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37화 (138/168)

[23. 철상지옥 (3)]

양측 헌금함을 모두 불태워야 한다는 생각까진 했지만, 어떤 방식으로 실행에 옮길진 결정 못 한 상태였기에 김아람을 필두로 한 넷의 책략과 실행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참, 혹시 성에 가 있을 때 강경파 쪽 헌금함에서 솟아난 빛 보셨어요?”

“어. 헌금함 실물까지 눈앞에서 봤어.”

성 내부를 그린 약도에 이화가 헌금함 위치도 표시해두었을 것이라 덧붙이자 이나은은 일이 한결 편해졌다며 만족해했다.

“헌금함 위치를 알면 인원 분배 마치는 대로 저희끼리 자세한 작전 짤 수 있겠네요. 일단 밖에 나가죠.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이나은을 따라 방 밖으로 나섰을 땐, 일행은 각자 하나씩 자리를 차지한 채 김아람의 말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대충 들어보니 렉스의 영지에서 있었던 회의 내용에 따라 인원을 분배하는 듯했다. 손짓까지 동원하며 열심히 이야기하던 김아람은 밖으로 나온 우리를 보았는지 말을 끊었다.

“방금 제가 말한 대로 인원을 나누면 될 것 같긴 한데….”

김아람은 잠깐 고민하더니 금세 말을 이어갔다.

“정현 헌터님이랑 이나은 헌터님도 오셨으니 인원 분배 부분 다시 한번 정리해 드릴게요.”

김아람은 일행을 총 세 그룹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전면전에 나설 그룹.

여기에 포함된 인원은 김화영, 이나은, 그리고 이화까지 총 세 명이었다. 전면전에 나서는 인원이 생각보다 적은 데에 의아해하자 김아람은 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전면전에 참여하는 인원으로 우리 일행이 배정받은 자리가 세 자리밖에 안 된다고 했다.

“왜 그렇게 적게 배정받은 거야?”

“렉스 영주님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이래요.”

‘강경파 세력의 구역과 상대적으로 가까운 중립 구역의 경우엔 주둔지 방비에 더 많은 힘을 쏟을 수 있게 배려하겠네.’

중후한 렉스 영주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답변한 김아람은 나머지 두 그룹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나머지 두 그룹 중 하나는 헌금함을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했는데 여기엔 김아람, 노인, 그리고 동현이 형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지막 그룹은 강경파 측 헌금함을 파괴하지 못했을 경우를 대비하여 금을 수집하며 주둔지를 방어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고, 이 그룹에는 나 포함 박다현과 수연이, 그리고 한성수가 속했다.

듣고 나니 왜 이런 식으로 인원을 나누었는지 대충 느낌이 왔다.

강한 전력을 최대한 전면전에 배치하고, 다음으로 강한 전력을 헌금함 방어에 배치한 후 나머지 비전투원 인원들과 그들을 지킬 한성수를 주둔지 방어에 배치한 게 분명했다.

강경파 측 헌금함을 파괴한 뒤, 온건파 측 헌금함까지 파괴하기 위해 나름대로 신경 써서 배치했단 것도 느껴졌다.

온건파 측 헌금함을 방어하는 인원들의 저항을 뿌리치고 그를 부수기 위해선 나름대로 강하면서 우리 남매와 박다현이 강경파 측에 속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배치되어 있어야 한다. 그에 해당하는 인물로 김아람 본인을 헌금함을 방어하는 그룹에 배치한 것일 테다.

여기까지만 보면 꽤 괜찮은 배치다.

하지만 이번 시련을 클리어하기 위한 전제 조건인 ‘일주일 내에 양측 모두의 헌금함을 파괴한다’를 달성하기엔 살짝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의견 좀 더해도 될까?”

설명을 끝마친 김아람을 향해 말하니 그녀는 얼마든지 괜찮다고 답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 것을 본 뒤, 일행 모두를 향해 말했다.

“우선 이것부터 말해드려야 할 것 같네요. 현재 한강 이남에는 회사 측 인물들이 숨어들어와 있어요.”

