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42화 (143/168)

[23. 철상지옥 (8)]

‘허영의 사내’가 점찍은 헌터 중 한 명이라고? 저건 또 무슨 이야기야?

지금껏 이화가 내게 그 초월자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여성 신도가 하는 말만 들어보면, 마치 이화가 ‘허영의 사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혐오스러운 존재인 제가 이토록 빛나는 분과 친분을 나눌 수 있다니…. 이게 모두 초월자님께서 베푸신 은혜 덕분이에요. 그럼 자기소개를 마칠 때가 된 것 같으니, 저에 관한 한 가지 이야기를 더 들려드릴게요.”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무척 중요한 내용이라면서 여성 신도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죽음을 통해 혐오스러운 저 자신을 지우려던 때. 초월자님께서 관용을 베풀어 주셨고, 그때부터 전 교주로서 다른 분들을 구원하기 위해 앞장서 왔답니다.”

일반 신도가 아니었단 건 눈치채고 있었는데, 설마 교주였을 줄이야.

뜬금없이 튀어나온 ‘허영의 사내’도 그렇고, 헌금함을 지키던 수인 모두를 학살한 교주란 미치광이도 그렇고. 강경파 측 헌금함을 부수기만 하면 될 뿐이었는데, 일이 너무 커져 버렸다. 작전 진행 전에 혹시 모를 여러 변수를 생각해보긴 했지만, 이 정도 큰 변수가 튀어나올 거라곤 전혀 예측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구원에 한층 더 가까워지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죠.”

여성 신도는 이화 외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지 나와 김화영에겐 자기소개를 요청조차 하지 않았다. 제멋대로 자기소개를 끝낸 그녀는 행복에 가득 찬 표정으로 문밖을 가리켰다.

“저와 이화 신도님의 자기소개가 끝났으니, 이제 그분을 만나고 구원을 앞당겨 주세요.”

“아까부터 계속 누구더러 신도님이란 거야? 내가 왜 신도님인 건데?”

“저와 같은 초월자님을 모시는데, 신도님이 아니면 뭐라고 불러드려야 하나요?”

그 말을 끝으로 잠깐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건 김화영이었다.

“저기, 나랑 현이한텐 궁금한 게 없는 거야? 우린 자기소개 안 해도 돼?”

“여러분들도 정말 감사한 존재임은 틀림없지만, 신도님이 아닌 분에겐 관심이 없어서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의도한 건진 모르겠지만, 김화영이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여성 신도의 시선을 끌어주어 유리 조각에 대고 박다현에게 말을 건넬 틈이 생겼다.

“박다현 헌터, 지금 당장 우리 세 사람 ‘이면’으로 옮겨 줘.”

그러나 항시 대기 중이어야 했을 박다현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박다현 헌터? 내 말 못 들었어?”

“오빠, 그만. 괜히 심기 거슬렸다가 셋 다 죽을 수도 있어.”

박다현에게 말을 건네는 날 멈추게 하고는 이화가 발걸음을 뗐다.

“나만 따라가면 되는 거지?”

“아니요. 그분께선 여러분 모두를 만나 뵙고 싶어 하신답니다.”

“그건 나랑 맺은 계약과는 다를 텐데?”

“어째서죠? 여러분이 그분의 말만 따른다면 다칠 일은 없는걸요? 옆의 오빠분이 걱정되어서 그러시는 건가요?”

이화는 잔뜩 화난 표정으로 여성 신도에게 대꾸하려 했으나, 이내 무언가로 인해 겁에 질려 입을 다물곤 문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다른 분들도 어서 따라오세요. 그분이 계신 교회는 여기서 멀지 않답니다.”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이화의 알 수 없는 태도에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여차했다간 ‘CONTINUE?’ 특성을 사용하면 되니 일단은 이화 말대로 여성 신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당분간은 여성 신도의 말을 들어주며 교주와 ‘허영의 사내’, 이화의 계약에 관한 정보를 하나라도 더 모아야겠다.

“김화영 헌터, 저희도 따라가죠.”

“괜찮겠어? 아직 내 스킬도 남아있어. 위험할 거 같으면 표식 새겨둔 곳으로 당장이라도 가면 돼.”

“그건 조금만 더 아껴두죠. 혹시나 정말 위험한 상황이 닥친다면 바로 이화 데리고 여기서 벗어나 주세요.”

“이화만? 넌?”

“…전 ‘퀴네에’가 있잖아요.”

김화영에게 단단히 당부한 뒤, 여성 신도의 뒤를 따라 방 밖으로 나섰다.

여성 신도의 뒤를 따라 이동하는 동안, 이화는 침묵을 지켰다. 결국 ‘허영의 사내’란 초월자와 이화가 어떻게 엮여 있는지는 전혀 듣지 못한 채 교회에 도착하게 되었다.

가짜 삼촌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처럼 교회에는 신도 여럿이 모여 있었다. 전에 봤을 때와 하나 다른 점이라면 신도 모두가 로브를 뒤집어써 본인의 얼굴을 가리고 있단 거였다. 덕분에 좀 더 사이비 교단 같다는 느낌이 풍겼다.

우리가 신도들 쪽에 가까워졌을 때, 별안간 신도 중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각자 기도를 올리던 신도들이 중얼거리던 걸 멈추었다.

교회가 정적으로 가득 차려는 순간, 여성 신도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그분의 바람대로 이분들을 모셔왔어요.”

여성 신도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선 신도가 미친 듯이 몸을 떨기 시작했다. 흥분? 환희? 두려움? 신도가 어떠한 기분으로 몸을 떠는 건지 상황을 지켜보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신도가 지닌 감정은 두려움이었는지, 그의 목소리는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

“우, 우리의 고통을 끊어주기 위해 드디어 그분이 이 땅에 내려오셨다.”

