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철상지옥 (12)]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리 조각에서 엄청난 세기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직 ‘캠비온’에게서 교주를 떨어뜨려 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화가 ‘이면’ 밖으로 나오는 듯했다.
원래대로라면 ‘허영의 사내’의 이목을 끌어 교주가 관심을 내게 돌릴 수밖에 없도록 만들려고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즐기던 와중에 방해해서 미안한데, 잠깐 이쪽 좀 봐줄래?”
계획을 틀어 교주를 불렀으나 그녀는 여전히 ‘캠비온’을 고문하는 데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별안간 내가 튀어나왔단 걸 모를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을 보면, ‘캠비온’에게 정보를 뜯어내는 것이 우선순위라고 판단한 게 틀림없었다.
“숨어있다가 튀어나온 사람한테 반응이 너무 박한 거 아니야?”
“안 그래도 당신이 저 몰래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방법을 궁금해하던 차였어요. 이분 바로 다음이 당신 차례이니 잠시 기다려 주세요.”
“나한테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어서 잠자코 기다리진 못할 것 같아. 회사를 후원하는 초월자님들. 정확히 말해서 ‘낮은 시선의 소유자’님과 ‘허영의 사내’님께서 강림하시기 전에 그쪽하고 이야기를 끝마쳐야만 하거든.”
[‘낮은 시선의 소유자’님이 당신의 혜안에 탐욕스럽게 입맛을 다십니다.]
[‘허영의 사내’님이 한낱 플레이어 따위가 본인의 계획을 읽었다는 사실에 평정심을 잃습니다.]
초월자 둘이 반응하자마자 교주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분들의 성함을 당신이 어떻게….”
“빙고. 이제야 날 봐주는구나.”
덕분에 유리 조각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교주의 눈에 정확히 꽂혔다. 그 빛을 바라본 교주는 뒤로 물러서며 한 손으로 자신의 눈앞을 가렸다. 그와 거의 동시에 ‘이면’에서 이화가 튀어나왔다.
이화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우산을 들어 올렸다. 곧 우산에서 불길이 일었고, 그 불길은 앞으로 뻗어나가더니 헌금함을 집어삼키기에 이르렀다.
헌금함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잦아들 때 즈음 검은 재가 흩날리며 글씨가 새겨졌다.
[8202-S 구역의 헌금함이 파괴되었습니다.]
헌금함은 무사히 파괴했으니 이제 남은 건 ‘캠비온’을 데려가는 건데. 문제는 교주의 손가락이 여전히 ‘캠비온’의 몸에 꽂혀있단 거였다. 당연하게도 저대로는 ‘캠비온’을 ‘이면’으로 데려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화가 교주를 상대하게 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컸다.
이화가 ‘이면’에서 빠져나온 직후, 유리 조각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은 사라졌다. 따라서 교주의 시야는 이미 자유로워진 상태였다. 교주가 아직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건, 순전히 그녀 역시 헌금함이 파괴되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캠비온’이 엮여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얻어내야 할 정보가 있는 그녀가 순순히 ‘캠비온’을 넘겨줄 리는 없었다. 만약 우리가 ‘캠비온’을 빼가려는 걸 눈치라도 챘을 시엔 그 즉시 움직임을 보일 게 뻔했다.
아무리 이화라고 할지라도 SSS급 헌터인 교주에겐 고전할 수밖에 없고, 지난번처럼 ‘허영의 사내’가 개입하기라도 했다간 교주에게 맞서기조차 어려워질 것이었다. 뭣보다 여기서 시간이 지체되면 강림한 초월자 둘이 동작대교에 나타나기 전에 일행을 빼낼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이화가 교주를 상대하는 것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이래서 내가 ‘캠비온’하고 저 여자 신도를 떨어뜨리고 나면 나오라고 한 건데.”
“오빠 혼자 저 여자를 상대하게 놔둘 순 없잖아. 그리고 나도 아무 생각 없이 무턱대고 나온 건 아니거든?”
