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전야 (7)]
‘인간계’와 합쳐지기 전, 수인들의 사회엔 교회가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지금 저기 보이는 십자가는 ‘인간계’에서 넘어온 것이다. 위치를 보아하니 삼촌이 언급한 교회의 꼭대기에 달려 있었을 확률이 높겠지.
즉, 이나은이 말하고자 한 건.
“무너진 성벽 쪽에 종교단체가 숨어 지내는 교회가 있다는 거지?”
“네. 아마 두 세계가 합쳐지는 과정에서 저렇게 됐나 봐요.”
지난번 시련 이후, ‘인간계’와 ‘축생계’의 건물이 기이한 형태로 합쳐진 모습은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고성하고 교회 역시 그중 하나라 봐야 할 거다.
어찌 되었든, 저 교회가 정말 삼촌이 안내하고자 했던 곳이었다면. 그 교회가 고성과 합쳐지며 ‘렙틸리언’ 정보상과 종교단체 간의 접점이 생겼다면. ‘캠비온 마을’에 관한 전설이 종교단체로 흘러 들어간 경로로 여우 수인이 추측했던 게 맞을 가능성이 커진다.
“종교단체가 ‘렙틸리언’ 정보상한테서 ‘캠비온’에 관한 정보를 듣고 움직이고 있단 의미겠죠?”
“단정하긴 일러. 자세한 건 더 알아봐야지.”
“안에 들어가 볼까요?”
그때, 상황을 알 수 없는 게 답답했던지 삼촌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안에 들어간다니? 내 안내가 정확했단 거야? 그런 거지? 그러면 내가 도움이 된다는 게 증명된 셈이니 여기서 이만 꺼내주는 게 어떨까?”
장황한 삼촌의 말을 듣자마자 이나은은 거울 조각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곤 날카로운 눈매로 거울 조각을 째려보며 경고했다.
“거울 깨기 전에 입 다무는 게 좋을 거예요.”
“…거울이 깨지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거기서 평생 썩어야 할걸요? 다현아, 언니 말 맞지?”
“응. 아마 그럴 거야. 한번 실험해볼까?”
박다현의 기운찬 대답에 삼촌은 입을 다물었다. 감옥에서 나온 이후 치솟았던 기가 조금은 죽은 듯하다. 이대로 이 인간이 무언갈 꾸미기 전에 빨리 저 안을 확인하고 오는 게 나을 것 같다.
“이나은 헌터, 박다현 헌터 데리고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줘.”
“저 안에 들어가려면 당연히 제가 가야죠.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그래요?”
“안에 뭐가 있을 줄 모르니까 내가 가려는 거야. 나한텐 ‘퀴네에’가 있으니까 뭔 일 벌어져도 괜찮잖아.”
“이 인간하고 남아 있으려니 기분이 더러워서 가고 싶은 거긴 한데.”
삼촌에 대한 이나은의 불평을 뚫고 박다현이 말했다.
“언니 오빠, 저기 봐봐. 기사님들인가 봐.”
박다현이 가리킨 정문 쪽엔 워울프 셋이 성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철판을 덧댄 갑옷을 입고 있어 박다현의 눈엔 기사로 보인 듯하다.
“워울프까지 보였다는 건, 확정이네요.”
워울프와 종교단체.
박쥐 이야기와 ‘렙틸리언’ 정보상.
고성과 뻗어 나온 십자가.
이것들을 결합하면 하나의 결론이 나온다.
회사는 ‘렙틸리언’ 정보상에게 정보를 받았고, 그를 통해 ‘캠비온’과 관련된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
그 무언가를 확인할 방법은 지금으로선 한 가지밖에 없다.
“여기서 더 이야기할 시간은 없네. 갔다 올게.”
어차피 본인이 가겠다고 말할 게 뻔해 이나은의 대답은 듣지 않은 채, ‘퀴네에’를 썼다. 이후 워울프가 들어간 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홀로 성안에 침투해 워울프 뒤를 쫓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출구로 향하는 경로를 슬슬 외우기 힘들어질 시점, 워울프 셋 중에서 가장 덩치 큰 워울프만이 눈앞의 방에 들어갔다.