인원 분배에 관한 의견을 더할 줄 알았는지 회사 관련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몇몇 사람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확하게는 사이비 종교 단체 사람들하고 정성훈 헌터가 와 있어요.”

잠깐이나마 조용했던 회사가 다시 움직인 데에 놀란 사람들 사이에서 김아람은 내 말의 포인트를 정확히 집어냈다.

“정성훈 헌터가 와 있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그 사람, 지금 감옥에 갇혀 있잖아요.”

“아니.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은 정성훈 헌터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

이후 삼촌의 정체를 비롯하여 회사와 엮인 일들에 관해 들려주었다.

“결론적으로 저랑 이화, 박다현 헌터는 ‘렙틸리언’ 정보상의 성에서 조사를 이어가다가 그만 강경파에 속하게 되었어요.”

세력이 갈라지게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듣고 난 일행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새로 알게 된 정보를 정리 중인지 시선을 내린 채 중얼거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회사가 다시 등장했다는 사실에 치를 떠는 사람도, 우리가 강경파에 속했다는 사실에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편, 이화는 내가 무슨 목적으로 지금 이 이야기를 한 건지 먼저 확인하기로 마음먹은 듯 입을 굳게 다문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와중, 김아람이 다시 화두를 이끌었다.

“그래서 제가 인원 분배를 저렇게 한 거였어요. 저희 일행 모두가 시련을 클리어하는 방법이 하나 있거든요.”

일행 전원이 시련을 클리어할 방법이 있다는 말에 다시 모두가 김아람에게 집중했다.

“우선 전면전에서 승리한 다음 정이화 헌터님의 불을 이용해서 강경파 측 헌금함을 파괴할 거예요. 그러고 나면 김화영 헌터님께서 스킬을 사용해서 정이화 헌터님을 온건파 측 헌금함이 있는 곳으로 이동시킬 거고요. 그런 다음 곧바로 헌금함을 방어하기 위해 배치되었던 저희 일행과 합류해서 온건파 측 헌금함까지 파괴하는 거죠.”

이어 양측 헌금함이 모두 파괴되면 초월자들은 다음 시련을 위해서라도 플레이어 모두를 살려둘 것이란 설명을 덧붙이자 이견은 없었는지 다들 김아람의 작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양측 헌금함을 전부 파괴해야만 하는 상황을 일행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었는데 생각대로 잘 풀렸다. 그에 만족해하니 노인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모르는 새에 그런 사정이 있었구먼. 그런데 자네, 의견을 더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네. 양측 헌금함을 모두 부순다는 작전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선 인원 배치를 변경할 필요가 있거든요.”

내가 제시한 인원 배치는 다음과 같다.

전면전에 참여하는 인원은 동현이 형, 박다현, 그리고 이나은.

헌금함을 방어하는 인원은 김아람, 노인, 그리고 한성수.

마지막으로 주둔지 방어를 맡는 인원은 김화영과 나, 수연이, 그리고 이화다.

새로운 인원 배치를 말하자 김아람이 이의를 제기했다.

“작전의 핵심은 헌금함을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지닌 정이화 헌터님과 강경파 측 헌금함이 파괴된 즉시 온건파 측 헌금함 앞까지 이동할 수 있는 스킬을 지닌 김화영 헌터님이에요. 그런데 그 두 분이 전면전에 참여하지 않고 주둔지 방어를 맡다뇨?”

“김아람 헌터의 말이 맞아. 그 둘이 이번 작전의 핵심이지. 그래서 더더욱 주둔지 방어를 맡아야 하는 거야.”

김아람이 이야기한 작전의 순서는 이렇다.

전면전에서 승리한다.

이화가 강경파 측 헌금함을 파괴한다.

김화영의 스킬로 이동한 이화가 온건파 측 헌금함마저 파괴한다.

이 순서대로 작전이 온전히 진행되기 위해선 한 가지 제약이 붙는다. 그건 바로 전면전에서 승리하는 것.

