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43화 (144/168)

[23. 철상지옥 (9)]

“당신,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요?”

그렇게 말한 여성 신도는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 한 발짝. 정말 한 발짝만 남았는데, 당신 때문에 구원이 취소되기라도 한다면! 신도분들이 마음을 다해 올린 기도와 제가 지금까지 해온 노력이 전부…. 전부 물거품이 된다는 소리잖아! 전부 네까짓 XX! 아니, 당신 때문에!”

콘셉트 붕괴라고 해야 할까? 존칭과 하대를 넘나들며 횡설수설하는 것도 모자라 여성 신도는 여태껏 유지하던 온화한 표정마저 지웠다. 미소 대신 띤 저 분노에 가득 찬 표정은 명백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분께서 내리신 ‘후원 미션’을 방해할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죠? 그렇게라도 해서 그분의 관심을 되찾고 싶었던 건가요? 그분의 관심을 되찾는다면 다른 인류 따윈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본인의 이기심으로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든 말든 상관없다. 그런 생각이신 건가요?”

교주를 만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읽을 수 있겠다.

본인이 모시는 초월자의 여흥을 방해한 날 필히 죽일 생각이겠지.

“그분이 당신에게 관심을 가졌던 건 정이화 헌터님의 오빠여서예요. 정이화 헌터님을 속박하는 용도로 이용한 데서 당신의 역할은 끝났다고요.”

여성 신도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대로 눈을 감고 기다리면 배에서 쏟아지는 내장을 바라보다가 고통 속에 죽음을 맞이해 과거 어느 시점으로 귀환하는 결과를 맞이하겠지만.

“역할을 다했으면 얌전히 무대에서 빠지셔야죠. 인제 와서 초월자님께 존재를 어필해봤자 아무 의미….”

“없진 않을걸?”

나도 아무 생각 없이 ‘CONTINUE?’ 특성만을 믿은 채 이곳에 홀로 남겠다고 한 건 아니다.

“말 끊어서 미안한데, 그쪽이 모시는 초월자님께서는 내게 관심을 보이실 거야. 아니, 보이셔야 할 거야.”

다소 자신 있게 말했지만, 여성 신도는 본인 할 말만을 하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에게 개인적인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저 구원을 위해서, 대의를 위해서, 선을 위해서 방해꾼인 당신을 제거하는 것뿐이니 이해해주세요.”

어느새 완전히 거리를 좁힌 여성 신도는 최후통첩이나 다름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이자를 쓰러뜨리는 것으로 부디 노여움을 풀어 주시길.”

초월자에게 푹 빠진 저 정신 나간 여자가 내 말을 들어주리라 기대하고 있다간 틀림없이 이대로 죽고 말 거다. 그렇게 되기 전에 교섭 상대를 바꿔야겠다.

“그쪽이 나를 죽였다간 ‘허영의 사내’님과 이화가 맺은 계약이 깨지게 될 거야! 초월자님께서 원치 않는 결과일 텐데 괜찮겠어?”

내뱉은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눈앞에 글씨가 새겨졌다.

[‘허영의 사내’님이 미간을 찌푸립니다.]

동시에 여성 신도의 움직임이 멈췄다. 손날을 뻗은 채 멈춰 선 그녀는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허공만을 응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생기가 돌아왔을 때, 여성 신도는 앞으로 뻗은 손을 내리며 뒤로 물러섰다.

“초월자님께서 당신에게 질문 하나를 던져보라고 하셨어요.”

“질문?”

“질문은 이거예요. 정이화 헌터님과 초월자님께서 맺은 계약 내용이 무엇인지 맞히시면 돼요. 이 질문에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이 자리에서 도망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 당신은 제게 죽는 거예요. 알겠죠?”

저런 말을 하는 걸로 보아 멈춰있던 그 짧은 순간 동안 정신세계에서 ‘허영의 사내’와 대면하고 온 듯하다. 수틀리면 죽이겠다는 조건이 붙어있는 게 신경 쓰이긴 해도 ‘허영의 사내’의 정신이 내게 쏠렸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이번 시련에서의 최우선 과제는 강경파와 온건파 측 헌금함을 모두 파괴하는 것. 비록 교주의 방해로 워울프가 성을 탈취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아직 본래의 계획까지 망가진 건 아니다.

