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철상지옥 (4)]
한강 이남 수인 세력에서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렉스 영주의 세력과 한강 이남 수인 세력이 힘을 합쳐 모든 인간을 제거하러 나선다면, 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는 것 외엔 다른 방도가 없을지도 모른다.
“정현 씨, 지금 여유롭게 돌아다닐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여우 수인의 말대로 주인장과 지은정을 만나러 갈 때가 아니었다. 주둔지를 떠난 수인 무리가 렉스 영주에게 서신을 전달하지 못하도록 막아야만 했다.
“서신을 전달한 수인 무리가 주둔지를 떠난 지 얼마나 됐어요?”
양피지를 돌려주며 묻자 여우 수인은 삼십 분쯤 지났을 거라고 답했다.
“…삼십 분이나 지났다고요.”
“정현 씨한테 한시 빨리 알려주고 싶었지만, 워낙에 주변 눈치가 보여서 말이지. 혹시나 이곳에 추이를 살피도록 남겨둔 수인이 있을지도 모르는 법이잖아.”
여우 수인을 비난할 의도는 아니었다. 토끼 수인에게 은밀히 전달되었을 이 서신에 관해 우리에게 알려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거다.
“오빠가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을 거예요. 저희한테 서신에 관해 알려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혹시 촌장님은 이 서신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아시나요?”
이화가 끼어들어 말뜻을 정정하고 궁금했던 것까지 언급해 주었다. 이화의 말에 여우 수인은 멋쩍은 듯 시선을 살짝 틀었다.
“아직 몰라.”
그러곤 내게 돌려받은 양피지를 갈기갈기 찢었다.
“이 서신은 촌장님께 전달된 적 없거든.”
여우 수인의 돌발행동을 본 우리 셋 모두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심지어 김화영마저 그녀의 행동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저 아래에 있는 도둑놈하고 손을 잡을 순 없잖아. 얼마 만에 생긴 돈줄인데, 잃을 수 없기도 하고. 내가 어떻게 이 서신을 촌장님께 보여드리겠어.”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한 여우 수인은 먼지처럼 잘게 찢어진 양피지를 바람에 날렸다.
“서신을 전달하러 온 수인은 정확히 다섯. A급 헌터 하나랑 B급 헌터 하나. 나머진 C, D급 헌터야. 그 정도면 정이화 양 혼자서도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겠지?”
“네? 네. 쓰러뜨릴 수 있죠.”
“A급 헌터는 대검을 주로 사용하고, 아틀라스 씨처럼 ‘신체의 강도’랑 ‘힘’ 스탯이 높아. B급 헌터의 주 무기는 석궁인데 ‘보호색’이란 스킬을 사용하니 저격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거야. 나머지 수인에 관해서는 딱히 말해줄 필요가 없을 것 같네.”
렉스의 영지로 떠난 수인 무리에 관한 정보를 줄줄 읊고 난 여우 수인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경고했다.
“렉스 영주님께 서신이 전달되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거야. 서두르는 편이 좋을걸? 참, 난 정현 씨네랑은 만난 적 없는 거야. 그럼 행운을 빌게.”
그 말을 남긴 여우 수인은 금세 숲속 어딘가로 모습을 감췄다. 그녀가 모습을 감춘 쪽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한 이화는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며 김화영의 스킬을 쓸 수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김화영 헌터, 지금 당장 렉스의 영지에서 가장 가까운 곳까지 이동할 수 있어요?”
“그 근처엔 남겨둔 표식이 따로 없어.”
“그럼 뛰어갈 수밖에 없겠네요.”
탄식을 내뱉은 이화는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
“주둔지에서 떠난 지 삼십 분 지난 거면 아직 렉스의 영지까지는 거리가 남아있을 거야. 김화영 헌터나 네가 최대한 빠르게 달려간다면 뒤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몰라.”
“뒤를 잡은 뒤엔 그놈들에게서 서신을 빼앗으면 되는 거지?”
“부탁할게. 서신이 전달되는 것만 막으면 작전에 변수는 없어.”
내 말에 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화영 헌터, 바로 출발하죠.”
