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철상지옥 (6)]
이후 워울프는 본인이 세워둔 성 탈취 계획을 말했다. 그의 계획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우선 본인은 전면전이 펼쳐지는 사이에 ‘캠비온’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는 핑계를 대며 ‘렙틸리언’ 정보상과 성안에서 직접 대면해 시간을 끌고. 그동안 강경파에 속한 워울프 무리는 미리 알아둔 비밀통로로 성 내부에 침입한 후 외부로 통하는 통로를 모두 차단할 것이라 했다.
통로가 차단되면 ‘렙틸리언’ 정보상을 죽인 뒤 내부에 남은 적을 소탕. 이후 전면전이 종료될 때까지 성 내부에서 공성하다 온건파에 속한 워울프 무리와 합류하는 게 계획의 전부였다.
“성 내부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필히 헌금함을 지키기 위해 한강 이남 수인 세력에서 지원을 보낼 거다. 그러니 모든 통로를 걸어 잠그고, 최대한 외부의 개입을 막는 게 중요하다. 우리의 계획은 여기까지다.”
저 계획에서 우리 일행이 맡아줬으면 좋겠다는 부분은 내부에 남은 적 소탕을 돕는 거였다.
“어차피 헌금함을 파괴하기 위해선 내부에 남아있는 적을 쓰러뜨려야 하지 않나? 그렇게 어려운 부탁은 아닌 것 같은데,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성 탈취 계획을 도와달라는 것치곤 그리 대단한 부탁은 아니긴 하네요. 정말 저희가 도울 건 그게 끝이에요?”
“이미 자네는 헌금함을 모두 부순다는 선택지를 내게 제시했다. 더 많은 걸 바랄 수는 없다.”
“받아들일게요. 다만, 일행 전부를 남겨둘 순 없어요. 몇 명은 온건파 측 헌금함을 파괴하러 가야 하거든요.”
“알겠다. 온건파 측 헌금함을 지키는 곳에 워울프 몇을 배치해두지. 그들에게 자네를 도우라고 말해두겠네.”
워울프와의 협의가 정리되어가자, 줄곧 묻고 싶었던 듯 이화가 바로 질문을 던졌다.
“잠깐만요.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긴 한데, 혹시 그쪽은 이번 전면전에 참여하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요?”
이화의 질문에 워울프가 별안간 본인의 웃옷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상체 절반을 감싸고 있던 붕대를 치웠다. 드러난 그의 상체엔 칼에 베여 생긴 깊은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이 상처 때문에 전투에 참여하지 말고 주둔지에서 쉬라고 했다. 대신에 휘하의 워울프를 렉스 영주, 본인에게 맡기고 말이지.”
상처를 보니 왜 렉스 영주가 그를 전면전에서 배제했는지 알 수 있었다. 꽤 오래전에 당한 것 같았지만, 상처에선 여전히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금씩 피가 흐르는 상처 주변엔 거무스레한 멍까지 들어 있었다.
“수연이가 치료해줬다 했죠?”
“그렇다.”
치료했다기엔 상처를 그냥 내버려 둔 거나 다름없는 상태다.
“수연 언니가 완벽하게 치료해주진 못했나 보네요.”
“아니다. 자네 일행의 능력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그녀가 고통을 덜고, 부패 속도를 늦추어준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감사하고 있다.”
부패라는 단어를 듣고 나니 그의 상처가 좀 다르게 보였다. 거무스레한 멍이라고 생각되었던 건, 자세히 보니 살이 썩어들어가고 있는 거였다.
“…누구한테 당했길래.”
이화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워울프는 멋쩍은 듯 붕대로 상처를 감쌌다.
“검을 쓰는 자였다. ‘렙틸리언’ 정보상의 협력자 중 하나인 것 같더군. 그자의 검에 베이면 이처럼 상처가 아물지 않게 된다. 혹시나 검을 든 붉은 눈의 사내를 마주하게 된다면 조심해야 한다.”
워울프는 시련이 시작되기 전까진 ‘렙틸리언’ 정보상과 협력하는 관계였다. 그랬는데 ‘렙틸리언’ 정보상의 협력자 중 한 명에게 베였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아니면, 혹 성을 탈취하려는 계획을 ‘렙틸리언’ 정보상에게 들키기라도 한 건가?