그렇게 말하며 이화는 내 손에 들린 유리 조각을 채 갔다.
“다현아, 부탁할게.”
이화가 부탁하자마자 다시 한번 유리 조각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화는 빛이 교주에게 향하도록 한 뒤, 유리 조각을 내게 건넸다.
“오빠, 받아.”
얼떨결에 유리 조각을 받아 드니 이화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빛줄기를 따라 달린 이화가 힘차게 우산을 휘두르자 불길이 일었다. 빛줄기를 가르고 허공에 번진 불길이 사그라들었을 땐, 아까까지 그 위치에 서 있던 교주의 모습이 사라진 후였다.
“두 번이나 빛 때문에 고생하게 될 줄이야. 남매끼리 비겁한 거 하난 똑같군요.”
빛으로 시야를 차단한 틈을 타 가한 공격을 가뿐하게 피한 교주는 어느새 방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제가 초대하기도 전에 스스로 찾아와서 헌금함을 불태워준 점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몰래 숨어 들어온 건 용서하고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는데, 이런 식으로 지켜야 할 선을 넘으시면 안 되죠.”
타이르듯 말하던 교주가 별안간 입을 다물었다. 그에 이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직 할 말 남아있던 거 아녔어?”
“지금 무얼 하려는 건지 알고 계신 건가요?”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입을 연 교주의 시선은 이화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엔 김화영이 있었다.
김화영이 ‘캠비온’을 향해 손을 뻗는 걸 보고서야 이화의 계획을 깨달았다.
유리 조각이 다시 빛났던 건, 김화영이 ‘이면’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이었으며. 이화가 공격을 가했던 건, 교주가 ‘캠비온’에게서 떨어질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짧은 순간 이화가 내린 판단 덕분에 김화영의 손은 무사히 ‘캠비온’에게 닿을 수 있게 되었다.
“응! 이 친구 데려가려고. 많이 아파 보이는데,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해줘야지.”
“여러분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끌어낼지 알고 계시긴 한 건가요? 지금이라도 멈추신다면….”
교주의 제안을 완전히 무시한 채 이화가 외쳤다.
“저희는 걱정하지 말고 먼저 가세요!”
그를 듣자마자 김화영과 ‘캠비온’은 방 안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안 돼요. 안 된다고요! 제가 그분과 대화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세요? 이제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이대로면 구원은…. 구원은….”
좌절하던 주교의 눈빛이 돌변했다. 우리를 기어이 죽이고야 말겠다는 눈빛이다.
“남매 둘이서 쌍으로 X 같은 짓이나 하고. XX! 네깟 놈들 때문에 구원이 취소된다면 어쩌려고 그래? 인류의 미래가 사라지게 된다고 해서 직접 책임질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이기적인 거지? 초월자님들께서 인간의 이기심을 벌하려고 부여한 시련을 겪어 왔으면서 여태 배운 게 없는 거야? 인류의 존속을 위해서는 모두가 힘을 합쳐야만 한다는 간단한 사실조차 왜 모르고 있는 건데, XXXXX!”
주교의 욕설에 이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입이 좀 험하시네. 그런다고 우리가 그쪽 고생까지 생각해 줄 일은 없으니까, 괜히 힘 빼지 마.”
이화는 양손을 뻗어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취한 채 자연스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동생이 따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박다현 헌터, 당장 우리를 ‘이면’에 들여보내 줘.”
그렇게 말하며 나와 이화만이 비치도록 유리 조각을 움직였다.
“XX! 가지 마!”
살의를 띤 교주가 욕설을 내뱉으며 달려드는 게 보였으나, 이미 주변 풍경은 일렁이기 시작한 후였다.
완전히 ‘이면’ 속으로 들어오니 이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귀찮아질 뻔했네. 오빠, 다음부턴 아무 상의 없이 적 앞에 모습 드러내지 말아 줘.”
“‘캠비온’을 놓칠 순 없어서 급한 대로 어떻게든 해 보려고 한 거였는데, 덕분에 잘 풀렸다.”
