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35화 (136/168)

[23. 철상지옥 (1)]

[플레이어 ‘정현’은 8202-S 구역에 위치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강경파에 배정됩니다.]

「모든 플레이어의 세력 배정이 끝났어요.」

「지역별로 세력을 배정한 기준을 말씀드릴게요.」

「우선 서울에 있는 플레이어의 세력을 배정한 기준은 한강이에요.」

「한강 이북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온건파, 이남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강경파입니다.」

“뭐?”

저 배정 기준에 따르면 한강 이남의 성에 있는 우리는 강경파, 한강 이북의 주둔지에 남은 다른 일행들은 온건파에 속하게 된다. 시련 직전까지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모으려던 게 발목을 잡은 셈이다.

뜻밖에 일행과 갈라지게 된 상황에 어이없어하는 동안에도 메인 MC는 설명을 이어갔다. 서울에 이어 인천, 경기, 강원 등 각 지역의 세력 배정 기준을 밝힌 뒤, 메인 MC는 세력 이름을 온건파, 강경파로 붙인 이유를 설명했다.

「지역 내 다른 구역과 비교했을 때 인간, 수인 가리지 않고 화합한 플레이어가 많은 곳은 온건파. 적은 곳은 강경파예요.」

「어찌 되었든, 아까 말한 것처럼 이번 시련을 통해 온건파와 강경파 중 어느 쪽이 옳은지 확인하고자 해요.」

「자본주의 원칙에 따라 더 많은 금을 헌금함에 넣은 세력의 의견이 옳다고 판단하도록 할게요.」

[‘낮은 시선의 소유자’님이 황금만능주의를 제창합니다.]

「의견의 옳고 그름과 별개로 헌금함에 든 금이 적은 쪽은 저희 초월자님들께 품은 신앙이 부족하다고 판단. 즉결처분하도록 할게요.」

[‘허영의 사내’님이 만족합니다.]

「결과적으로 온건파와 강경파 중 어느 쪽이 시련에서 더 많이 살아남는지를 통해 인간과 수인이 함께하는 것이 옳은지, 서로 죽이는 게 옳은지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실패 페널티인 철상에서 하루 취침이 뭔지 궁금했는데, 메인 MC의 말로 보아 결코 좋은 것 같진 않다. 즉결처분이니, 어느 쪽이 시련에서 더 많이 살아남느냐니 등의 말을 보면 이번 시련에서 금을 더 적게 바친 세력의 플레이어는 철상에서 하루 취침함으로써 죽게 되는 듯하다.

“문제는 여기 있는 셋이 페널티를 받지 않으려면 나머지 일행이 페널티를 받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네.”

나와 이화만의 생존을 생각한다면 강경파가 시련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돕는 게 맞지만, 그렇다고 온건파를 패배하게 만들 순 없었다. 온건파가 패배해 인간을 탄압하는 수인 세력이 서울을 점령하게 되면 그 이후 생존하는 것도 문제고, 앞으로 나를 도와 회사에 대항할 인원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도 문제다. 무엇보다 지금껏 함께했던 사람들을 쉽사리 버릴 순 없었다.

시련을 클리어하기도, 실패하기도 애매한 상황. 말 그대로 완전히 꼬여 버렸다.

「헌금함은 각 구역에 하나씩 설치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디 있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위치를 공개해드릴게요.」

[헌금함의 위치를 표시합니다.]

[8202-S 구역의 헌금함은 ‘현충원’에 위치하여 있습니다.]

‘현충원’에 위치하여 있다는 글씨가 새겨지자마자 바로 근처에서 빛이 하늘을 향해 솟아났다. 빛은 기도하고 있는 여성 신도 바로 앞,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 평범한 상자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헌금함은 크지 않지만, 물건을 무한정으로 담을 수 있도록 특별 제작되었어요.」

[‘절름발이 공돌이’님이 어깨를 으쓱합니다.]

