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39화 (140/168)

[23. 철상지옥 (5)]

그 뒤로 렉스 영주는 본인의 성에 돌아가기 전까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건 성의 응접실에 다다랐을 때다.

“로스도만 남고 나머진 물러가게.”

렉스 영주의 명령에 호위하던 병사들은 하나둘 응접실 밖으로 나갔고, 개 수인 하나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 로스도와 우리 일행만이 응접실에 남게 되자 렉스 영주는 그 즉시 의자에 늘어졌다. 그러곤 나른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넸다.

“오늘 자네와 이곳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군.”

“언젠간 그런 날이 오리라 생각했지만, 그날이 오늘일지는 저도 몰랐습니다.”

“평소처럼 말 편하게 하게나. 로스도, 이 친구는 이 몸이 자네 식당에 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지.”

그제야 개 수인이 평소 렉스 영주와 함께 식당에 왔던 동행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네 일행들이야 자네가 알아서 말조심시킬 거고.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자 만족한 듯 렉스 영주는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맘 같아선 자네를 성의 조리실로 데려가고 싶다만, 지금 그래선 안 되겠지. 사설은 이쯤에서 그만두고 바로 묻겠네. 그 수인들은 어째서 그런 곳에 쓰러져 있던 거지?”

렉스 영주는 너그러운 미소를 지은 것과는 달리 곧장 속을 후벼파는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에 어떻게 답변할지 고민하는데 렉스 영주가 개 수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개 수인이 자신의 품에서 양피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당연하게도 거기에 적힌 문자를 읽을 순 없었다. 하지만 어떤 내용이 적혀있는지는 금방 유추할 수 있었다.

개 수인이 들고 있는 양피지의 재질이나 색깔은 일전에 여우 수인이 보여줬던 양피지의 것과 완전히 일치했다. 저건 한강 이남 수인 세력에서 전달한 서신임이 틀림없었다.

렉스 영주와 만나기 전에 수인 무리를 뒤따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김화영과 이화가 그들을 만난 시점은 이미 서신이 렉스 영주에게 전달된 후였던 것이었다.

일이 틀어진 상황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고민하는 와중, 이화가 나 대신 입을 열었다.

“저희는 그자들에게 습격당했습니다.”

“습격당했다?”

“그렇습니다. 마치 저희가 그곳에 오기만을 기다렸던 마냥, 어둠 속에서 먼저 공격을 가했습니다. 저희는 그에 반격했을 뿐입니다.”

“역시 그랬나.”

앞뒤 정황을 살펴보면 우리가 왜 그런 곳에서 수인 무리와 싸우게 되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서신이 전달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가 왔다는 걸 렉스 영주도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그는 이화의 말에 수긍해주었다. 근심 어린 표정을 미루어 보아 진심으로 수인 무리가 먼저 우리를 습격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혹시 거짓을 고했을 수도 있으니, 이것만은 확실히 하겠네. 자네 일행이 서신 전달되는 걸 막으러 왔다는 것쯤은 이 몸도 알고 있다네. 다시 한번 묻지. 정말로 그자들이 먼저 공격을 가했나?”

“그렇습니다.”

뒤늦게 전투가 벌어진 현장에 도착한 터라 당연히 김화영과 이화가 먼저 수인 무리를 공격했겠거니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니. 나 역시 렉스 영주와 마찬가지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자들은 이 몸에게 거절의 뜻을 전달받고 주둔지로 돌아가던 중이었네. 서신을 지킬 이유도 없어진 건데, 굳이 이 몸의 영지 근처에서 자네 일행을 먼저 공격했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거절의 뜻을 전달받았다고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되묻자, 렉스 영주는 뭐가 잘못되었냐는 듯 나를 응시했다.

“이 몸은 그자들에게 거절의 뜻을 명확히 밝혔네. 이번 시련에서 협력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이지. 인간일지라도 영지에서 지내는 이상 이 몸의 주민이란 건 변함없네. 당연히 이 몸은 그자들을 지켜야만 하지. 영지의 주민들조차 지켜내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서 모든 편의를 누릴 이유가 없지 않나?”

