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철상지옥 (2)]
온건파의 헌금함 위치를 알아낸 후, 요 며칠간 밤을 새워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방 안에 들어갔다. 렉스의 영지로 간 일행이 돌아오면 깨워달라고 부탁했으니 당분간 방에 들어올 사람은 없을 거다. 그걸 알면서도 혹시 몰라 방문을 단단히 잠갔다. 억지로 문을 부수고 들어올 수야 있겠지만, 그래도 시간을 조금이나마 벌어줄 순 있을 거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 곧바로 궁중 식도를 꺼냈다.
“혹시 모르니 확인은 해봐야겠지?”
이후 망설임 없이 식도를 휘둘렀다.
[죽음의 경계로 이동합니다.]
***
“…아프네.”
팔목에서 열기와 함께 느껴지던 극심한 통증이 사라질 때쯤, 초월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죽음에 대한 감상이 고작 그게 다인가?」
“듣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보지?”
「자네의 영혼이 점차 마모되는 게 느껴져서 그렇다네.」
“영혼? 하기야 당신 같은 초월자도 존재하는 마당에 영혼이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네. 영혼이 마모되면 안 좋은 점이라도 있나?”
「…없지는 않지.」
없지는 않다고? 설마 영혼이 완전히 마모된다면 내 존재 자체가 소멸하거나, ‘CONTINUE?’ 특성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라도 생기는 건가? 정말 그렇더라면 큰일이다.
「그럴 일은 없을 거니 걱정하지 말게.」
「그래도 거듭되는 죽음으로 언젠가 자네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고 나면, 그땐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만 알아두게나.」
이유에 관해선 말해주지 않지만, 저렇게 강조하는 걸 보니 뭔가 있긴 한가 보다. 주의하긴 해야겠다.
「그리고 귀환 시 시련이 시작되기 전으로 돌아갈 것을 기대하고 ‘죽음의 경계’에 방문한 것 같은데, 기대에 부응해주지 못해 미안하게 되었네.」
“뭐?”
「지금 상황에서 자네가 이번 시련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지켜보는 편이 더 큰 즐거움을 안겨줘서 말이지.」
“잠깐!”
[CONTINUE?]
[최근 저장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
눈을 깜빡인 순간, 일전의 방이 보였다. 손에는 궁중 식도가 들려 있었다. 죽기 직전의 순간으로 돌아온 것이다.
“최근 저장 지점을 바꿔 줄 생각은 없는 것 같네.”
결국, 과거로 돌아가 세력을 강경파에서 온건파로 바꾸는 것은 포기하고 누운 채 생각을 정리했다. 회사, ‘캠비온’, 삼촌 등의 문제는 일단 접어두고 당장 중요한 시련에 관해서만 집중했다.
시련의 클리어 조건은 단순했다. 헌금함에 타 세력보다 더 많은 금을 모은다. 그러나, 그 단순한 조건 속엔 메인 MC의 간계가 섞여 있었다.
“굳이 세력을 나눴다는 건, 서로 견제하며 어떻게든 더 많은 금을 헌금하게 하기 위함일 거고.”
일정 무게 이상 금을 헌금하는 조건이 아니라 타 세력보다 더 많이 헌금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인 것은 양측이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며 더 많은 금을 헌납하게 만들기 위해서일 게 틀림없다.
“그리고 헌금함을 파괴할 방법을 하나라도 남겨두었다는 건 여차하면 상대방 세력의 헌금함을 파괴하라는 거겠지.”
시련을 설계한 자에게 혀가 내둘러지는 부분은 헌금함을 파괴할 방법을 딱 하나 남겨두었고, 그를 플레이어 모두에게 일러주었단 거다.
반대 세력의 헌금함을 파괴하면 그들의 모은 금의 양은 자연스레 0이 된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수중에 금이 부족하더라도 시련을 클리어할 수 있게 된다. 즉, 반대 세력의 헌금함을 파괴하는 것이 이번 시련에서의 필승법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문제는 성에 있던 헌금함을 파괴하면 나랑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이 위험해진다는 거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헌금함을 파괴하면 나머지 일행들이 위험해진다는 거네.”
