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철상지옥 (11)]
궁중 식도로 그은 손목 부근에서 시큰거리는 열기가 느껴졌다. 입술을 깨물어 억지로 입을 다물지 않는다면 금방이라도 고통 섞인 비명을 내지를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고통을 느끼는 데 낭비하는 시간조차 아까워, 통증은 애써 무시한 채 곧장 초월자에게 물었다.
“확인할 게 있어.”
‘죽음의 경계’에서 ‘크로노스’와 단둘이 대화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강림의 조건을 확인할 기회였다.
강림의 조건으로 내가 알고 있는 건 총 세 가지. ‘제물’, ‘진명’, 그리고 ‘모든 스탯 0’.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서용현과 삼촌의 몸에 초월자가 강림하며 ‘모든 스탯 0’이란 조건이 맞는지 불분명해졌다.
「자네는 제대로 알고 있다네.」
“제대로 알고 있다고? 그러면 회사 측에서 모든 스탯을 0으로 만들 방법을 결국엔 찾았다는 거잖아.”
아무래도 회사가 서울에서 물러났던 건, 우리 세력에 밀려서가 아니었던 것 같다. 모든 스탯을 0으로 만들 방법을 찾아 더는 서울에 있을 필요가 없어졌기에 물러났던 거였다. 그랬던 그들이 ‘인간계’와 ‘축생계’가 합쳐진 이후 다시 서울에 얼굴을 비치기 시작한 이유는….
“‘캠비온 녹스’를 확보하는 게 그만큼 중요했단 건가.”
‘캠비온 녹스’를 확보하려는 이유가 그들의 목적에 필요해서든 방해돼서든 간에 중요한 건, 회사보다 먼저 그를 찾아야 한단 거다. 그러려면….
“그러고 보니 헌금함이 있는 방에서 ‘캠비온’의 시체를 봤었지.”
교주가 그를 죽이기 전에 접촉하면, 그 ‘캠비온’을 통해서 ‘캠비온 녹스’를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캠비온 녹스’를 만난다면, 회사에서 왜 그를 원하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으려나?”
정보가 부족한 현재 상황에서 그 외에 선택지는 없는 것 같다.
「‘캠비온’부터 찾으려는 건가?」
“우선은.”
「우선이라면?」
“‘캠비온 녹스’를 확보한다고 해도 ‘허영의 사내’나 ‘낮은 시선의 소유자’를 억제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직 모르니깐, 다음 수도 생각해야지.”
「다음 수로 생각해 둔 건 있나?」
“서용현 헌터랑 삼촌의 모든 스탯이 0이 아니라면, 애당초 초월자들이 강림하지 못하는 거잖아. 그 둘의 스탯이 어째서 0이 됐고, 그를 막을 순 없는지도 알아봐야지. 만약 그것조차 실패한다면….”
강이란을 쓰러뜨렸을 때처럼 죽음을 거듭하며 직접 싸우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강림한 초월자와 직접 싸우겠다는 건가. 그다지 자신은 없어 보이는군.」
“당연하지. 죽음을 무한히 반복한다고 해서 내가 초월력을 쓰는 초월자를 둘씩이나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진 않거든. 그러니 거기까지 상황이 흘러가기 전에 초월자들이 강림할 수 없도록 최대한 막아봐야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언 하나 하겠네.」
“여태껏 구경하면서 즐기기만 하다가 갑자기?”
「‘캠비온 녹스’를 만날 때, 필시 김화영 헌터와 함께 있게나.」
「처음이자 마지막 조언이니, 귀담아들었길 바라네.」
「그럼 이 몸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안겨줄 수 있길 빌어보지.」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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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전면전이 선포되었네.”
‘크로노스’의 조언을 끝으로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분주히 움직이는 주민들 사이, 근심스러운 표정의 노인이 김화영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평화 협상을 위해 내보낸 사신이 인간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면서 가만히 놓아둘 수 없다고 하더군. 본인들과 끝장을 보던가, 사죄의 의미로 세력 내 인간을 전부 죽이던가. 둘 중 하나를 오늘 자정까지 선택하라고 엄포를 놓았네.”
노인의 설명을 들은 이화가 물었다.
“저희 주둔지의 답변은요?”
