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41화 (142/168)

[23. 철상지옥 (7)]

‘렙틸리언’ 정보상의 성에 도착했단 사실을 인식하고 나니, 왠지 모를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번엔 한 번에 성공하길.”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계획이 흘러가길 축복합니다.]

저 망할 놈의 축복은 무시하고 ‘퀴네에’부터 썼다.

지금 내가 있는 방은 성에서도 제일 구석진 곳에 있다. 헌금함이 있는 방까지는 거리가 꽤 있으니, 지금부턴 부지런히 그곳으로 달려가야만 한다. 저 광대의 말을 들어줄 시간 따윈 없다.

“그럼 출발할게.”

유리 조각을 앞으로 뻗은 채 방 밖으로 나가니, 이화의 지시가 들렸다.

“우선 첫 갈림길에선 오른쪽.”

이화는 옆에서 조잘대는 김화영과 박다현을 조용히 시키면서도 차분히 헌금함이 있는 방향으로 날 안내해주었다.

이화의 안내에 따라 움직인 지 얼마 되지 않아, 성의 정문을 비롯한 곳곳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창을 통해 소란이 벌어진 쪽을 바라보니 수인들이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거리가 있어 자세히는 안 보였지만, 워울프의 모습이 얼핏 보이는 걸 보니 예정대로 작전이 진행되는 듯했다.

워울프가 성에 침입했단 건, 워울프 통솔자는 이미 ‘렙틸리언’ 정보상과 대면하고 있단 뜻. 이대로 저들이 시선을 끌어주는 동안 우린 헌금함부터 파괴하면 된다.

실제로 헌금함을 지키던 병력은 소란이 벌어진 쪽으로 이동한 건지, 성에 도착한 이후 복도 두 개를 지날 때까지 마주한 수인이나 인간은 없었다.

“여기서 왼쪽으로 꺾은 다음 5번 복도로 가면 돼.”

그러나 이화의 지시를 듣고 모퉁이를 돈 순간.

“뭐야? 오빠, 잠깐만.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게 아니지?”

다수의 무장한 수인들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야?”

다만 그들 모두가 내장을 쏟은 채 잔인하게 죽어 있었다. 죽은 지 꽤 시간이 흘렀는지 통로는 그들이 흘린 피로 완전히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쓰러진 수인들에 시선을 빼앗겨 미처 보지 못했는데, 내 발밑에 붉은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발밑부터 시작해서 곳곳에 그려진 붉은 화살표는 전부 5번 복도를 가리켰다.

“제정신으로 한 짓은 아닌 것 같네.”

피가 뚝뚝 떨어지는 화살표를 보니 왠지 모를 섬뜩한 기분이 들어 식도를 꺼냈다. 신경을 곤두세운 채 앞으로 나아가다 통로의 끝에 다다르자, 5번 복도 안쪽으로 이어진 기다란 화살표가 보였다. 화살표 밑에는 ‘welcome’이란 단어가 쓰여 있었다.

“영어? 그렇다면 인간이 한 짓이란 거네.”

우리가 수인의 언어를 표기할 수 없듯, 수인 역시 인간의 언어를 표기할 수 없다. 그러므로 환영한단 이 글씨는 인간이 쓴 게 틀림없었다. 문제는 우리를 제외하고 성에 들어온 우리 편은 전부 워울프란 것.

“대체 누가? 우리처럼 헌금함을 파괴하러 온 건가? 그러면 굳이 이런 식으로 화살표를 그릴 필욘 없었을 것 같은데.”

불안감은 커졌지만, 이대로 멈춰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에 이런 짓을 벌인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어차피 ‘퀴네에’를 쓴 날 인식할 순 없다. 그런 생각으로 불안감을 이겨내고 화살표를 따라 5번 복도로 진입했다.

5번 복도가 시작되는 곳부터 헌금함이 있는 제일 끝의 방까지. 역시나 수많은 수인이 죽어 있었다. 악취미라도 되는 듯 모든 수인의 복부는 찢긴 채 내장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들이 흘린 피로 그려진 화살표는 친절하게도 헌금함이 있는 방을 가리켰다. 방 바로 앞에는 ‘present’라고 쓰여 있기까지 했다.

