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신야]
성에 다녀오고 2주가 살짝 안 되는 시간이 지나갔다.
그동안 일행은 평소처럼 시간을 보냈다. 식당을 운영하거나, 주인장의 의뢰를 받거나, 괴수를 사냥하여 현상금을 타거나, 훈련을 통해 자기 계발을 하는 등. 반복되는 일과 속 각자의 방식대로 곧 있을 시련을 대비해나갔다. 그러나 요 며칠간 벌어졌던 일을 전부 알고 있는 나와 이화, 이나은만큼은 평소처럼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시련 시작일은 점차 가까워지는데 우리가 해야 할 건 너무나 많았다. ‘캠비온’ 마을과 엮인 전설을 풀어 워울프보다 빨리 ‘캠비온’을 찾아야 했고. 주둔지의 다른 사람들 몰래 회사의 목적도 조사해야 했다. 당연히 조사를 이어가는 틈틈이 각자 맡은 일을 수행하며 시련도 대비해야 했다.
고작 셋이서 이 많은 것을 감당할 순 없었기에 ‘캠비온’ 마을을 찾는 건 김아람에게 맡겼다. 그전부터 여우 수인과 함께 전설을 파헤치고 있었고, 회사가 ‘캠비온’을 찾는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어 이 일을 맡기기에 가장 적임자였다.
‘캠비온’과 관련된 조사를 제쳐두고 남은 회사의 목적 조사는 나와 이화가 맡았다. 원하는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우리는 ‘렙틸리언’ 정보상의 성 곳곳을 뒤졌다. 성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려면 모습을 감추는 게 필수였기에 난 이화와 박다현이 들어 있는 ‘이면’의 거울 조각을 들고 ‘퀴네에’를 쓴 채 성을 들락거려야 했다. 얼마나 자주 들락거렸는지 나중엔 복잡했던 성의 구조가 외워질 정도였다.
처음에는 홀로 성을 조사하려고 했었다. 그랬지만 혹시 모를 전투에 대비해야 한다며 이화가 합류했고, 붙잡힌 노들섬 사람들을 발견했을 시 구출 수단으로 ‘이면’을 이용하자는 이화의 주장에 따라 박다현도 데려가게 되었다.
한편 주둔지에 남게 된 이나은은 날마다 성에 가는 우리에게 미안해했지만, 그렇다고 그녀까지 데려갈 순 없었다. 아무리 중립 구역이라 해도 회사가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법이었다. 따라서 나머지 일행을 지켜줄 주요 전력 하나쯤은 주둔지에 남겨둘 필요가 있었다. 그 역할로 선정된 이나은은 우리와 함께 움직이는 대신 주둔지에 남아 근처에 수상한 움직임이 없는지 주의 깊게 살피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낮에는 성 탐방, 밤에는 식당 운영이라는 극악에 가까운 스케줄을 2주 가까이 소화하게 되었다. 멸망 이전, 아르바이트와 먹방을 전전하던 기억이 떠올라 고통스러웠으나 다른 주둔지 사람들에게 우리가 회사에 관한 조사를 이어가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몸을 혹사하며 얻은 정보는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전에 삼촌과 함께 왔던 종교인이 이틀 간격으로 성에 방문한다는 것이다. 홀로 성에 방문한 종교인은 ‘렙틸리언’ 정보상에게 ‘캠비온’에 관한 정보를 캐묻곤 했다.
다음 정보는 약속한 기일이 지나도록 워울프가 ‘캠비온’을 찾지 못했다는 거다. 그 때문에 ‘렙틸리언’ 정보상과 종교인이 워울프를 매일같이 협박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성에 방문하는 건 종교인뿐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슴 수인도 간간이 성에 찾아왔는데, 그녀는 한강 이남 대부분을 점령한 수인 세력 소속으로 ‘렙틸리언’ 정보상에게 렉스 영주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사고 있었다. 다만, 그녀는 성에 인간이 지내는 교회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강 이남의 인간은 보이는 족족 죽이는 수인 세력에 속한 그녀가 ‘렙틸리언’ 정보상을 가만히 놓아둘 리 없었다.
