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33화 (134/168)

[21. 전야 (10)]

요리, 식사, 그리고 잡담.

원정에서 복귀한 이화 일행이 식당에 들어온 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이화가 없던 동안 열심히 일했다며 놀아달라고 조르는 박다현. 담소를 나누는 동현이 형과 수연이. 한성수의 시선이 딴 데 팔린 사이 몰래 음식을 뺏어 먹는 김화영. 김아람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인까지. 일행이 한데 모여 만들어낸 풍경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축생계’와 합쳐지고 한 달. 시련이 끊긴 동안 잠시나마 되찾은 일상 풍경 속 나와 이나은만이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즐거워 보이는 저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이화 일행이 원정을 떠나 있던 동안 벌어진 일에 관해선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근심 속에서 일행을 지켜보는데, 박다현이 매달린 다리를 질질 끌며 이화가 내게 다가왔다.

“오빤, 오늘따라 왜 이리 조용해? 원정 나가 있던 동안, 뭔 일 있었지? 또 삼촌 때문이야? 삼촌이 뭐 이상한 말이라도 했어?”

“아- 이화 언니는 모르는구나. 언니랑 오빠 삼촌이 말이지. 사실.”

“그만.”

황급히 박다현의 입을 막고 이나은에게 눈짓했다.

“이나은 헌터, 잠시 박다현 헌터랑 놀아줄래? 원정 다녀와서 피곤할 텐데, 이화도 조금은 쉬어야지.”

“네? 아…. 네.”

멍하니 있던 이나은은 곧 내 의도를 눈치챈 듯 이화의 다리에 매달린 박다현을 떼주었다.

“그 이야기, 여기선 안 하려는 거죠?”

“응. 조금 있다가 해도 상관없잖아.”

식당 한가운데 모여 있는 일행 쪽을 바라보며 말하니 이나은은 고개를 끄덕인 뒤 박다현을 데리고 식당에 딸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이나은의 대화를 듣고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아챘는지, 이화는 목소리 죽여 물었다.

“뭔데 그래? 다른 사람들은 알면 안 되는 거야?”

“그런 건 아닌데…. 잠깐 바람 좀 쐴래?”

일행이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다고 여겨 밖으로 나서자 이화는 순순히 내 뒤를 따라왔다.

식당 밖으로 나와 향한 곳은 가짜 삼촌이 갇혀 있었던 감옥이었다. 지하로 내려가 감방을 보여주니 이화는 어이없어했다.

“삼촌은?”

“네가 보는 대로야.”

“내가 없는 동안 도망이라도 친 거야? 어떻게? 초월자님께서 텔레포트라도 시켜 준 건가? 고작 그딴 인간한테 500만 포인트를 버리는 초월자님이 계신다고?”

속사포로 말을 내뱉으며 추궁하는 이화를 말린 다음 그녀가 원정을 나가 있던 동안 벌어진 일을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워울프를 만난 일부터 가짜 삼촌이 죽은 일까지. 본래라면 여기 갇혀 있어야 했을 사람이 사라지게 된 경위를 듣게 된 이화는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쪼그려 앉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붙잡았던 사람이 가짜였다는 거지?”

“그랬더라고.”

“어째서? 어째서 가짜란 걸 못 알아챈 거지?”

“우리까지 속일 정도로 타인의 모습을 완벽하게 베낄 수 있는 스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더라.”

“그런 사람을 우리의 진짜 삼촌이 죽인 거고.”

침묵으로 긍정을 대신하자 이화는 다시 한참 동안 말을 잃었다. 동생이 입을 열었을 땐, 다소 뜬금없는 말이 나왔다.

“다음 시련이 끝날 때까지 이 사실에 대해선 우리끼리만 알고 있는 거로 하자.”

이야기를 듣고 나면 할 것이라 예상했던 말과는 전혀 다른 말에 왜냐고 물으니 이화는 원정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 렉스의 영지를 넘어 강북구로 원정을 떠난 건 알고 있지?”

“당연히 알고 있지.”