어찌어찌해서 강경파 측 헌금함은 불태웠으니 이젠 온건파 측 헌금함만 무사히 불태우면 되는 상황이다. 내가 여기서 ‘허영의 사내’의 시선을 끌어 교주를 텔레포트 시키지 못하도록 막는다면, 김화영과 이화는 어떻게든 온건파 측 헌금함을 불태워 줄 거다.

온건파 측 헌금함마저 파괴되었단 게 확인된 다음, ‘퀴네에’를 쓰고 여기서 벗어나 일행과 합류하여 대항책을 마련하는 것이 ‘허영의 사내’와 교주가 개입한 지금 상황에서의 최선의 수다.

그 최선의 수를 달성하기 위해선 지금부터 온건파 측 헌금함이 파괴되었다는 알림이 오기 전까지 ‘허영의 사내’가 내게서 관심을 놓지 못하도록 해야 한단 건데.

[‘허영의 사내’님이 하찮은 존재 따위가 본인의 시간을 빼앗고 있는 것에 어이없어합니다.]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드린 것 같네요. 그래서 당신의 답은 무엇인가요?”

일단은 저 질문에 답하며 초월자의 장단에 맞춰줘야겠다.

“우선 이화는 초월자님께 힘을 요구했을 거야.”

‘허영의 사내’와의 계약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이나은의 악몽에서 엿본 적 있다. 단숨에 강한 헌터가 될 수 있도록 힘을 주고, 그에 따른 대가를 취한다. 이화에게 힘을 준 초월자가 대가로 취했을 만한 건….

“초월자님께선 그런 이화에게 자신의 명령을 따르라는 대가를 부여하셨을 거고.”

“그게 당신의 답인가요? 안타깝게도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아직 내 말은 끝나지 않았어. 이화가 힘을 원했던 건,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야.”

부끄럽게도 이화가 ‘허영의 사내’랑 엮이게 된 건 나 때문인 듯싶다. 그러니 아까 전 여성 신도가 초월자가 내게 관심을 가졌던 건 이화의 오빠여서라는 둥 이화를 속박하는 용도로 이용한 데서 내 역할은 끝났다는 둥 툴툴거린 것이다.

자세한 내막까지는 모르겠지만, 멸망한 세상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이화는 ‘허영의 사내’에게 힘을 요구하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이화가 그쪽이 나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할까? 여전히 ‘허영의 사내’님을 따르려고 할까? 고작 나 하나 죽이는 걸로 이화를 잃는 건 아쉽지 않으시겠어?”

다시 한번 여성 신도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아무래도 내가 맹점을 찌른 것 같다. 덕분에 시간을 조금이나마 더 벌긴 했는데, 기분이 더럽다.

멸망 이후 동생에게 얼마나 큰 짐을 떠안겼던 건지…. 내가 좀 더 빨리 헌터가 되었더라면. 혹 F급 헌터가 아니었더라면 이화가 ‘허영의 사내’에게 손을 뻗을 일이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죄책감이 몰려왔다.

그런 내 기분을 알 리 없는 여성 신도는 초점이 돌아오자마자 ‘허영의 사내’의 말을 전해 주었다.

“초월자님께선 한참을 웃으셨어요.”

“왜지?”

“그분이 준비한 말이 정이화 헌터님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는 점이 미천한 존재임을 증명한 거나 다름없다네요.”

말?

“무엇보다 본인을 상대로 시간을 끌어 양측 헌금함을 부순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질 거 같냐며 어이없어하셨어요. 마지막으로 더 보여줄 천박한 묘기가 없으면 당장에 그쪽을 죽인 뒤, 정이화 헌터님과 그 동료까지 전부 죽이라고 명령하실 생각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동생을 걸고넘어지는 지금 상황조차 여흥 거리로 여겼던 건가.