아무래도 성안에서 움직이는데 제약이 많이 따르다 보니 얻을 수 있었던 정보는 이 정도가 다였다.
“형씨! 설마 오늘 같은 날에도 일하러 나가는 거야?”
생각을 정리하며 주둔지 밖으로 나서는데, 나를 멈춰 세운 곰 수인 탓에 집중이 깨졌다.
“오늘 같은 날이니까 더 열심히 일해야죠. 이따가 손님 많이 몰릴 텐데, 괴수 잡아다가 미리미리 재료 준비해둬야 하지 않겠어요?”
“어제도, 그제도, 엊그제도 ‘검은 숲’에 갔으니까 그러지. 오늘 쉬려고 매일매일 ‘검은 숲’에 갔던 거 아니었어?”
“그거로도 부족해서요. 그런고로 오늘도 결투는 못 하게 되었습니다.”
“결투는 됐어. 나도 염치가 있는데, 억지로 형씨를 붙잡을 순 없지. 그보다 ‘신야’도 제대로 못 즐기고 안타깝네.”
곰 수인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니 확실히 안타깝긴 했다. 오늘만큼은 ‘검은 숲’으로 나서는 수인 없이 모두가 무기를 내려놓은 채 한데 모여 나무에 등을 걸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건 등불이 곳곳을 희미하게 밝힌 덕분에 칙칙하던 주둔지가 조금은 밝게 느껴졌다.
“이따가 형씨네도 등 하나 정돈 걸고 소원 빌어. 오늘 같은 날 아니면 언제 또 소원 빌겠어.”
곰 수인 말대로 그나마 ‘신야’니까 이런 풍경이 나올 수 있었던 거다.
‘축생계’에선 새해 전날 밤을 ‘신야’라 부른다. 이 주둔지의 수인들은 전통처럼 ‘신야’ 때 등을 걸고 소원을 빌며 무사히 새해를 맞이한 것을 다 함께 축복했다고 한다. 물론 곧 주어질 새로운 시련 탓에 소란스럽게 새해를 축복하는 수인은 없었지만, 그래도 평소보단 다들 한결 마음이 편해 보였다.
저기에 편승해 마음의 짐을 덜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시련이 주어지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모아야 하는 내게 맘 편히 ‘신야’를 즐길 여유는 없었다.
“갔다 와서 빌게요.”
‘신야’를 즐기는 곰 수인의 기분을 깨기 싫어 대충 둘러댄 뒤 그에게서 벗어났다. 이후 ‘검은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느 정도 깊숙이 들어와 다른 이의 눈에 띄지 않겠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는 ‘이면’을 통해 성으로 이동했다.
성에 도착한 뒤, 곧바로 ‘퀴네에’를 쓰고 거울 조각을 꺼냈다. 주변이 잘 보이도록 거울 조각을 앞으로 쭉 뻗으니, 이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5번 복도로 가자.”
‘이면’ 속 이화는 ‘퀴네에’를 쓴 내 말을 인식할 수 없었기에 묵묵히 동생의 안내를 따랐다.
“나가자마자 왼쪽으로 꺾어서 끝에 있는 복도로 들어가면 돼.”
성을 수색하는 동안 약도를 그려둔 이화 덕분에 길 잃을 일은 없었다. 이번에도 이화의 길 안내는 정확해 다른 길로 새지 않고 단번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5번 복도엔 별달리 살펴볼 게 없었다. 소득 없는 수색이 이어지자 이화도 맥이 빠졌는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복도 끝에 보이는 방 아직 안 들어가 봤거든? 이번엔 거기로 가보자.”
이화가 지시한 곳으로 들어가니 하얀 예복을 갖춰 입은 여성이 기도하는 중이었다. 교회를 제외한 성 내부에서 신도를 본 건 처음이라 자연스레 시선이 쏠리게 되었다.