하필 자정을 넘긴 시간까지 거기 있었던 탓에 이도 저도 못 하는 처지가 되었다. 위치에 따라 팀이 정해지는 시련일 수도 있다고 미리 생각했더라면. 조금만 더 깊게 생각했더라면 자정이 되기 전에 식당으로 돌아왔을 거다. 이전에 위치에 따라 팀이 정해진 시련이 여럿 있었는데, 왜 이번에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어찌 되었든 세력은 갈렸고. 죽음 이후 귀환하는 방법도 통하지 않는 이상 이를 되돌릴 방법도 없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의 최선을 생각해야 할 때다.
그나마 다행인 건 동생과는 같은 세력에 속했다는 거다. 최악의 경우엔 둘만이라도 시련을 클리어할 수 있도록 판을 짜야 할 것 같다. 엔간해서는 일행 모두에게 좋은 방향으로 가고 싶지만…. 최선의 경우가 존재한다면, 일행 모두가 시련을 클리어하게 만들고 싶고.
“그런 게 가능하려나.”
이번 시련에 빈틈은 존재하지 않는지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밤이 지나갔다.
“벌써 아침이네.”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뻐근해진 몸을 풀었다. 나도 모르는 새에 밤을 꼬박 새운 셈이라 온몸이 배겼다. 그래도 밤을 새운 게 후회되진 않는다. 덕분에 일행 모두가 시련을 클리어할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방법은 마련됐고, 다음은 그 방법을 어떻게 실행하느냐인데….”
문제는 내가 생각한 방법은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는 실행하기 어렵단 거다. 여기서 말한 다른 이들은 우리 주둔지 일원 정도가 아니다. 적어도 렉스의 영지 내 일원 전체의 힘 정도는 빌려야 실행할 수 있어 보인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말했다간 렉스 영주는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내게 호감이 있더라도 영주란 직책에 있는 이상 이 방법을 실행에 옮기긴 힘들 거다.
또다시 부딪힌 난관을 해결할 수단을 생각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자 렉스의 영지에 파견되었다 돌아온 이나은이 있었다. 회의가 밤새 이어진 모양인지 엄청 피곤해 보였다. 그래도 이나은은 나를 보자마자 회의 때 나왔던 이야기부터 들려주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오늘로부터 3일 뒤. 강경파의 헌금함을 파괴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강경파에서 온건파의 헌금함을 파괴하러 올 수도 있으니 일별로 경비를 세우기로도 했고요. 저희 일행도 강경파와의 전면전을 준비할 사람하고 온건파 측 헌금함을 경비할 사람을 나누어야 해요.”
길었던 회의 내용을 요약한 이나은은 방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당연하게도 이 시간에 식당 내에 있는 사람은 우리 일행뿐이었다.
“…라고 밖에 사람들에게도 전해줬는데,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잖아요. 정현 헌터랑 정이화 헌터, 그리고 박다현 헌터까지 강경파 세력에 속하게 되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혹시 몇이나 돼요?”
“지금 아는 바로는 네가 다야.”
“그러면 거기서 세 명만 더 추가해주세요.”
“세 명?”
“네. 이젠 임수연 헌터랑 김아람 헌터, 신혜진 헌터까지 그 사실을 알고 있거든요.”
이나은은 어쩔 수 없었다며 회의 전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해주었다.
“렉스의 영지로 가면서 저희끼리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간단하게 이야기했거든요.”
그때, 수연이는 근심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고 했다.
‘한강 이남에 반드시 인간을 싫어하는 수인들만 있는 건 아닐 텐데…. 인간하고 사이좋게 지내려는 수인도 있을 거고. 어딘가 숨어 있는 인간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도 시련을 클리어하기 위해선 강경파보다 더 많은 금을 헌금할 수밖에 없다고 주인장이 이야기하는 순간, 수연이가 색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아니에요. 두 세력이 똑같은 양의 금을 헌금하면 모두가 시련을 클리어할 수 있을 거예요.’