「아무리 많은 금이 헌금 되었다고 하더라도 무게 잴 수단은 마련되어 있으니 괜한 걱정에 아끼지 말고 많은 금을 헌금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단, 헌금함은 종이로 만들어져 불에 잘 타니 주의해주세요.」

「다시 강조해 드릴게요. 헌금함은 어떤 방법으로도 파괴되지 않지만, 딱 하나. 불에는 잘 탄다는 점 주의해주세요.」

「그럼 이번 시련 동안 많은 금을 헌금해주시길 바랍니다.」

불조심하라는 경고 이후 글씨는 더 새겨지지 않았다.

“클리어 조건은 온건파보다 더 많은 금을 헌금함에 모으는 것뿐인데, 세력이 갈라져서 괜히 더 복잡해졌네.”

시련의 내용을 정리하며 여성이 있는 방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방 안에 들어간 난 우선하여 처리할 것부터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 시련에서 어떻게 움직일지 생각하는 건 조금 미뤄두자고 결정하자마자 ‘퀴네에’를 벗고 박다현을 불렀다.

“박다현 헌터, 혹시 아까 전 헌금함이 있던 방 전체를 ‘이면’에 떼어 넣을 순 없어?”

“통째로?”

“응, 부탁 좀 할게. 지금 바로 헌금함이 있던 방으로 돌아갈 테니까 ‘이면’에 넣어줘. 급하니까 거기 있던 여성 신도도 함께 ‘이면’에 가둬도 상관없어.”

시련의 승패는 헌금함에 모인 금의 무게에 따라 갈린다. 중요한 건 수중에 금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건, 7일째 되는 날에 헌금함 안에 들어 있지 않으면 의미 없다는 거다. 즉, 강경파의 헌금함을 보유한 채 주둔지로 돌아간 뒤 온건파의 헌금함까지 챙기면 어느 세력을 시련에서 이기게 만들지 조율할 수 있게 된다는 소리다.

그런 판단하에 박다현에게 헌금함을 ‘이면’에 넣어달라고 부탁한 거였다.

부탁한 뒤, 곧장 헌금함이 있던 방으로 돌아갔다. 다행히도 아직 강경파 세력이 움직이기 전인 듯 헌금함 근처엔 여성 신도뿐이었다.

거울 조각을 앞으로 내민 채 박다현이 이 공간 전체를 ‘이면’으로 옮기길 기다렸으나 한참이 지나도 주변은 일렁거리질 않았다. 대신 눈앞에 글자가 새겨졌다.

「헌금함은 플레이어 개인이 소유할 수 없어요.」

「불 외의 수단으로 파괴할 수도, 억지로 힘을 써서 옮길 수도 없다는 점 알아두세요.」

[‘절름발이 공돌이’님이 자신의 작품을 무시하면 큰코다치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내 수를 읽힌 기분이 들어 글씨를 보자마자 욕설부터 나왔다.

“불로 태우는 것 외에 헌금함을 어떻게 할 순 없다는 거지?”

시련 시작 직후 헌금함을 발견한 이점을 살릴 다른 수를 생각해보려는데 이화가 다급히 말했다.

“오빠, 밖에서 이상한 소리 들리는 것 같은데?”

귀를 기울이니 희미한 발소리가 들렸다. 희미한 발소리는 점차 커졌다. 누군가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 헌금함을 확인하러 오는 듯했다.

“누구 오기 전에 바로 식당으로 이동할게.”

‘퀴네에’를 쓴 채라 이곳에 누가 오든 상관은 없었으나, 슬슬 주둔지에 돌아가야 하긴 했다. 시련이 시작되었는데도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자가 분명 생길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거울 조각을 바라보았는데 눈앞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허락을 구하고자 물은 것이 아니라 선전포고였던 건지 곧 내 몸은 거울 조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식당 안쪽 방에 놓인 거울 조각을 통해 ‘이면’에서 빠져나왔을 땐, 다행히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퀴네에’를 벗고 밖으로 나가니, 테이블이 손님들로 가득 찬 상태였다. ‘신야’라 주문이 많았던 듯 방에서 나오는 날 본 한성수는 카운터에 선 채 피곤한 기색으로 인사했다.