검에 베인 이유를 궁금해하는 걸 눈치챘는지 워울프는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자네들이 걱정할까 봐 덧붙이는 건데, 내가 뒤에서 술수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들킨 건 아니다. 그저 ‘캠비온’을 찾는 게 늦어진다는 이유로 이런 상처를 입힌 거다. ‘캠비온’을 찾게 되면 상처에 걸린 저주를 해체해 준다고 했다.”
저주? 수연이는 어떤 상태 이상도 회복시켜줄 수 있는 스킬을 지니고 있다. 수연이가 고의로 저주를 해체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을 리는 없으니, 그 저주는 스킬 ‘축복’으로도 해체할 수 없었던 게 분명하다.
“자네 일행도 이 상처만큼은 치료하지 못하겠다더군. 속도를 늦추는 게 다라고 했다.”
내 생각이 맞음을 워울프가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수연이가 저주를 치료할 수 없다면, 검을 쓰는 붉은 눈의 사내와의 전투는 최대한 피하라고 일행에게 일러주어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 걱정하지 말게나. 상처에 걸린 저주를 해체해 준다고 조건을 건건, 다시 말해 저주를 입힌 자가 저주를 해체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번 전투에서 반드시 그자를 붙잡아 저주를 해체하고 말겠다.”
워울프는 전투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거라며 몸을 과격하게 움직여 보였다. 덕분에 본인보다 우리가 더 워울프의 상처에 관해 걱정하는 꼴이 되었다.
“이깟 상처쯤은 아무렇지도 않다. 적군이 아무리 많이 덤벼든다 해도 혼자서도 거뜬하다.”
본인의 부상으로 인해 작전에 지장이 생기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는 확답까지 들은 우리는 힘을 합치는 방향으로 워울프와의 협상을 마쳤다.
구체적인 계획을 짜고 협상을 마친 뒤엔 김화영의 스킬을 써 주둔지로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온 주둔지는 왠지 모르게 시끌벅적했다.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있는 거지? 무슨 일이야?”
냉큼 달려가 질문 폭격을 날린 김화영을 진정시키며 노인이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결국 전면전이 선포되었네.”
전면전? 렉스 영주가 계획한 총공세 일은 오늘이 아니다. 즉, 전면전을 선포한 쪽은 한강 이남의 수인 세력.
“평화 협상을 위해 내보낸 사신이 인간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면서 가만히 놓아둘 수 없다고 하더군. 본인들과 끝장을 보던가, 사죄의 의미로 세력 내 인간을 전부 죽이던가. 둘 중 하나를 오늘 자정까지 선택하라고 엄포를 놓았네.”
노인의 설명을 들으니, 아까 ‘라루가’의 영역에서 있었던 전투가 떠올랐다.
그때, 분명 수인 무리 중 원숭이 수인 하나를 놓쳤었다. 그 원숭이 수인이 김화영과 이화와의 전투를 본인의 세력에게 전한 듯하다.
‘굳이 이 몸의 영지 근처에서 자네 일행을 먼저 공격했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렉스 영주가 우려한 대로 저들은 아무런 목적 없이 우리를 먼저 공격한 게 아닌 듯싶다. 어쩌면 애초부터 전면전을 선포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라루가’의 영역에서 우리를 먼저 공격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들의 본 목적이 어찌 되었든, 한쪽에서 선전포고한 이상 전면전은 이미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저희 주둔지에선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물음에 노인은 말없이 주둔지 일원들이 바삐 움직이는 쪽을 고갯짓했다.
노인이 고갯짓한 곳에선 수인과 인간이 종족 가릴 것 없이 분주히 움직이며 주인장이 만든 각종 장비를 옮기고 있었다.
“싸우기로 했나 보네요.”
“그렇다네. 렉스 영주의 뜻이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 주둔지에선 본래 계획대로 전면전에 응하기로 했다네. 그래서 전투가 벌어지게 될 동작대교 쪽으로 장비를 옮기기 시작했네. 몇몇 인원은 그곳으로 가 최전선을 확보하고 있고.”