살짝 열려 있는 문틈으로 내부를 살피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최대한 조심히 문틈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와 달리 방안은 피 칠갑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시체가 없는 건 아니었다. 빛이 솟아나는 헌금함 바로 앞, 어느 수인이 피를 흘린 채 엎어져 있었다.

엎어진 수인 밑으로 보이는 내장을 보아하니 바깥의 참상을 일으킨 자가 이자 또한 죽인 건 확실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헌금함은 파괴되지 않고 멀쩡한 채였다.

“헌금함을 파괴할 것도 아니면, 대체 왜 이 수인들을 전부 죽인 거야?”

게다가 방 어디에서도 정신 나간 살인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방해꾼을 치워준 셈이니 우리야 좋은 건가.”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살인마의 의도가 뭐든 간에 당장 중요한 건 강경파 측 헌금함을 파괴하는 거다. 서둘러 헌금함을 파괴하고 살인마가 이곳으로 돌아오기 전에 다른 워울프와 합류해야겠다.

“혹시 모르니 살인마가 숨어있나 확인은 꼼꼼히 해봐야겠지.”

유리 조각을 들고 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엎어진 수인 외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시켜주자 이화가 말했다.

“오빠, 나 이제 김화영 헌터 데리고 ‘이면’ 밖으로 나갈게.”

그리고 곧 유리 조각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유리 조각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사라졌을 땐, 김화영과 이화가 눈앞에 서 있었다. 이화는 ‘이면’ 밖으로 나오자마자 엎어진 수인 쪽으로 다가갔다.

“오빠, 이거 봐봐.”

이화가 가리키고 있는 건 수인의 등에 달린 날개. 누가 봐도 박쥐의 날개였다.

이화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것 같아 정면을 바라보고 눕도록 수인의 몸을 뒤집었다. 그제야 수인의 흰자 하나 없는 검은 눈과 함께 머리 위로 살짝 튀어나온 귀가 보였다.

“박쥐 수인이잖아.”

‘퀴네에’를 벗자 이화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워울프가 찾아다니던 ‘캠비온’ 종족이겠지?”

“그런 것 같아. 그렇게 찾아다녀도 안 보였던 ‘캠비온’이 대체 왜 여기서 죽어 있는 거지?”

“나야 모르지.”

이화는 ‘캠비온’의 시체로부터 시선을 돌려 헌금함을 바라보았다.

“뭔가 엮이고 싶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으니까 일단 헌금함부터 파괴할게. 나머진 그 이후에 생각해보자.”

고개를 끄덕이자 이화가 뻗은 우산에서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화염에 닿은 헌금함이 불타기 시작하자 공중을 향해 솟아오르던 빛이 사라지고 대신 검은 연기가 사방에 퍼졌다.

[8202-S 구역의 헌금함이 파괴되었습니다.]

눈앞을 가득 메운 검은 연기는 글씨가 새겨짐과 동시에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연기가 사라지고 시야가 밝혀졌을 땐, 헌금함도 재가 되어 사라진 후였다.

“끝난 거야? 너무 허무한데?”

“네. 그럼….”

말을 잇기도 전에 김화영이 나를 자신의 뒤쪽으로 밀쳤다. 무슨 일인가 하니, 문 쪽에 서 있는 누군가를 경계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모든 걸 불사를 준비를 마칠 수 있었어요.”

김화영이 경계하는 사람은 전에 보았던 여성 신도였다.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잔뜩 머금은 채 본인의 손에 들린 물체를 흔들었다.

“이 둘을 처리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려서요. 혹시나 여러분을 이 방에서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하던 참이었어요.”

여성 신도가 흔들고 있는 건 워울프 통솔자와 ‘렙틸리언’ 정보상의 머리였다. 우리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린 걸 알았는지 여성 신도는 머리를 한층 높이 들어 올리더니 인형극을 하는 것처럼 장난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곧 싫증이 났는지 우리 쪽을 향해 던졌다.