“‘검은 숲’에 가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언제 방으로 복귀하셨습니까?”

“방금 왔어. 방금. 주문 밀린 거 있어?”

“없습니다.”

“제일 바쁠 때, 자리 비워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예약받았던 음식을 모두 만들어 두고 나가신 덕분에 문제없었습니다.”

며칠 밤을 새우며 ‘레시피’로 여러 음식을 만들어 둔 게 빛을 발해 영업에 문제는 없었던 듯하다. 그래도 한성수에게 일을 떠맡긴 셈이니, 이 건은 나중에 제대로 사례해야겠다.

“시련 내용은 봤어?”

“네. 봤습니다. 그래서 다들 분위기가….”

한성수의 말을 듣고 보니 식당 분위기는 생각보다 더 침울했다.

신야가 지나서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시련이 재개되어서인지 다들 조용히 얼마 남지 않은 음식을 끄적일 뿐이었다.

손님들 분위기를 살피는데, 문득 보여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챘다.

일행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 원정을 나간 것도 아닌데 몇몇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동현이 형, 혹시 여기 없는 사람들은 어디 갔어요? 대장간에라도 간 거예요?”

가장 가까이에 앉은 동현이 형에게 물으니, 렉스의 영지로 갔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렉스의 영지요? 거긴 왜…. 시련 때문에 간 거예요?”

“그런 셈이지.”

동현이 형이 덧붙인 말에 따르면 시련이 공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렉스 영주의 사신이 주둔지에 방문했다고 했다. 사신은 중립 지역을 대표하는 자를 본인의 영지로 보내달라는 영주의 말을 전했고, 그에 따라 몇 명이 차출되어 렉스의 영지로 향하게 되었다.

수인 쪽에서 차출된 자는 촌장인 토끼 수인과 여우 수인이었고 인간 쪽에서는 주인장과 김아람이 차출되었다. 거기에 더해 곰 수인과 이나은이 호위로 따라붙었고, 렉스 영주의 특별 요청으로 수연이까지 따라가게 되어 자리를 비우게 된 것이었다.

“수연이는 왜?”

“누구 좀 치료해달라고 부탁해서.”

“치료요?”

“자세한 이야기는 못 들었어. 상황이 급한지라 서둘러 렉스의 영지로 떠났거든.”

하기야 상대 세력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움직일 요량으로 시련이 시작되자마자 렉스 영주가 사신을 보낸 거였겠지.

“그럼 그쪽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네. 오빠, 우리도 밥이나 먹자. 저녁 아직 못 먹었잖아. 다현이도 배고파 보인다.”

한강 이남에 있었던 우리가 다른 세력에 속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일단 숨기려는 건지 이화는 태평하게 식사를 요청했다. 우리가 성에 간 것은 이나은을 제외하곤 아무도 모르고 있으니, 당분간은 상황을 살피면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생각해두어야 할 것 같다.

어차피 앞으로의 방침을 정하기 위해선 온건파의 가장 큰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렉스 영주가 본인의 세력을 어떻게 움직일지도 알아두어야 한다. 렉스의 영지에서 진행되는 회의가 끝나면 일행에게 온건파의 방침을 들을 수 있을 테니, 일단은 회의가 끝나길 기다리며 시간을 버는 게 맞는 것 같다.

“알았어. 뭐 먹고 싶은데? 바로 해줄게. 아! 그리고 동현이 형, 혹시 우리 쪽 헌금함이 어디 생겼었더라? 글씨 새겨진 걸 깜빡 못 읽고 놓쳤네.”

“국립중앙박물관 한가운데에 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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