인간을 모두 죽이라는 선택지도 존재해서 걱정했는데, 이대로 전면전을 펼친다는 걸 택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서신을 거절했던 걸 보면 렉스 영주도 전면전을 택할 테니, 우리의 계획을 실행할 때가 된 것 같다.
머리를 굴리는데 이화가 노인에게 물었다.
“나은이랑 동현 오빠는요?”
“이미 동작대교에 가 있다네. 그리고 이거.”
노인이 이화에게 건넨 건 투명한 유리 조각이었다.
“전면전이 선포되자마자 계획대로 준비해두었다네.”
이번 계획에서 우리 일행은 동작대교와 ‘렙틸리언’ 정보상의 성,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까지 총 세 곳으로 흩어진다. 그런 상황에서 계획을 무사히 성공시키기 위해선 상호 간의 소통이 잘 돼야 하기에 우린 연락 수단으로 유리 조각을 준비했다. ‘이면’과 연결된 유리 조각을 나누어 가진 뒤, 박다현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기로 정했다.
“연락 수단도 전달했으니, 이만 나도 위치로 이동하겠네.”
노인은 무사히 계획을 마쳤으면 좋겠다는 말을 끝으로 헌금함을 지키러 이동하는 무리에 합류했다.
노인이 떠나자 김화영이 물었다.
“우린 언제 성으로 갈 거야?”
“전면전이 시작되면, 바로 이동할 거예요. 그러니 미리 준비해두세요.”
“준비는 항상 돼 있지!”
김화영은 순식간에 단검 몇 자루를 손에 쥐고는 말했다.
“걱정하지 마! 언제나 그랬듯 현이랑 함께라면 이번 시련도 결국엔 잘 마무리될 거니깐.”
***
[‘폐허가 뒤따르는 자’님이 수없이 많은 죽음이 따르길 축복합니다.]
[‘빛나는 눈의 전략가’님이 큰 피해 없이 전투가 끝나길 기원합니다.]
누가 말해준 건 아니었으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동작대교 쪽에서 굉음과 함께 연기가 솟아오른 걸 본 우리는 곧장 움직일 준비를 마쳤다.
각자 무장을 마친 뒤, 식당 내부에 모인 우리를 향해 박다현이 물었다.
“언니 오빠 준비 다 끝났지?”
“어. 성에 잠입할 때마다 가던 곳으로 이동하면 돼.”
“알겠어.”
‘이면’을 통해 곧장 ‘렙틸리언’ 정보상의 성안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계획은 시작된다. 그곳으로 가고 나면 다시 작전을 일러줄 시간이 없을 게 뻔해 성으로 이동한 이후 어떻게 움직일지 다시 한번 복기해줬다.
“그곳으로 이동하면 나만 ‘이면’ 밖으로 내보내 주면 돼. ‘퀴네에’ 쓰고 이동할 테니깐, 나머지 두 사람은 헌금함이 있는 곳에 도착하면 내보내 줘.”
“그러곤 내가 헌금함을 불태운 뒤, 김화영 헌터의 스킬로 임성윤 헌터의 몸에 새겨둔 표식으로 이동한다. 정확하지?”
“정확해. 그럼 출발하자.”
출발하자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강렬한 빛과 함께 박다현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곤 김화영과 이화의 모습도 차례로 사라졌다.
나만 ‘이면’으로 들어가면 되는 상황, 수연이가 손을 내밀었다.
“너희 사라졌다는 사실 최대한 잘 숨겨볼 테니깐, 여긴 걱정하지 말고 다들 몸조심해.”
혹여나 주둔지에 있어야 할 우리 일행이 사라졌다는 게 알려져 소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로 인해 계획을 망치게 될 가능성을 고려해 우린 주둔지에 수연이를 남겨두기로 했다.
혹시 몰라 나와 이화, 김화영은 주둔지 주변 숲을 순찰하러 갔다는 핑계까지 마련해두었으니, 나머진 수연이가 잘 해결해줄 것이다.
“부탁할게.”
수연이가 뻗은 손에 유리 조각을 올려두자 그곳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에 눈을 감았다 떴을 땐, 익숙한 성내의 공간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