렉스 영주의 말은 감탄을 자아냈다. 덕분에 서신에 관해서는 안심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모든 의문이 풀린 건 아니었다.

“그럼 수인 무리는 왜 먼저 공격해 온 걸까요?”

“뭔가 걸리는군. 서신을 전할 때에도 별달리 이 몸을 설득하려는 기세가 없어서 찝찝했건만. 어쩌면 처음부터 별도의 목적을 가지고 이 몸의 영지에 접근한 걸지도 모르겠군.”

비늘을 꼿꼿이 세운 렉스 영주는 그 즉시 개 수인에게 명령을 내렸다.

“로스도, 지금 당장 그자들의 진의를 조사해보게.”

그러곤 우리에게 물러나도 된다고 허락했다.

“자네들은 이만 돌아가도 좋네. 무언갈 대접하고 싶지만, 그건 다음으로 미루어 두지. 시련이 끝난 후에 따로 자네들을 불러 대접하도록 하겠네. 그땐 일행 전부를 데려와 주게나.”

“감사합니다.”

인사한 뒤, 나를 선두로 우리 일행은 응접실 밖으로 나섰다.

응접실을 나서는데 워울프가 통로 반대편에서 걸어왔다. 볼일이 있겠거니 하고 지나치려다 그자의 귓가에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잠깐만요.”

내 부름에 워울프는 의아한 듯 멈춰 섰다.

“난 그쪽을 처음 보는데, 누구지?”

그렇게 묻고 우리를 훑던 워울프의 표정이 바뀌었다. 험악한 인상을 푼 그는 뜬금없이 고개를 숙였다.

“자네들, 나를 치료해준 임수연 헌터의 일행이겠군. 임수연 헌터에게 이야기 들었다.”

전에 수연이가 볼일이 있어 렉스 영주에게 호출당했다더니, 이자의 치료를 위해서였나 보다.

“그녀의 치료엔 정말로 감사하고 있다. 치료가 아니었다면, 난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지 못했겠지.”

감사 인사를 받으며, 다시 한번 그자의 귓가를 살폈다. 역시 귓가에 난 베인 상처는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지금 눈앞의 워울프는 ‘렙틸리언’ 정보상에게 보고를 하던 워울프와 동일 인물이었다.

“온건파 측이 시련을 클리어할 수 있도록 함께 최선을 다해보자고. 물론 이번 시련에서 동포들과 갈라져 싸우게 되어 마음은 불편하다만…. 시련이 시작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워울프를 통솔하는 위치에 있는 자와 만났다는 확신이 생겨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어쩔 수 없는 건 아닐지도 몰라요.”

“무슨 뜻이지?”

“어쩌면 동포끼리 싸우지 않아도 시련을 클리어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내 말에 호기심이 동한 듯 워울프는 그 방법이 뭐냐고 물었다.

“여기서 이야기할 건 아닌 것 같네요. 렉스 영주님과의 만남이 끝나면 저를 찾아오세요. 영지 제일 외곽에 있는 여관에서 기다릴게요.”

성에서 나온 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대장간에 가기로 해놓고 렉스의 영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이 걱정되는지 이화는 초조해 보였다.

“오빠, 이젠 돌아가 봐야 하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이 걱정할 것 같은데.”

“서 헌터가 우리 사정을 말해줬을 거야. 정 걱정되면 김화영 헌터랑 먼저 돌아가도 돼.”

“그 워울프랑 이야기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거야?”

“당연하지. 우리 작전을 성공시키는 데 쓸 수 있는 카드를 눈앞에 두고 갈 순 없잖아?”

“어떻게 쓴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알겠어. 대신에 한 시간 정도만 더 기다릴 거야.”

그러고 몇십 분 정도 지났을까? 여관 문을 열고 워울프가 들어왔다.