물음에 노인은 주둔지 일원들이 바삐 움직이는 쪽을 향해 고갯짓했고, 그 뜻을 이해한 듯 이화는 고개를 주억였다.
“렉스 영주의 뜻이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 주둔지에선 본래 계획대로 전면전에 응하기로 했다네. 그래서 전투가 벌어지게 될 동작대교 쪽으로 장비를 옮기기 시작했네. 몇몇 인원은 그곳으로 가 최전선을 확보하고 있고.”
“이나은 헌터랑 동현이 형은 이미 동작대교에 가 있나요?”
“그렇지. 아마 지금쯤 도착해 있을 거네.”
타이밍이 안 좋다.
강림한 초월자 둘이 나타나 강경파, 온건파 가릴 것 없이 모든 수인과 인간을 쓸어버릴 동작대교엔 우리 일행을 보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엔간하면 귀환했을 때, 일행 전부가 뭉쳐 있어 계획을 변경하고 그를 전할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이미 일행이 사방으로 흩어진 후니, 그럴 순 없을 것 같다.
그나마 내게 있어 다행인 건, 전면전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강림한 초월자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적어도 이화가 강경파 측 헌금함을 불태우기 위해 ‘이면’에서 빠져나올 때까진 강림한 초월자는 움직이지 않았을 거다.
박다현과 ‘이면’을 통한 연락이 안 되기 시작한 건 그 이후부터다. 아마 강림한 초월자가 동작대교에 모습을 드러냈기에 ‘이면’으로 들여보내달라는 내 부탁에도 박다현의 답변이 없었던 거겠지.
그렇다면 이나은과 동현이 형을 동작대교에서 빼낼 기회가 없는 건 아니었다.
“연락 수단도 전달했으니, 이만 나도 위치로 이동하겠네.”
헌금함을 지키러 이동하는 무리에 합류한 노인이 떠나자, 김화영이 물었다.
“우린 언제 성으로 갈 거야?”
“지금 당장이요.”
“어? 전면전 시작되면 가는 거 아니었어? 워울프랑 그렇게 말 맞췄잖아.”
“먼저 가서 상황이라도 살피고 있으려고. 어차피 ‘퀴네에’ 쓰면 내 모습 감추는 건 일도 아니니깐 상관없잖아. 혹시 따로 준비할 거라도 있어?”
“난 준비는 항상 돼 있어!”
순식간에 단검 몇 개를 꺼내든 김화영을 보고 이화도 딱히 더 준비할 건 없다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 언제나 그랬듯 현이랑 함께라면 이번 시련도 결국엔 잘 마무리될 거니깐.”
***
수연이에게 유리 조각을 맡긴 우린 성내로 이동했다. ‘이면’을 통해 성에 도착하자마자 ‘퀴네에’를 쓴 난, 전면전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복도로 나섰다. 그런 다음 교주가 학살극을 펼치고 있지 않길 기도하며 헌금함이 있는 방으로 곧장 달려갔다.
복도 곳곳엔 순찰 중인 완전무장 한 수인들이 있었다. 저들이 멀쩡히 돌아다니는 걸 보니 아직까진 내 기도가 이뤄지고 있는 것 같다.
5번 복도로 가기 위해 모퉁이를 돌았음에도 내장을 쏟은 채 죽어 있는 수인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여기는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교주는 왜 강경파 측 헌금함까지 이어진 길을 뚫어놓았던 거지? 정말로 우리가 헌금함을 불태워주길 바랐던 건가?”
그 외에 교주가 굳이 학살극을 펼칠만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확실한 건, 시련이 시작될 당시 우리와 같은 공간에 있었던 교주 역시 강경파에 속해있다는 거다. 그런 사람이 강경파 측 헌금함만이 파괴되는 걸 원할 리는 없다. 아마 그녀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양측 헌금함을 모두 파괴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회사 측 헌터들도 강경파랑 온건파로 인원이 흩어진 건가?”
이유를 추측하다 보니, 헌금함이 있던 방 앞에 도달했다. 그런데 방안에선 누군가의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자 눈살이 찌푸려지는 광경이 보였다.