“요새 별일 없다 싶었는데, 역시 현이랑 함께하자마자 이런 일이 생기네.”
이런 일이 생기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김화영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나도 ‘퀴네에’를 쓰고 최대한 빨리 쫓아가 볼게.”
“오빤 여기 남아있어도 되는데. … 남아있으라고 해도 남아있을 사람은 아니지. ‘퀴네에’ 썼더라도 조심해.”
잔소리를 끝으로 이화는 김화영과 함께 렉스의 영지 방향으로 달려갔다. 둘의 속도가 워낙에 빠른지라 내 눈으론 그들의 움직임을 쫓을 수 없었다.
렉스의 영지 근처에 다다르기 직전까지 김화영과 이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을 땐, 이미 한창 전투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앞서간 두 사람을 따라잡은 곳은 저 멀리 렉스의 영지로 들어가는 거대한 목재 방책이 살짝 보이는 지점. 다행히도 이 근방은 정식 통행로가 아니라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 있었고, 덕분에 방책을 지키는 경비들은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단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다만, 렉스의 영지와 가깝다는 이유로 이화가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화는 불과 얼음, 그 무엇도 사용하지 않은 채 오로지 순수한 힘만으로 적들을 상대했다. 이화가 본격적으로 힘을 쓰면 경비들이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건 시간문제다. 그렇게 되면 서신에 관해서 알려질 수도 있으니, 이화가 힘 조절을 하게 된 것 같다.
그래도 바닥엔 몇몇 수인이 쓰러져 있었다. 그 중엔 그을린 채 쓰러져 있는 고양이 수인도 있었다. 고양이 수인의 손에 활이 들린 것으로 보아 ‘보호색’을 쓰고 본인들을 저격하면 까다로우리라 생각하여 이화가 단숨에 처리한 것 같다. 그 옆에 쓰러진 나머지 두 수인은 김화영이 처리한 듯 목에 선명한 칼자국이 나 있었다.
“김화영 헌터, 나무 위로 도망친 수인 좀 맡아주세요.”
“오케이.”
여우 수인이 언급한 A급 헌터로 보이는 원숭이 수인과 이화가 힘겨루기하는 동안, 김화영이 나무를 타고 렉스의 영지 반대쪽으로 도망치려는 또 다른 원숭이 수인을 쫓았다.
재빨리 눈앞의 나무를 오른 김화영이 반대편 나무로 뛰어 원숭이 수인을 붙잡으려는 순간, 엄청난 진동이 울렸다. 그에 놀란 김화영이 미끄러져 바닥에 추락하자, 원숭이 수인은 숲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뭐야?”
다시 한번 진동이 울렸다. 이번엔 ‘우지끈’ 소리도 함께 들렸다. 이번엔 이화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니 동생과 힘겨루기하던 원숭이 수인이 코웃음 쳤다.
“역시 인간 놈이라 그런지 이 근방 지리에 익숙지 않은가 보군. 여긴 소란을 싫어하는 ‘라루가’의 영역이거든.”
그렇게 말한 원숭이 수인은 힘겨루기를 중단하고 양팔을 쫙 벌린 채 비명을 질렀다. 이화가 황급히 뻗은 우산이 원숭이 수인의 몸을 관통했음에도 그는 비명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비명에 이끌리듯 진동은 점차 가까워졌다. 무언가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라루가’? 처음 듣는 이름인데, 괴수인가? 대체 뭐가 오고 있는 거야?”
‘라루가’가 뭐가 됐든 일단 김화영을 향해 뛰어갔다. 꽤 높은 곳에서 떨어진 탓에 충격이 컸던지 김화영은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억지로 들쳐멘 채 비명을 지르는 원숭이 수인 쪽에서 최대한 멀어지려 노력했다. 별안간 공중에 뜬 자신이 신기하다는 듯 허공을 휘젓던 김화영은 곧 ‘퀴네에’를 쓴 내가 자신을 들쳐멨다는 걸 알았는지 얌전해졌다.
그 상태로 몇 분 뛰지도 않았는데 ‘라루가’가 나타났다.
[A급 괴수 ‘라루가’가 등장합니다.]