김아람이 그랬다간 양 세력 모두 시련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고 반박했으나 수연이는 시련에 참여하는 플레이어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 시련 주최 측이 양 세력 전부가 탈락하도록 만들진 않을 거라고 답했다.
“그때 저는 정현 헌터가 강경파에 속한 걸 알고 있었으니까, 임수연 헌터의 말에 ‘이거다!’ 하고 눈이 뜨인 기분이더라고요. 그전까진 양 세력 모두가 시련을 클리어하게 만들면 된다는 생각을 못 했거든요. 다만, 문제는.”
“문제는 양쪽 세력이 같은 양의 금을 헌금하기로 협의 볼 수 있냐는 거지.”
내 대답에 이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밤새 내가 생각해낸 방법도 출발은 저 지점에서 했다. 어느 한쪽만 이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시련을 클리어하게 만든다면 일행 모두 실패 페널티를 받지 않을 수 있다. 그 방법으로 나 역시 같은 양만큼 금을 모으는 걸 떠올렸으나, 곧 양 세력이 일주일 내에 합의점을 찾도록 만들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에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돌렸다.
“그래서 좀 더 이야기하다 보니 김아람 헌터가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냈어요. 생각보다 간단한 방법이 있더라고요. 그냥 양쪽 헌금함을 전부 불태우면 될 뿐이었어요.”
내 생각과 일치했다. 양쪽 헌금함을 전부 불태우는 건 딱히 합의가 필요하지 않다. 무력이나 지력을 행사해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는데.”
“우리보다 렉스 영주의 세력이나 한강 이남 수인 세력이 더 크다는 거지?”
“네. 모두가 시련을 클리어하자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면, 헌금함을 불태우지 못하도록 막을 게 뻔하니까요. 그래서 김아람 헌터랑 신혜진 헌터도 어쩔 수 없다며 우리 온건파만이라도 시련을 클리어하자고 임수연 헌터를 다독였어요. 하지만 그래서야 안 되잖아요. 저희 일행 중에 강경파에 속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때 말한 거예요.”
이나은은 나와 이화, 그리고 박다현이 한강 이남에 내려가 있어 강경파에 속했다고 말하며 도움을 청했다고 했다. 우리가 강경파에 속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셋은 양측 헌금함을 전부 불태우는 방향으로 회의를 이끌어갈 수 없는지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렉스 영주는 강경파의 헌금함을 불태우지 않는 이상, 온건파의 헌금함을 불태우지 못하도록 할 것 같고. 한강 이남의 수인 세력도 온건파의 헌금함을 불태우지 않는 이상, 강경파의 헌금함부터 불태우지 못하도록 막을 것 같은 거예요. 그렇다고 렉스 영주한테 저희 일행 중 몇 명이 강경파에 속했다고 말해봤자 본인의 세력부터 우선시할 게 뻔했고요.”
그때부터 일행 자력으로 양쪽 헌금함을 불태우는 방법에 관해 다 같이 머리를 굴렸다고 했다. 그 결과, 김아람이 생각해낸 방법은 다음과 같다.
렉스 영주에게는 시련을 확실히 클리어할 수 있도록 온건파의 헌금함을 지키며 상대측 헌금함을 불태우는 걸 제안한다. 이후, 전면전을 통해 강경파의 헌금함을 불태운 뒤 온건파의 헌금함을 지키도록 미리 배치된 일행 중 한 사람이 온건파 헌금함마저 불태운다.
“회의 때 김아람 헌터가 상대측 헌금함을 불태우자고 제안했어요. 옆에서 신혜진 헌터도 거들어주니까, 렉스 영주도 주민들에게서 금을 모으는 것보다야 이게 낫겠다며 제안을 승낙했어요.”
렉스 영주는 강경파가 언제 헌금함을 불태우러 올지 모르니 차라리 먼저 공격을 펼치는 게 좋겠다며 3일 뒤 전면전을 강행하기로 정했다고 했다.
“전면전에서 강경파의 헌금함을 불태우고, 이후에 온건파의 헌금함을 불태우면 저희 일행 모두가 시련을 클리어할 수 있게 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