“전에 렉스 영주가 자신의 영지 넘어선 다 버려진 땅이라고 했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정말로 번듯한 건물 하나 없이 숲만 빽빽하게 있더라고. 물론 거기에도 사람하고 수인들이 사는 마을은 있었지만.”

이화 일행이 방문한 마을도 임시로 만든 움막 몇 개가 붙어 있는 수준일 뿐, 주민은 많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변두리에까지 퍼져 있던 소문이 하나 있었어.”

“소문?”

“구원에 관한 소문이었어.”

곧 시련에서 벗어나게 해줄 구원이 있을 것이다. 서울 한강 이남에 있는 동작역으로 오면 구원의 대상으로 선택받을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신에 대한 믿음이 깊은 자일수록 선택받을 가능성이 크다.

이화가 들려준 소문에 관한 대략적인 내용은 이러했다.

“어딘가 찝찝한 소문이라 생각했는데, 오빠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 찝찝해졌어.”

저 소문을 듣고 나니 나 역시 찝찝한 기분이 든다.

내가 갔었던 성이 있던 곳은 현충원 근처의 숲으로 동작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그 점을 생각했을 때 교회 예배당에 모여 있던 신도들이 어디서 온 건지는 쉬이 예측할 수 있었다.

“소문을 듣고 동작역에 모인 사람들이 교회 예배당으로 보내진 거겠구나.”

“아마 그렇겠지? 그리고 내가 갔던 변두리까지 소문이 퍼졌다는 건, 이미 엔간한 곳엔 소문이 싹 퍼진 뒤라는 건데. 내 눈엔 회사가 서울 내에 자신의 세력을 새로 모으려고 소문을 퍼뜨린 것으로밖에 안 보이거든?”

“정말로 인류를 초월자님들이 사는 ‘낙원’으로 보내려는 계획을 실행하려는 걸지도 모르지.”

문득 든 생각을 말하자 이화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부정했다.

“그렇진 않을걸.”

“왜?”

“대주교가 허구한 날 했던 말 기억 안 나?”

“믿음이 충실해야 교주한테 선택받아 ‘낙원’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었나?”

“응. 그런 말을 한 거로 보아선 ‘낙원’에 갈 수 있는 사람의 수는 한정되어 있다는 건데, 그 기회를 그저 소문을 듣고 모인 사람들한테도 주려고 할까?”

“…줄 리가 없지. 그럼 대체 왜지? 인제 와서 서울에 다시 힘을 뻗으려는 건가?”

“여기서 우리 둘이 이야기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으니 일단 넘어가자. 그보다 가짜 삼촌이 마지막 순간에 뭐라 말했다 했지?”

이화의 지적을 듣고 우리가 붙잡았던 삼촌이 가짜였다는 충격에 잊고 있던 두 단어가 떠올랐다.

“노들섬, 제물. 이렇게 말했어.”

“오빠네 일행 말고 그 말을 들은 사람이 또 있어?”

고개를 저었다. 예배당 내의 신도들은 전부 본인의 기도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숨이 끊어져 가는 삼촌의 말에 관심을 둔 사람은 없었다.

“‘퀴네에’를 쓰고 있었다고 했으니까, 오빠한테 한 말은 아닐 거고. 그럼 누구 들으라고 마지막 순간에 그런 말을 한 거지?”

“아마 나한테 한 말이 맞을 거야.”

“오빠한테?”

가짜 삼촌은 내가 ‘퀴네에’를 쓴 채 고성에 잠입했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모습을 감춘 채 근처에 있으리라 생각하고 자신이 죽는 마지막 순간에 그 말을 했을 것이다.

“오빠한테 그런 말을 해줄 이유가 어디 있다고?”

“삼촌한테 이용당했다 버림받은 처지가 되고 나니, 복수라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노들섬, 제물. 이 말을 전한다고 해서 무슨 복수를 할 수 있다고?”

“그것까진 나도 모르지.”

“그래도 중요한 건 가짜 삼촌의 입에서 노들섬이 언급되었단 거네. 이번 원정에서도 노들섬 사람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서 이상하다 싶었거든. 근데 제물이라면…. 또 다른 초월자님을 강림시키려는 데 노들섬 사람들을 희생시키려는 건 아니겠지? 노들섬 사람 중엔 모든 스탯이 0인 사람 없잖아.”