원숭이 수인이 언급한 ‘라루가’는 거대한 뿔이 난 고래의 생김새를 지닌 괴수였다. 다리도 없는 그 괴수는 지느러미로 유유히 허공을 헤엄치며 주변의 나무를 부러뜨리곤 곧장 원숭이 수인 쪽으로 향했다.
“너희 불결한 인간의 씨는 이 세상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사라질 거다!”
원숭이 수인은 증오 서린 외침을 끝으로 ‘라루가’의 거대한 뿔에 들이받혔다. 그 충격이 어찌나 컸던지 원숭이 수인의 몸은 원형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조각났다.
원숭이 수인 바로 뒤에 있던 이화도 하마터면 함께 뿔에 들이받힐 뻔했으나, 재빨리 우산에서 화염을 뿜어내 그 반동으로 뒤로 물러설 수 있었다.
[A급 괴수 ‘라루가’가 등장합니다.]
안심하기도 잠시. 곧 또 다른 ‘라루가’가 저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시야에 보이는 두 마리가 끝이 아닌지 진동은 사방에서 울려오기 시작했다.
이화와 둘이서 저 괴수들을 퇴치할 순 있겠지만, 더 상대할 수인 무리도 없고 굳이 여기서 시간을 버릴 필욘 없을 것 같다.
그런 생각으로 ‘퀴네에’를 벗고 이화를 불렀는데 동생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왜 그래?”
표정이 굳은 이화는 ‘라루가’ 무리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동생이 바라보는 방향은 오히려 그 반대 방향, 렉스의 영지 쪽이었다. 동생이 바라보는 쪽엔 중무장한 수인 여럿이 각자의 무기를 겨눈 채 서 있었다.
별안간 사열 종대로 늘어선 수인들이 일제히 반걸음씩 이동해 가운데 틈을 살짝 벌렸다. 그리고 그 틈으로 렉스 영주가 걸어왔다. 평소 식당에 올 때와는 달리 지금은 로브를 쓰지 않아 용 수인의 늠름한 겉모습이 드러났다.
행렬 제일 앞으로 나선 그는 차분히 우리 쪽으로 다가오더니 입을 손으로 가렸다.
“‘라루가’는 시력이 나빠 소리만으로 헌터의 위치를 감지한다네. 조용히 이곳을 빠져나간다면 우릴 건드리지 않을 걸세.”
‘라루가’의 약점을 알려준 그는 몸소 시범 보이듯 행렬을 이끌고 조용히 숲을 빠져나갔다. 실제로 렉스 영주의 언급 이후 기척을 죽이니 ‘라루가’ 무리는 유유히 주변을 떠다닐 뿐, 직전까지 보이던 성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렉스 영주의 행렬이 완전히 숲에서 빠져나간 뒤, 손짓을 동원하여 우리도 조용히 이곳에서 벗어나자는 신호를 보냈다. 신호를 이해했는지 김화영과 이화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나와 함께 숲에서 빠져나왔다.
숲에서 빠져나오니 렉스 영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들, 여기까지 와서 무얼 하고 있던 건가?”
나무라는 듯한 그의 물음에 내가 나섰다.
“전면전을 앞두고, 저희 주둔지의 대장장이가 급하게 필요하다고 한 재료를 얻기 위해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라루가’의 영역까지 말이지? 그럼 우리가 방해한 셈이 됐군. 자네들이 ‘라루가’를 퇴치하기 위해 온 줄은 몰랐다네.”
“아닙니다. 저희도 저렇게 많은 ‘라루가’를 상대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라루가’의 시력이 나쁘다는 사실도 몰랐으니, 렉스 영주님이 아니었다면 큰일이 날뻔했습니다.”
“다행이군. 그럼 함께 성으로 돌아가지. 노곤할 텐데 피로라도 풀고 가게나.”
본인의 성으로 이동하자는 말에 거절의 뜻을 밝히려고 할 때, 렉스 영주는 미소와 함께 한 마디를 덧붙였다.
“거절할 생각은 말게. ‘라루가’의 영역에 쓰러져 있던 다른 수인들에 관해서도 답해야 하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