여기가 목적지겠거니 싶어 문이 닫히기 전에 얼른 방 안에 들어가니 웬 옥좌가 보였다.
보통 옥좌가 있는 곳이라면 신하나 기사 여럿이 설 수 있는 큰 홀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곳은 그런 상상을 정면에서 깨부수고 있었다.
옥좌 주변에 널브러진 수많은 잡동사니에 구역질 나는 냄새까지. 이 방은 가히 쓰레기장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런 것 따윈 전혀 상관없는 듯 옥좌엔 왕관을 머리에 비스듬히 얹은 도마뱀 수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기나긴 혀로 바닥에 놓인 잡동사니를 하나둘 핥더니 워울프를 향해 말했다.
“소득은?”
“아직 없다.”
“아직 없다?”
“그렇다.”
“그럼, 여기엔 왜 왔지?”
“정기 보고를 위해서다.”
답을 들은 도마뱀 수인은 혀로 땅에 떨어진 칼 하나를 집더니 반대편 벽을 향해 냅다 던졌다. 칼은 워울프 귓가를 스치고 쭉 나아가 벽에 꽂혔다.
워울프는 본인의 귀가 살짝 찢기자 인상을 찌푸렸으나 곧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가 물었다.
“맘에 안 드는 부분이라도 있나?”
“맘에 안 드는 부분이 있냐고? 내가 이래서 워울프랑 대화하기가 싫다니깐. 이 작자들은 어째 눈치가 하나도 없어!”
“속이는 것 없이 정직하게 의무를 이행할 뿐이다.”
“의무든 뭐든 됐고. 우리 소중한 클라이언트님께서 ‘캠비온’ 붙잡길 기다리고 계시는데, 내가 아무 소득 없다는 말을 전해야겠어? 안 그래도 곧 여기로 오신다 했단 말이야!”
신경질적으로 소리 지른 도마뱀 수인은 이번엔 둘둘 말린 양피지 한 장을 워울프 눈앞에 던졌다.
“내가 ‘캠비온’ 마을에 관한 전설을 빼내려고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아? 너희도 그만큼 성의를 보이란 말이야! 워울프가 지내는 마을을 재건하고 싶다더니 아직도 ‘캠비온’ 꽁무니 하나 못 본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워울프에게 던진 양피지에는 여우 수인이 들려주었던 전설이 적혀 있나 보다. 전설이 왜 저 양피지에 적혀 있는지까지는 도마뱀 수인이 말하지 않아 알아낼 수는 없지만, 여우 수인에게 들려줄 만한 소득은 생긴 셈이다.
도마뱀 수인과 워울프와의 대화에서 더 알아낼 만한 것이 없나 귀를 기울이는데, 정중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오세요.”
도마뱀 수인의 허락 이후 문이 열리고 로브를 뒤집어쓴 존재 둘이 걸어 들어왔다. 로브 밖으로 드러난 신체에 꼬리나 털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인간인 것 같다.
갑작스러운 존재의 등장에 잠깐 당황했으나, 저들의 대화를 자세히 엿들을 수 있도록 좀 더 가까운 곳으로 몸을 옮겼다. 새로 등장한 자들은 필시 도마뱀 수인이 언급한 소중한 클라이언트일 터. 어쩌면 회사에 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방문자 중 한 명은 문 앞에 선 채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다른 한 명만이 워울프 옆에 공손한 자세로 섰다. 워울프 옆에 선 자는 곧바로 로브를 벗었는데, 예상대로 인간 남성이었다. 옷을 보니 대주교와 같은 종교인 신분인 게 틀림없었다.
종교인은 도마뱀 수인 쪽으로 무언가가 가득 담긴 주머니를 던졌다.
“약속했던 금액입니다. 저희 신을 열렬히 믿는 신도들이 힘들게 모은 것이니 헛되이 쓰이는 일은 없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만약 그들의 믿음에 보답하지 못한다면 신께서 그대를 저주하실 터. 신의 대리인인 저희가 그대를 벌할 것입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다면, 저희가 부탁드린 일은 어떻게 되었죠? 기한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주머니를 활짝 펼쳐 그 안에 든 금덩어리를 혀로 만지작거리던 도마뱀 수인은 날카롭게 찢어진 눈을 감고 왼손을 완전히 펼쳤다.