“‘캠비온 녹스’님이 어디 숨어 계신지 정말 모르세요? 자꾸 모른다고만 답하시면 전 당신을 고통스럽게 만들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협박하며 교주는 ‘캠비온’의 어깻죽지에 손가락을 쑤셔 넣고 있었다. 손가락은 살을 그대로 관통하여 등 뒤로 빠져나온 채였다.
“제발, 제가 이 이상 당신에게 고통을 안기지 않게 해주세요. 모두를 위해 ‘캠비온 녹스’님을 찾는 중인데, 당신이 왜 고통받아야 하는 거죠?”
“‘캠비온 녹스’는 왜 만나고 싶어 하는 거지? 결국엔 너도 ‘시련’의 메인 MC를 맡았던 그에게 복수하려는 것 아닌가?”
“전혀요. 제가 왜 그에게 복수하고 싶어 하겠어요? 그가 있어야,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걸요.”
“구원?”
“‘캠비온 녹스’님이 시스템을 조작해 주어야 그분들이 이곳에 자유로이 내려오시고, 저희를 그분들이 계셨던 곳으로 보내줄 수 있거든요.”
교주는 검지에 이어 중지까지 ‘캠비온’의 어깻죽지에 쑤셔 넣었다. 그 고통에 ‘캠비온’이 비명을 지르려고 하자, 교주는 반대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온건파에 속한 ‘캠비온’ 종족 전체를 대표해 여기 있는 헌금함을 불태우러 오신 거죠? 저도 그래요.”
“네가 우리 ‘캠비온’을 신경 쓸 이유가 어디 있다고?”
“온건파에 속한 분들이 시련을 클리어하지 못해서 죽게 된다면 ‘캠비온 녹스’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여기 있는 헌금함과 저편에 있는 헌금함을 모두 불태울 생각이었어요.”
회사 측이 갈라져서가 아니라, 순전히 ‘캠비온 녹스’를 살려두기 위해 양측 헌금함을 불태우려 한 거였나.
“그러니 저희는 같은 편이나 다름없어요.”
“…같은 편이라면서, 지금 하는 행동은 뭐지?”
“같은 편이 잘못된 행동을 한다면, 벌을 주어서라도 고쳐야 하잖아요? 그래서 ‘캠비온 녹스’님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죠?”
교주의 검지와 중지는 차츰 아래로 내려갔다. 그에 ‘캠비온’의 몸에 뚫린 구멍은 점차 아래로 넓혀졌다.
“만약 제가 찾지 못한다면, 그분들께서 직접 나서서 ‘캠비온 녹스’님을 찾아보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러니 마지막 기회를 드릴 때, 말씀해 주세요.”
회사는 시스템을 조작하기 위해 ‘캠비온 녹스’를 필요로 하고 있단 것과 여기서 교주가 ‘캠비온 녹스’에 관한 정보를 얻지 못해 초월자들이 동작대교에 나타났단 것까진 알아냈다. 맘 같아선 조금 더 정보를 얻고 싶지만, 이대로 지켜봤다간 ‘캠비온’이 목숨을 잃게 될 것만 같아 ‘퀴네에’를 벗었다.
‘퀴네에’를 벗자,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이화가 다급히 물었다.
“오빠, 지금 뭐 해? 저렇게 위험해 보이는 사람 앞에서 왜 모습을 드러낸 거야?”
그와 동시에 글씨가 새겨졌다.
[‘폐허가 뒤따르는 자’님이 수없이 많은 죽음이 따르길 축복합니다.]
[‘빛나는 눈의 전략가’님이 큰 피해 없이 전투가 끝나길 기원합니다.]
전면전은 시작되었고, 초월자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열쇠인 ‘캠비온’은 죽기 직전의 상황에 놓여 있다. 여기서 시간을 허투루 썼다간, 귀환한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일 초도 낭비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유리 조각에 대고 속사포로 말했다.
“지금부터 난 저 둘의 틈을 벌릴 거야. 그러면 박다현 헌터는 ‘캠비온’, 그러니까 수인만 ‘이면’에 들여보내. 그 사이에 이화는 헌금함을 불태우고. ‘캠비온’을 ‘이면’에 들여보내고, 이화가 헌금함까지 불태우면 다 같이 여기서 벗어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