감사함을 표하며 김화영이 ‘캠비온’을 어디로 데려간 건지 물었다.
“몸에 난 상처가 심해 보여서 치료부터 받으라고 수연 언니한테 보냈어. 그보다 ‘낮은 시선의 소유자’님과 ‘허영의 사내’님이 강림한다니, 정말이야?”
고개를 끄덕이자 이화의 표정이 굳었다.
“큰일이네.”
이화는 양 볼을 번갈아 가며 부풀리다가 생각이 정리되었다며 말했다.
“오빠가 강림한다고 말한 초월자님 두 분 다 회사를 후원하고 있댔지?”
“어.”
“두 분 모두 우리에게 적대적일 가능성이 크단 거네.”
“아마 그럴 거야.”
“그러면 두 분 강림하시기 전에 남은 헌금함부터 불태운 다음 다른 일행 데리고 도망치든 숨든 하자. 강림한 초월자님께는 맞설 수 없으니까, 이게 최선인 것 같은데?”
우리에게 적대적인 초월자가 둘씩이나 강림한다는 사실을 듣고 나면 두려울 법도 한데, 이화는 너무나 침착하게 대응 방안을 제시했다.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나도 그게 최선인 것 같아.”
동의의 뜻을 밝히니 이화가 박다현을 불렀다.
“다현아, 지금 바로 임성윤 헌터 계신 쪽으로 내보내 줄 수 있어?”
“있지! 오빠랑 언니, 둘 다 보내주면 돼?”
이화가 답하기 전에 말을 가로챘다.
“아니, 이화만 내보내면 돼. 괜히 함께 갔다가 짐 되고 싶진 않거든. 너도 그게 낫지?”
“그게 낫긴 한데, 오빠 뭐 꾸미고 있는 건 아니지? 내가 아는 오빠는 이렇게 순순히 안 간다고 할 사람이 아닌데….”
“그런 거 아니니까 조심해서 다녀와. 시간 없으니까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해.”
추궁이 더 이어지기 전에 초월자가 강림하기까지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점을 들며 서둘러 남은 헌금함도 불태워달라고 재촉했다. 결국 미심쩍어하던 이화는 추궁하던 걸 접고 ‘이면’ 밖으로 나섰다.
이화가 ‘이면’ 밖으로 나선 뒤, 곧장 박다현을 향해 말했다.
“박다현 헌터, 난 동작대교 쪽으로 내보내 줘.”
“이화 언니 말이 맞았다! 오빠, 이화 언니 몰래 뭐 꾸미고 있는 거지?”
물음에 답하는 대신, 코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이화한텐 비밀로 해줄 거지? 비밀만 잘 지켜주면, 모든 일이 다 마무리되었을 때 원 없이 놀아줄게.”
“정말?”
“그리고 또 한 가지. 이화가 다른 사람들하고 여기로 돌아와도 절대! 절대로 동작대교로 내보내 주면 안 돼.”
귀환 전, 강림한 ‘허영의 사내’와 이나은 간의 전투에서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허영의 사내’가 요구한 대가를 받겠다고 하자마자 새겨진 글씨였다.
빌려온 힘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글씨가 새겨진 후. 초월자는 이나은에게 모든 스탯이 0이 되었다고 낙심하지는 말라 했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글씨가 새겨진 이후, 이나은의 모든 스탯이 0이 되었다면.
‘허영의 사내’는 본인이 계약한 헌터에게 부여했던 힘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끔찍한 결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정확한 건 알 수 없었지만, 이화 역시 언제든 힘을 빼앗길 수 있기에 ‘허영의 사내’와는 마주하지 않도록 보험을 들어야만 했다.
“알겠지?”
“응! 그럼 오빠도 내보내 줄게. 조심해야 해.”
박다현이 당차게 말한 뒤, 주변 풍경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일그러짐이 사라지고 ‘이면’ 밖으로 나오자 혼비백산해서 움직이는 수많은 수인과 인간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