하지만 렉스 영주의 세력과 한강 이남의 수인 세력의 정확한 전력을 모르는 이상, 전면전이 며칠 내에 우리 측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곤 장담할 순 없다. 어쩌면 시련이 끝날 때까지 전면전이 끝나지 않을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엔 우리 측의 패배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런 불확실한 가능성에 작전의 성패를 걸 순 없다.

“전면전에 참여하거나 온건파 측 헌금함을 지키는 인원들에 비해서 주둔지를 방어하는 인원들한테는 시선이 덜 쏠릴 거야.”

“그렇겠지? 상대적으로 이번 시련에서 덜 중요한 역할인 건 맞으니까 아무래도 오빠 말대로 시선이 덜 쏠리겠지.”

“시선이 덜 쏠린다는 말은 다시 말해 남들 눈을 피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거야.”

그제야 내가 무슨 생각으로 새로운 인원 배치를 제시한 건지 눈치챈 듯 김아람과 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초안에서 살짝 수정한 작전을 설명하는 동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인원 배치를 확정 짓고 작전까지 짠 뒤, 나는 대장간으로 출발했다. 주인장과 지은정 측이 짠 인원 배치를 듣기 위함이었다. 렉스의 영지까지 가 회의에 참석한 사람 중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밤을 새운 터라 일단 재우고 김화영과 이화와 함께 대장간으로 향하게 되었다.

“회사에서 벗어난 분들의 인원 배치랑 우리 인원 배치를 합쳐서 촌장님께 알려드려야 하는 거지?”

내 물음에 이화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 주둔지의 촌장인 토끼 수인은 성격이 워낙 독특해서 엔간해선 마주하고 싶지 않았는데. 벌써 걱정이 앞선다.

걱정을 안고 대장간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 우리를 멈춰 세웠다.

우리를 멈춰 세운 건 여우 수인이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우리를 멈춰 세운 여우 수인은 근처 숲으로 들어가더니 그늘진 곳까지 우리를 데려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며 무언가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무슨 일 있냐는 이화의 물음에도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댈 뿐, 별다른 설명 없이 조금 더 깊숙한 숲속으로 이동했다.

여우 수인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여 햇볕조차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우리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방금 촌장님 앞으로 서신 하나가 전달되었어.”

“서신?”

김화영에게서 다소 큰 목소리가 나오자 여우 수인은 다급히 자신의 꼬리를 휘둘러 그녀의 입을 막으며, 손에 들린 양피지 하나를 내게 건넸다.

양피지에는 해석할 수 없는 문자가 잔뜩 쓰여 있었다. 수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듯했다.

통역 특성은 대화에만 적용된다는 것은 여우 수인도 알 터. 그런데도 이런 으슥한 곳까지 데려와 양피지를 보여준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 듯했다.

“무슨 내용이에요?”

“강경파와 온건파에 속한 모든 인간을 죽인다고 약속하면, 양 측 헌금함에 같은 양의 금을 넣을 것을 약속함.”

“네?”

“서신을 전달한 수인 무리는 한강 이남 수인 세력 소속. 현재 그 수인 무리는 촌장님께 서신을 전달한 뒤, 렉스의 영지 쪽으로 이동했어.”

여우 수인이 서신 내용과 함께 그를 전달한 무리에 관해 말해주자 사태의 심각성이 확 느껴졌다.

“그 말은….”

“정현 씨의 VIP 고객님이 자신 영지의 수인들을 무척이나 아낀다는 건 이 근방에 사는 수인이라면 전부 알 거야. VIP 고객님과 연관된 항간에 떠도는 소문도 전부 그와 관련된 내용이고. 정현 씨 정도면 VIP 고객님께 이 서신이 전달된다는 게 위험하다는 걸 잘 알겠지?”

여우 수인이 들고 있는 서신과 같은 내용의 서신이 렉스 영주에게 전달된다면. 어쩌면 그는 전면전을 벌이지 않고도 영지 수인들을 최대한 지키며 시련을 클리어할 방법을 택할 수도 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