신도의 입에서 나온 떨리는 목소리를 듣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분은 본인이 내려주신 힘을 돌려받아, 모두를 시련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그 목소리는 삼촌의 목소리와 완전히 일치했다.

삼촌의 목소리가 들리니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이화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이화는 순식간에 신도의 멱살을 잡고 로브를 머리에서 벗겼다. 로브를 벗기자 역시나 삼촌의 얼굴이 드러났다.

다만, 평소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삼촌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사색이 된 채 우리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었다.

“삼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그리고 내려준 힘을 돌려받다니, 그건 또 무슨 이야기야?”

이화가 윽박지르자, 삼촌은 목을 움츠리곤 두 손 모아 빌었다.

“나, 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이렇게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해서….”

그의 말은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내 뒤에 있던 여성 신도가 삼촌의 등 뒤에 서 있었고. 그와 동시에 이화의 손에 잡혀 있던 삼촌의 얼굴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삼촌은 복부를 베인 채 피와 장기를 쏟고 있었다.

“방금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삼촌의 배를 가른 장본인인 여성 신도는 평온한 얼굴로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털어내더니, 우리를 향해 말했다.

“중요한 건, 그분이 오셨다는 거고. 전 그분이 이곳에 다다를 때까지 여러분을 붙잡고 있어야 한단 거예요.”

여성 신도가 말하는 동안 이화의 손에 붙잡힌 삼촌의 피부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는 피부 아래, 어느 중년 여성의 얼굴이 얼핏 보였다.

이전에도 한 번 본 적 있는 장면이었다. 이화에게 붙들린 삼촌은 진짜가 아니었다. 지난번처럼 겉모습을 베낀 스킬을 쓴 다른 이였다.

“겉모습을 베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 아니었다고?”

“놀라셨나요?”

우리의 반응에 만족스러웠는지, 여성 신도는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러자 신도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서 우리 쪽을 향해 무기를 들어 올렸다. 우리 주위를 원형으로 둘러싼 신도들 사이에서 여성 신도가 말했다.

“그럼 이건 어떤가요?”

여성 신도가 신도들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그들이 뒤집어쓴 로브를 하나씩 벗겼다.

“이게 무슨….”

그녀가 로브를 하나 벗길 때마다 우리를 바라보는 삼촌의 얼굴이 하나씩 늘어갔다. 여기 있던 모든 신도는 삼촌의 겉모습을 완벽하게 베낀 채였다.

마침내 모두가 로브를 벗고 삼촌의 얼굴을 한 채 우리를 바라볼 때, 이화의 눈앞에 글씨가 새겨졌다.

[‘허영의 사내’님이 플레이어 정이화를 대상으로 ‘후원 미션’을 등록합니다.]

[후원 미션]

- 대상 플레이어 : 정이화

- 클리어 조건 : 플레이어 ‘정성훈’을 찾을 것.

- 성공 보상 : 원하는 위치로 텔레포트

- 실패 페널티 : 없음.

[수락하시겠습니까?]

[Y/N]

“…망할.”

[‘허영의 사내’님이 등록한 ‘후원 미션’을 수락합니다.]

[‘허영의 사내’님이 잠깐의 여흥을 즐기고자 시선을 고정합니다.]

‘후원 미션’을 수락한다는 글씨가 새겨지곤, 이화는 우산을 들어 올렸다.

“김화영 헌터, 우리 오빠 좀 지켜주세요. 아니, 그냥 오빠 데리고 스킬 써서 여기서 벗어나세요.”

[‘허영의 사내’님이 플레이어 정이화를 대상으로 ‘후원 미션’을 등록합니다.]

[후원 미션]

- 대상 플레이어 : 정이화

- 클리어 조건 : 플레이어 ‘김화영’과 플레이어 ‘정현’의 근처 100m 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

- 성공 보상 : 없음.

- 실패 페널티 : 플레이어 ‘이하민’을 플레이어 ‘김화영’과 플레이어 ‘정현’의 근처 100m 내의 무작위 장소로 텔레포트

- 본 후원 미션을 수락하지 않을 경우, 플레이어 ‘이하민’은 플레이어 ‘김화영’과 플레이어 ‘정현’의 근처 100m 내의 무작위 장소로 텔레포트 하게 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N]

“아니, 안 돼요. 여기 계셔야만 해요.”

[‘허영의 사내’님이 등록한 ‘후원 미션’을 수락합니다.]

“우리 오빠 무조건 지켜주세요. 오빤, 당장 ‘퀴네에’ 써!”

이화에게 새겨진 글씨는 ‘한솥밥 먹는 사이’ 특성이 있는 나만이 함께 볼 수 있다. 당연하게도 갑자기 돌변한 이화의 태도는 김화영에겐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김화영은 지금 이 상황이 아까 언급한 정말 위험한 상황으로 인식되었는지 내게 물었다.

“현아, 지금이 그때야?”

나 역시 김화영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답을 듣자마자 김화영이 뛰쳐나가 이화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러곤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난 김화영이 뻗은 손을 잡지 않은 채 외쳤다.

“남은 헌금함도 마저 부숴주세요!”

외치면서 손에 들린 ‘퀴네에’를 흔들어 보이자, 김화영은 평소 잘 보이지 않는 진지한 표정으로 날 응시하더니 곧 이화와 함께 이곳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여성 신도는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허영의 사내’님이 자신의 여흥을 방해한 플레이어 ‘정현’을 향해 분노를 표출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