워울프는 자신을 반기는 여관 주인을 무시하곤 곧장 우리에게 다가왔다.

“늦어서 미안하다. 렉스 영주와의 협상이 이제 끝났다.”

“중요한 협상이었나 보죠?”

“그렇다. 우리 워울프의 미래가 달린 협상이었다. 신중히 처리할 필요가 있었지.”

“저와의 협상에서도 신중히 생각해 주시길 바랄게요. 워울프의 미래가 달린 협상이니까요.”

워울프의 미래가 달렸다는 말에 그의 분위기가 한층 무거워졌다.

“그래서 아까 언급한 그 방법이란 게 뭐지?”

“간단해요. 강경파 측의 헌금함을 부수고 온건파 측의 헌금함까지 부수는 거예요. 그러면 양측 모두가 시련을 클리어할 수 있을 거예요.”

“헌금함 전부를 부순다. …만약 그 일로 인해 양측 전부가 시련을 클리어하지 못한다면?”

“초월자님들께선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플레이어를 많이 잃게 되겠죠.”

워울프는 그 뒤로 한참 말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다 눈을 슬며시 감고는 물었다.

“그 방법에 관해 렉스 영주에게도 이야기한 적 있나?”

“저희 일행 외에 이 방법에 관해 들은 이는 없어요.”

“양측 모두가 시련을 클리어하길 바랄 이는 우리 워울프 말고는 없을 테니, 어쩌면 당연한 거겠군. 방법을 알려줘서 고맙네. 방법을 알려준 대가로 자네가 내게 요구할 건 무엇이지?”

‘렙틸리언’ 정보상에게 고용되어 한강 이북과 이남을 오가며 ‘캠비온’을 찾아다녔으니, 이번 시련에서 워울프들의 세력이 갈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본인 종족의 마을을 재건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렙틸리언’ 정보상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 만큼, 종족 모두가 이번 시련에서 살아남을 방법이 간절했겠지.

그러니 지금 이자에게 이런 요구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양측 헌금함을 부술 수 있도록 저희 일행을 도와주세요.”

“뭐?”

예상치 못했는지 워울프의 입이 벌어졌다.

“강경파 측에 속한 워울프를 시켜 저희 일행이 ‘렙틸리언’ 정보상의 성에 잠입할 수 있게 도와주면 돼요. 어차피 ‘렙틸리언’ 정보상에게 고용된 상태니까 성 내부에 들어가기도 좀 더 쉽겠네요.”

“우리가 그자에게 고용되었다는 소문은 거기까지 퍼졌던 건가.”

“어떻게 하실래요? 저희 도와줄 거예요? 말 거예요?”

“그보다 자네 일행은 왜 양측 헌금함을 파괴하려는 거지?”

“한배 타기 전에 저희 측 사정을 전부 말해줄 순 없죠.”

워울프는 이번에도 말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다 자신의 카드 하나를 오픈했다.

“우리 워울프는 ‘렙틸리언’ 정보상에게 고용된 뒤, 성을 돌아다니며 내부 정보를 익혔다. 그리고 ‘렙틸리언’ 정보상을 돕는 그 근처의 수인 세력의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적은 고용된 대가로 그자에게 금을 받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금을 받아 워울프의 마을을 재건하려던 게 아니었나?

“우리의 본 목적은 ‘렙틸리언’ 정보상에게서 성을 갈취하는 거였다. 그러면 그자의 금 역시 우리 워울프의 소유가 될 테니.”

“그걸 저한테 말했다는 건….”

“자네 일행을 도와주긴 하겠지만, 어떤 사정이 있는진 듣지 않겠네. 대신 이번 협상에 한 가지를 더 얹어달라고 요구하지.”

워울프가 요구한 건 간단했다.

“‘렙틸리언’ 정보상의 성에 들어가 강경파 측 헌금함을 부수고 나면, 그 성을 우리 워울프가 차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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