“딱 나흘. 나흘 안에 ‘캠비온’을 잡아다가 눈앞에 대령해드리겠습니다. 워울프는 숙련된 현상금 사냥꾼이니, 그 정도 기한이면 충분합니다. 그렇지?”
“흔적이 아예 없는 것까지는 아니라서 ‘캠비온’을 붙잡을 순 있을 거다. 하지만….”
“들으셨죠?”
워울프가 말을 끝내기 전에 도마뱀 수인이 말을 끊었다.
“나름 여러 워울프를 통솔하고 있는 자의 말이니 신뢰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워울프란 종족은 속이는 것 없이 정직하게 본인의 의무를 이행하기도 하고요.”
워울프가 지은 험악한 표정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지 도마뱀 수인은 손을 비비며 종교인을 향해 징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니 꼭 그 계획이 완성되면 저도 데려가 주셔야 합니다.”
“구원을 위해 힘쓴 자이니 당연히 계획에 포함될 겁니다. 아, 물론 워울프도 함께 말이죠.”
종교인의 말을 듣고 만족한 듯 도마뱀 수인은 금덩어리가 담긴 주머니를 소중히 자신의 뒤편에 놓았다. 그러곤 잡동사니를 뒤져 먼지가 잔뜩 낀 잔을 꺼냈다.
“최근 얻은 맛 좋은 음료가 있는데, 그거라도 한 잔 대접해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저는 다시 구원받을 신도들을 모으러 가봐야 합니다.”
“아쉽지만, 혼자 즐겨야겠네요.”
“다음 만남 이전에 ‘캠비온’을 붙잡는다면 미리 연락해주시길 바랍니다.”
“네, 저만 믿고 계시면 됩니다. 아니죠. 저희가 믿는 신께서 은총을 내려 주신다면 ‘캠비온’을 금방 붙잡을 수 있을 겁니다.”
도마뱀 수인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며 종교인은 그 자리에서 신의 믿음에 대한 설파를 시작했다.
엉터리 설파까지 들을 필욘 없으니 대화 엿듣는 건 그만두고, 로브로 모습을 감춘 사람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문 쪽으로 다가갔다. 종교인과 달리 끝까지 본인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건 분명 정체를 숨겨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도마뱀 수인에게 여우 수인의 정보를 준 스파이라든가. 아니면 회사 내에서 꽤 중요한 요직에 있는 인물이라든가.
‘퀴네에’를 믿고 슬쩍 로브 안을 들여다보려는데, 긴 늑대 울음소리가 성안에 울려 퍼졌다. 그 탓에 로브를 뒤집어쓴 자가 황급히 움직여 얼굴을 들여다보는 건 실패했다.
“늑대 울음소리?”
그러나 로브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야?”
“바깥에 침입자가 있다는 경고다. 직접 가서 살피고 오겠다.”
“어차피 오늘 할 이야기는 이 정도인 것 같으니, 두 분은 다시 돌아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 근처에 인간을 혐오하는 수인들이 있는 모양인데, 시비라도 걸러 왔나 봅니다. 뒷마무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워울프와 도마뱀 수인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밖으로 나섰다. 그동안에도 난 손만 앞으로 뻗은 채 움직이질 못했다.
로브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 삼촌의 목소리.
내가 성에 잠입한 짧은 시간 동안 ‘이면’에서 탈출해서 로브를 구해 쓰고 이곳에 왔으리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게다가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이 뜬금없이 ‘캠비온’을 잡기 위해 도마뱀 수인과 워울프와 힘을 합쳤을 거라고도 생각되지 않고.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잘못 들었는지, 아니면 무언가 일이 생긴 건지는 가만히 있어선 알 수 없다. 일단은 일행에게 돌아가는 게 우선인 것 같다. 성 근처에 숨은 일행이 워울프에게 들킨 것 같아 걱정되기도 하고.
그런 생각으로 정신없이 뛰어 아까까지 일행이 있던 곳에 다다르자 주변에 널브러진 워울프 몇이 보였다. 그리고 그보다 좀 더 떨어진 곳에는 박다현을 뒤에 두고 워울프와 싸우고 있는 이나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