그래도 ‘제물’이라는 단어가 언급된 이상, 이화가 제시한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다.

“노들섬 사람들이 사라진 데에 회사가 연루되었다는 것을 알아낸 것만이라도 어디야. 가짜 삼촌 때문에 잊고 있었는데, 신혜진 헌터한테도 말해줘야겠다.”

주인장에게 노들섬 사람들의 자취를 쫓을 단서가 나왔다는 걸 말해주면 좋아하겠다고 생각하는데, 이화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너무나 단호하게 답해 쳐다보니 이화는 설명을 덧붙였다.

“신혜진 헌터가 알게 되었다간, 당장이라도 동작구에 쳐들어갈 준비를 하실 거야. 여기 주둔지 내의 수인과 인간끼리는 다음 시련 때까지 조용히 지내자고 합의 본 상황에서 굳이 다른 세력과 부딪히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싶진 않아.”

시련까지 2주도 채 남지 않은 상황.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시련 전에 지금의 평화를 깨고 싶지 않다는 이화의 의견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곧 다가올 ‘신야’ 때까지는 조용히 정보만 모으자. 그러다 시련 내용을 본 이후에 다른 사람들에게 회사에 관한 사실을 알려도 늦지 않을 거야. 오빠도 아까 식당에서 이 이야기를 안 하려고 한 건 다른 사람들만큼은 지금의 평화를 누리게 하고 싶어서 아냐?”

결국 이화의 말대로 회사에 엮인 일들을 다른 사람들에겐 알리지 않은 채 시련 전날 있을 ‘신야’ 때까지 정보만 모으기로 정하고 감옥에서 빠져나왔다.

이화와의 대화를 마치고, 난 곧장 식당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우 수인의 집 앞으로 갔다. 그녀는 마침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문 앞에 나와 있었다.

“정현 씨, 내 부탁은 어떻게 됐어?”

그녀의 물음에 ‘렙틸리언’ 정보상이 ‘캠비온 마을’에 관한 전설이 적힌 양피지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어떻게 해서 그 양피지에 전설이 적히게 되었는지까지는 모르겠어요. 그래도 서 헌터가 의심하고 있던 자가 정보를 훔쳐 간 건 확실해요.”

내 말을 들은 여우 수인은 꼬리를 꼿꼿이 세우며 어조를 높였다.

“그렇단 말이지? 조만간 방법을 찾아서 제대로 혼쭐내 줘야겠네.”

여우 수인은 분하다는 듯 내뱉곤 별안간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 정현 씨에게 말해줘야 하는 게 하나 있어. 정현 씨가 주둔지 밖으로 나갔을 때, 김아람 양하고 이야기한 내용인데.”

우리가 고성으로 떠났던 동안 여우 수인은 김아람과 함께 ‘캠비온 마을’ 전설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고 했다. 의견을 나누던 둘은 각기 다른 이유로 충격을 받았는데. 여우 수인은 본인의 가문에 전달되고 있던 전설이 실은 ‘인간계’에 흔히 알려진 내용이란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김아람은 ‘축생계’에는 ‘박쥐 이야기’는커녕 흡혈귀 같은 박쥐와 관련된 전설이 하나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데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흡혈귀 같은 전설도 없다고요? 애초에 ‘캠비온’이란 종족도 실재하잖아요.”

“정현 씨도 김아람 양하고 같은 착각을 하고 있나 본데, 박쥐 수인이라고 해서 다른 자의 피를 빨아먹지는 않아. 마늘 같은 매운 음식을 싫어하지도 않고. 그런 전설은 지금껏 들어본 적 없어. 이야기가 틀어졌는데, 중요한 부분은 지금부터야.”

여우 수인은 목소리를 고르곤 한마디 덧붙였다.

“‘축생계’와 ‘인간계’가 합쳐진 건 불과 한 달 전이잖아? 그런데 우리 가문에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전설이 ‘인간계’의 이야기라는 것. 이상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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