곳에 다다랐다고 생각하며 물었는데, 이나은이 소매를 잡아당겼다.

“정현 헌터, 저 성 뒤편 보이세요?”

“성 뒤편?”

이나은이 가리킨 곳을 보니, 성벽 뒤편이 일부 무너진 게 보였다.

“만들어진 지 오래되어서 무너진 것 같네.”

“아니, 그게 아니라. 자세히 좀 봐 보세요.”

재촉에 삼촌과의 대화를 미뤄두고 좀 더 자세히 성벽을 바라보니, 그제야 이나은이 뭘 말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무너진 성벽 틈으로 십자가가 뻗어 나와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