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44화 (145/168)

[23. 철상지옥 (10)]

사내는 경멸스럽다는 표정으로 검을 비틀었다. 그 탓에 렉스 영주의 배엔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사내가 검을 뽑자 그 구멍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뿜어져 나왔고, 비틀거리다 앞으로 고꾸라진 렉스 영주는 본인의 피로 온몸을 적시게 되었다.

본인의 앞에 쓰러진 렉스 영주의 얼굴을 밟으며 사내는 말했다.

“본좌는 그 누구의 편도 아니다. 금으로 세상 모든 존재가 본좌의 편이 되도록 포섭할 수 있는데, 왜 굳이 누군가의 편을 들어줘야 하지? 본좌가 여기 있는 모두를 해한 건, 탐하고 싶은 만큼 가치 있는 존재가 없었기 때문. 즉, 아름답지 않았던 자네들의 잘못이다.”

이미 숨이 끊어진 렉스 영주를 유심히 바라보던 사내는 검을 잡지 않은 왼손을 뻗었다.

“어딜 봐도 너무 흉측하군. 아무리 봐도 아름다운 구석을 찾아볼 수 없어! 마지막까지 남아 본좌와 겨룬 자가 고작 이런 자였다니. 이래서야 어디 가서 말하기도 민망하겠어. 아무래도 본좌가 자네를 좀 더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줘야겠군.”

사내의 왼손이 닿은 직후 렉스 영주의 몸이 번쩍 빛났다. 그러곤 손길이 닿은 지점부터 시작하여 몸 전체가 차츰 황금빛으로 물들어 갔다.

사내는 침을 뚝뚝 흘리며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그 과정을 지켜보다가 별안간 우리 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런데 자네 둘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제야 사내의 얼굴을 정면에서 볼 수 있었다.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왠지 낯익다 싶은 목소리였는데, 사내의 정체는 시련이 시작되기 직전 히드라를 쓰러뜨릴 수 있도록 나를 도와줬던 서용현이었다. 춘천에 있어야 할 그가 지금 여기 있단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그의 눈이 완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는 거다.

“본좌의 제물을 탐하는 자인가? 아니면 본좌에게 제물을 바치려는 자인가?”

서용현의 눈이 붉게 물들었단 건 오직 한 가지를 의미했다.

그의 몸에 초월자가 강림해 있다.

“‘낮은 시선의 소유자’님, 저는 지금 ‘허영의 사내’님께 이분을 데려가는 중입니다.”

불길한 예감이 적중한 것 같다. 현재 서용현의 몸에는 ‘낮은 시선의 소유자’란 초월자가 강림한 상태고, 교주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당시, 서용현은 ‘히드라’를 손쉽게 잡을 정도로 강한 SS급 헌터였다. 그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그의 스탯이 0일 리는 없었다. 다시 말해 그의 몸에 초월자가 강림하는 것은 불가능하단 소리다.

그런데 어째서 ‘낮은 시선의 소유자’가 그의 몸에 강림할 수 있었던 거지? 스탯을 0으로 만들려는 실험은 모두 실패했다고 들었는데, 실은 성공했었던 건가.

“혹시 지나가도 괜찮을까요?”

여성 신도의 물음에 ‘낮은 시선의 소유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맘때쯤이면 그도 도착해 있겠군. 가서 전해 주게. 본좌는 할 일을 마쳤으니 이제 가치 있는 것들을 탐하러 가보겠다고.”

“네. 그렇게 전해드릴게요.”

“잠깐.”

‘낮은 시선의 소유자’가 검을 우리 쪽으로 겨눴다.

“자네, 괴수로 요리 만드는 자 아닌가? 자네 덕분에 시련을 지켜보는 게 즐거웠네.”

‘낮은 시선의 소유자’는 신기하다는 듯 위아래로 나를 훑었다. 그러곤 왼손을 내밀었다. 분명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았었는데, 그의 왼손에서 금화가 쏟아져 나왔다.

“이걸 받고 본좌의 광대가 되지 않겠는가? 자네가 본좌를 즐겁게 해줄 때마다, 이만큼의 금화를 주지.”