일반적인 신도들이 믿음에 대해 광적으로 읊조리는 것과 달리 그녀는 차분히 벽을 향해 기도를 읊고 있었다.
“그대가 오실 날이 점차 다가오고 있습니다. 제물은 거의 준비되었으니, 부디 구원을 허하시고 힘을 더해주시옵소서.”
그녀가 왜 이곳에 홀로 있는 건지 의문이었으나, 고작 신도 하나에게 시간을 뺏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차분히 기도하고 있어도 어차피 나사 하나 풀린 건 다른 신도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굳이 건드리고 싶지 않아 조용히 뒤돌아 방 밖으로 나섰다.
복도에 달린 조그만 창으로 보니 해는 이미 기운지 오래였다. 아직 둘러보지 못한 성안의 장소가 많지만, 오늘은 그만 수색을 마쳐야 할 것 같다. 조금만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주둔지로 돌아가기 전에 시련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여성 신도가 있던 방에서 조금 떨어진 방 안에 들어가 식당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려는데 거울 조각에서 이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방금 신도가 있던 방으로 돌아가. 빨리! 그 사람 기도 내용 좀 다시 들어봐야겠어.”
이화도 곧 시련이 시작되리라는 걸 알고 있을 거다. 그런데도 저렇게까지 급하게 말한 걸 보면, 신도의 기도 내용 중 중요한 내용이 언급되었던 게 분명했다.
“기도 내용에 특별한 게 있었나?”
대충 흘려들은 기도 내용을 되새기며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성 신도는 아까 그 자리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준비한 제물 전부를 불사를지라도, 저희만큼은 끝까지 보살펴주시길 바랍니다.”
그 뒤로 이어진 비슷한 내용의 기도를 오래도록 들었으나, 이화는 여전히 여성 신도의 기도를 더 듣고 싶어 했다. 그 이유를 궁금해하면서도 기도를 주의 깊게 듣는데 별안간 성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이유는 바로 알 수 있었다.
「44일이 지났습니다.」
[‘폐허가 뒤따르는 자’님이 피바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열두 과업의 전사’님이 생존자들이 겪게 될 과업을 기대합니다.]
[‘방구석 만화광’님이 플레이어의 반응을 살핍니다.]
여성의 기도에 정신이 팔린 사이, 하루가 지나간 것이었다.
「이번 패치 내용은 어땠나요?」
[‘별의 적대자’님이 불만을 토로합니다.]
「‘축생계’와 ‘인간계’의 존재들이 서로를 본 건 처음이었을 텐데, 의외로 서로 죽고 죽이지 않고 함께 어울리는 플레이어가 많았다는 불만이 나왔네요.」
「서로를 적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초월자님들께서 즐길 수 있도록 조금 더 신경 쓰겠습니다.」
[‘호색한 찬탈자’님이 다음 시련 내용을 궁금해합니다.]
「다음 시련에 관한 힌트를 드리자면, U+2641 행성에 44일간 벌어졌던 첨예한 대립과 연관되어 있어요.」
「이번 시련을 통해 어느 쪽이 옳은지 결정을 내리고자 해요.」
「그럼 오랜 시간 기다리셨을 테니, 바로 시련 시작할게요.」
[‘호색한 찬탈자’님의 호기심이 커집니다.]
[‘빛나는 눈의 전략가’님이 당신에게 근심의 눈길을 보냅니다.]
[‘방구석 만화광’님이 이번 시련에서의 당신의 행보를 궁금해합니다.]
[다음 ‘시련’이 시작됩니다.]
[‘시련’의 난이도를 조정 중입니다.]
[평등대왕의 심판]
- 대상 플레이어 : U+2641 행성 생존자 전원
- 클리어 조건 : 7일 동안 지정된 적대 세력보다 더 많은 금을 헌금함에 모을 것.
- 성공 보상 : 다음 시련 진출
- 실패 페널티 : 철상에서 하루 취침
[평등대왕의 심판이 시작됩니다.]
[U+2641 행성에 ‘철상지옥’이 구현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