“참고로 그분의 은총을 잔뜩 받은 전 SSS급 헌터. 당신의 동료 모두가 힘을 합쳐도 제 상대는 안 될 거예요.”

[‘빛나는 눈의 전략가’님이 근심 어린 표정을 짓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전 초월자님을 죽이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부동의 노인’님이 숨을 가쁘게 내쉬며 몸을 일으킵니다.]

[‘호색한 찬탈자’님이 플레이어 ‘정현’이 본인의 발언에 책임을 질 수 있는지 생각해 보길 권합니다.]

[‘번개의 아내’님이 속 시원해합니다.]

[‘방구석 만화광’님이 역사적인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숨을 죽입니다.]

[‘허영의 사내’님이 분노를 간신히 억누른 채 당신의 다음 발언을 기다립니다.]

“‘피의 살육자’님의 존재가 소멸했단 사실도 알고 있고요.”

백민기와 송태섭의 희생으로 강림한 ‘피의 살육자’가 있던 실험실이 폭파된 이후, 종종 드는 의문점이 있었다.

‘피의 살육자’가 강이란의 육신에서 빠져나와 초월자들이 지내는 공간으로 돌아갔더라면 당연히 우리를 괴롭혔어야 했다. 이상한 ‘후원 미션’을 부여하든, 후원자로 공격하든 강림을 방해한 우리에게 복수하기 위해 무슨 수를 써도 이상하지 않을 초월자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 ‘피의 살육자’가 우리 앞에 나타난 적은 없었다. 그 점이 의문이었는데 백민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초월자들은 유한함을 느끼고 싶어 이 땅에 강림하려 한다는 말. 거기에 해답이 있었다.

초월자들이 말한 유한함이란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는 거였다.

즉, 강림한 채 죽음을 맞이하면 그대로 소멸하게 되어 실험실이 폭파된 이후 ‘피의 살육자’가 나타나지 않았던 거였다.

다만, 이 사실을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초월력을 맘껏 사용하는 초월자를 상대로는 써먹을 방법이 없었기에 속에 묻어두고 있었다.

그랬는데 ‘허영의 사내’의 시선을 끄는 용도로 쓰게 될 줄이야.

[‘허영의 사내’님이 플레이어 ‘정현’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가늠해 봅니다.]

또다시 여성 신도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이것마저 통하지 않는다면 ‘CONTINUE?’ 특성을 사용해야겠다고 각오를 다지는데, 여성 신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분께서 당신을 지금 당장 봐야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더니 교회 바깥쪽을 향해 고갯짓했다.

“그분을 뵈러 가요.”

“그분을 뵌다고?”

곧장 밖으로 나가려는 여성 신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재촉했다.

“지금 그러고 서 계실 때가 아니에요. 어서 동작대교로 가죠.”

여성 신도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바짝 달라붙어 내 복부에 본인의 손을 얹은 채로 이동했다. 조금이라도 도망칠 기미가 보이는 순간,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이나 다름없는 태도에 별다른 저항도 못 하고 순순히 그녀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목적지인 동작대교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에야 여성 신도는 내게서 멀어졌다.

“곧 그분을 뵙게 될 테니, 옷매무새라도 가다듬으세요.”

“아까부터 그분을 뵐 거라니 대체 무슨….”

말하던 와중 눈에 들어온 풍경 탓에 입이 다물어졌다.

전면전이 벌어진 곳답게 동작대교는 피로 흥건해져 있었다. 다리 주변의 강물이 붉은색으로 변했을 정도이니, 얼마나 많은 인간과 수인이 피를 흘린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리 초입부터 늘어선 수많은 시체를 피해 나아가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네들은 대체 누구의 편인가?”

힘을 잃었으나 여전히 기품 있는 목소리다. 목소리의 주인인 렉스 영주는 얼마 안 가 만나볼 수 있었다.

“이 몸이 누구의 편이냐고? 가진 게 없으니, 아는 것도 적은 모양이군.”

렉스 영주는 그를 비웃는 사내의 검에 몸이 관통된 채 죽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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