아까 전 금으로 변해가는 렉스 영주의 시체를 볼 때처럼 ‘낮은 시선의 소유자’는 침을 잔뜩 흘리며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여성 신도가 나섰다.

“‘허영의 사내’님을 뵙는 게 우선이에요. 이분을 광대로 고용하는 건 그다음에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허영의 사내’란 이름을 들은 ‘낮은 시선의 소유자’는 살짝 움찔하더니 뒤로 물러섰다.

“자네들이 이곳에 온 목적이 그 때문이었지. 그래, 가봐도 좋네.”

초월자의 허락이 떨어지자 여성 신도는 내 등을 밀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낮은 시선의 소유자’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주변의 시체를 걷어차며 중얼거렸다.

“아름답지 않아. 빛나지 않아. 아랫것들은 원래 이렇게 볼품없는 건가? 본좌가 전부 거두어야겠군. 그런 다음 이들에게 가치란 무엇인지 알려줘야겠어.”

‘낮은 시선의 소유자’를 지나쳐 더 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다리의 중반부에 이르자, 여성 신도는 나를 멈춰 세웠다.

“저기 계시네요.”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여전히 전투 중인 두 남녀와 그를 지켜보는 한 노파가 있었다.

[고유 능력 ‘오만’이 발동됩니다.]

[일정 시간 동안, 적을 쓰러뜨리지 못해 플레이어 ‘이나은’의 모든 스탯이 3배로 상승합니다.]

홀로 남아 싸움을 이어가던 사람은 이나은. 그녀는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플레이어 ‘이나은’이 ‘안차기’ 기술에 성공하였습니다.]

[3점 득점으로, ‘힘’이 3배 적용된 피해를 입힙니다.]

[플레이어 ‘이나은’이 ‘거듭차기’ 기술에 성공하였습니다.]

[이전 성공한 기술이 ‘힘’이 2배 적용된 피해를 입힙니다.]

[플레이어 ‘이나은’이 ‘안차기’ 기술에 성공하였습니다.]

[3점 득점으로, ‘힘’이 6배 적용된 피해를 입힙니다.]

이나은은 연속해서 세 번 발날등으로 남성의 얼굴을 걷어찬 뒤, 발을 휘두른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몸에 붙은 가속도로 공중에서 반 바퀴 돈 이나은은 반대 발로 다시 한번 남성의 얼굴을 걷어찼다.

한 번 한 번의 공격이 적중할 때마다 남성의 코와 입에선 피가 터져 나왔다. 그 정도로 이나은의 발차기는 위력이 엄청났다.

상대에게 밀리지 않고 있어 안심되면서도, 고유 능력 ‘오만’이 발동되었단 점이 마음에 걸렸다. 이나은의 고유 능력 ‘오만’은 동료가 죽었을 때 발동된다. 즉, 이나은과 함께 전면전에 참여한 일행 중 누군가 저 남자에게 살해당했단 뜻.

아까 ‘이면’으로 옮겨달라는 말에 박다현의 대답이 없던 건, 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면’으로 우리를 옮겨줄 만큼, 상황이 여의치 않았거나 아니면…. 아니면 저 남자에게 살해당한 사람이….

“제길.”

불길한 생각에 욕설을 내뱉는데, 이나은이 기합을 내질렀다.

공중에서 수십 번 발차기를 휘두르던 이나은은 결정타로 남성의 복부를 강하게 걷어찼고, 그 충격에 남성은 저 멀리 날아가 기둥에 부딪혔다.

남성이 기둥에 부딪히며 난 엄청난 소리로 보아 등뼈가 완전히 으스러진 게 틀림없을 텐데도 이나은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순식간에 남성에게 달라붙은 이나은은 주먹을 난사했고, 그 충격파에 기둥엔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결국 금이 더욱 벌어져 기둥이 무너지고서야 이나은은 공격을 멈추고 남성에게서 멀어졌다.

그렇게 이나은의 승리로 전투가 끝났다고 생각할 때, 남성이 말했다.

“역시 네깟 것도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군.”