여성 수인이 던진 두 수인의 머리는 데굴데굴 굴러와 우리의 앞에서 멈추었다. 그 순간, 이화가 우산을 펼쳐 들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런데 이화가 본인을 공격하려는 것임을 알 텐데도 여성 신도는 그 자리에서 공손히 허리 굽혀 인사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예상 밖의 모습에 이화는 공격을 멈추고 여성 신도를 바라보았다. 여성 신도는 머리카락이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힌 채 말을 이어갔다.

“제가 준비한 선물을 고대로 받아주셔서 너무 행복하네요. 그분도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아마 구원을 허락해주실 정도로 기뻐하실 거랍니다.”

“선물?”

“네. 여러분이 찾아오시기 편하도록 헌금함까지 이어진 길을 표시해드렸는데, 혹시 못 보셨나요?”

“피로 그려진 화살표를 말하는 거야?”

“맞아요. 그게 제 선물이었답니다. 여러분이 저희를 위해 해주실 일에 비하면 아주 조그마한 성의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받아주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 회사에 소속된 종교를 믿는 만큼, 저 여자도 정신이 제대로 나간 게 틀림없다. 그래도 하나 다행인 건 우리를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는 거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우리가 강경파 측 헌금함을 파괴하길 원했던 것 같다.

이대로 여자의 화를 돋우지 않으면 조용히 여기서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럼, 여기서 나가려고 하는데 문에서 비켜주실 수 있을까요?”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는데 여성 신도는 해맑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아니요.”

“네?”

“저는 여러분을 그분 앞으로 데려가야만 하거든요.”

“오빠, 저런 정신 나간 여자랑 더 대화할 필요 없어. 워울프 대장도 죽었으니, 성 탈취 계획은 실패한 거나 마찬가지야. 우리라도 여기서 빠져나가서 남은 계획을 수행하자.”

이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생의 눈앞에 글씨가 새겨졌다.

[‘허영의 사내’님이 플레이어 ‘정이화’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을 명합니다.]

글씨가 새겨진 걸 본 이화는 그대로 표정이 굳어버렸다. 그리곤 입을 꾹 다문 채 여성 신도를 노려보았다.

‘허영의 사내’라면 이나은에게 힘을 준 대가로 머릿속을 어지럽힌 초월자다. 그런 초월자가 왜 이화에게 저런 명령을? 그리고 이화는 왜 저 초월자의 명령에 따르는 거지?

갑자기 새겨진 글씨에 수많은 의문이 피어날 때, 여성 신도가 차분히 말했다.

“정신 나간 여자가 혹시 저를 뜻하는 말이었나요? 아무래도 저에 대해 잘 모르셔서 그런 오해를 가지신 것 같네요. 그럼 저희 자기소개하는 시간을 가져 볼까요? 먼저 그쪽 어여쁜 분부터 자기소개해주세요.”

[‘허영의 사내’님이 플레이어 ‘정이화’에게 자기소개할 것을 명합니다.]

“…저, 저는 정이화라고 합니다.”

[‘허영의 사내’님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짓습니다.]

“좋아요. 외모에 어울리는 예쁜 이름이네요. 제 이름은 이하민. 정말 듣기만 해도 끔찍한 이름이죠? 그러면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되었으니, 다음으론 싸움 방식을 알아보는 게 어때요? 혹시 이화 신도님은 어떤 식으로 전투하시나요?”

여성 신도의 질문에 이화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우산으로, 불을 내뿜거나, 얼음을 써서.”

“저랑 다르게 우아하고 아름답게 싸우시네요. 정말 부러워요. 외모도, 이름도, 우아함도. 하나도 빠짐없이 갖고 싶을 정도로 너무 부럽네요. 아- 이렇게나 아름다운 세상에 정말 어울리는 사람이세요. 역시 ‘허영의 사내’님께서 점찍은 헌터 중 한 명일 만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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