남성은 머리 위로 손을 뻗어 자신 위로 떨어지는 기둥 잔해를 받쳤다. 그 잔해 위에 또 다른 기둥 잔해들이 쌓이는 와중에도 남성은 전혀 힘들지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본인의 손바닥 위에 쌓인 기둥 잔해들을 옆으로 내던진 남성은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그런 남성의 상태는 이나은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멀쩡해 보였다.

남성은 본인의 코와 입에서 흐르는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보곤 미친 듯이 웃어댔다.

“온몸이 뜨거우면서 따끔하군. 고통을 느낀다는 게 바로 이런 거였어!”

남성이 몸을 비틀자 뿌드득 소리와 함께 그의 등뼈가 맞춰졌다.

“하지만 이거로는 부족한 것 같군. 이대로 저깟 미물과 더 놀아준다고 해서 죽음의 두려움까진 느낄 수 없겠지.”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남성의 눈 역시 서용현의 눈처럼 완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침내 그가 누구인지 보일 만큼 가까워지자 여성 신도가 외쳤다.

“‘허영의 사내’님, 드디어 오셨군요! 이제야 모든 걸 불태울 시간이 된 거예요!”

여성 신도의 시선은 남성에게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 황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여성 신도는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반면에 내 표정은 완전히 일그러졌다.

눈이 붉게 물든 사내는 바로 우리 삼촌이었다. 삼촌의 몸에 강림한 ‘허영의 사내’는 나를 향해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고작 네깟 것이 이 몸의 존재를 소멸시킬 방법을 알고 있다고? 우습군. 우스워! 네깟 것은 이 몸은커녕 다른 미물들의 몸에 강림한 초월자조차 소멸시키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데. 혹시 이 몸의 안목이 잘못되었나?”

방금까지 전투를 벌이던 이나은은 완전히 무시한 채 ‘허영의 사내’는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아니면 그 말조차 이 몸의 시선을 끌려고 내뱉은 말이었나? 상자 쪼가리를 불태우면 어떻게든 하찮은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럼 기다려 주지. 네깟 것의 희망을 짓밟기 위해선 상자 쪼가리 하나 불타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지.”

잠깐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이나은은 주먹을 쥐더니 ‘허영의 사내’에게 또 한 번 덤벼들었다. 그러나 ‘허영의 사내’가 입을 연 순간.

“이 몸이 요구한 대가를 받을 때가 되었군.”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간 듯 이나은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빌려온 힘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네깟 것의 몸에도 들어가고 싶다는 초월자가 있었다. 그러니 모든 스탯이 0이 되었다고 낙심해서 괜히 죽지는 말라.”

그렇게 말한 ‘허영의 사내’는 노파를 향해 고갯짓했다. 그러자 노파는 들고 있던 삼지창을 이나은 쪽으로 뻗었다. 삼지창의 창날에선 거대한 거품이 나오더니, 곧 이나은을 휘감았다.

이나은이 거품 속에 갇혀 무기력하게 허우적댈 때, 모두의 앞에 글씨가 새겨졌다.

[8202-N 구역의 헌금함이 파괴되었습니다.]

헌금함이 파괴되었다는 글씨를 읽은 ‘허영의 사내’는 코웃음 치며 내게 다가왔다.

“네깟 것이 원하는 대로 헌금함이 모두 파괴되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지? ‘퀴네에’라도 써서 이곳에서 도망칠 건가?”

최소 둘. 혹은 그 이상의 초월자가 동작대교에 강림한 상황. ‘허영의 사내’ 말대로 헌금함 두 개를 불태운다고 해서 파훼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깟 조작된 ‘시련’ 따위에 목숨 걸고 덤비다니, 그야말로 미물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군.”

애당초 이번 시련의 최우선 목표를 잘못 잡았다.

‘허영의 사내’와 ‘낮은 시선의 소유자’ 소멸. 그를 목표로 해야 했는데,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상대를 알고 말았다.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뿐.

“궁중 식도.”

“네깟 것도 모든 스탯 0인 미물 아니었나? 그 조그만 검으로 발악이라도 할 생각인가?”

이번 시련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보았다. 그럼 이제 해결 편으로 넘어갈 차례.

마지막으로 ‘허영의 사내’를 노려본 난 궁중 식도로 팔목을 그었다.

[죽음의 경계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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