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47화 (148/168)

[23. 철상지옥 (13)]

강경파, 온건파 가릴 것 없이 한데 섞인 이들은 어떻게든 동작대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들은 전면전을 위해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망각한 듯,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채 다리의 중심부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리 떨어지려 하는 중이었다.

그중에는 불길한 말을 중얼거리는 사람도.

“…한 사람한테 모두가 당했어. 겨우 한 사람한테.”

본인이 오줌을 지렸는지도 모른 채 비틀거리는 수인도 있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헌터들이 다리의 중심부 쪽에서 쏟아져 나왔는데, 그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 때문인지 저 멀리서 강경파 측 지휘관으로 보이는 까마귀 수인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었음에도 명령에 따르는 수인은 없었다. 까마귀 수인의 정반대편, 온건파 측 지휘관인 렉스 영주의 상황도 별반 다를 건 없었다.

전투가 더 이어질 수 없다는 현 사태를 직시했는지 렉스 영주는 병력이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도록 통제하는 데에 최대한 집중하고 있었지만, 헌터들은 그를 밀치고 도망치기 바빴다.

이처럼 동작대교에 있는 수많은 헌터가 일제히 공포에 질릴 법한 이유로 떠오르는 건 한 가지밖에 없었다.

초월자의 강림.

“‘캠비온’을 빼앗겨서 전보다 좀 더 일찍 강림한 건가?”

자세한 내막을 알고 싶었으나 도망치는 헌터를 붙잡아 물어본다고 해서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다리의 중심부에 직접 가보지 않는 이상 따로 초월자의 강림 여부를 확인할 방법은 없으니 우선 다른 일행하고 합류부터 해야겠다.

“그나저나 동현이 형하고 이나은 헌터는 어디로 간 거지?”

다른 일행하고 합류해야겠다고 정하고서야 내가 튀어나온 유리 조각이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현이 형이나 이나은이 들고 있어야 할 유리 조각이 이렇게 널브러져 있다는 건 결코 좋은 의미일 리 없었다.

불길한 예감에 렉스 영주에게로 뛰어갔다.

“강경파 측 헌금함은 파괴되었으니, 이제 무사히 이곳에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된다! 본인이 평정을 되찾아야만 하나라도 더 많은 인원이 다리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모두 평정심을 유지해라!”

다리 바깥쪽으로 몰려드는 인파 속, 렉스 영주는 어떻게든 지휘체계를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귀 기울인 몇몇 헌터조차 곧 주변의 공포에 잠식되어 다시 평정심을 잃고야 말았다.

렉스 영주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나를 발견했는지 호위병을 시켜 본인 앞의 인파를 헤쳤다. 덕분에 렉스 영주 바로 앞까지 빠르게 도달할 수 있었다.

“자네, 왜 여기 있는 건가? 분명 자네의 주둔지에서 대기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

“그랬는데 사정이 좀 생겨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본래라면 ‘베헤모스’를 쓰러뜨린 자네가 합류했단 사실에 기뻐했겠지만, 보시다시피 지금 전황이 좋지 않네. 아니. 더는 전황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겠군. 전투를 벌이는 이들은 온데간데없고 도망치기 바쁜 이들만이 남았으니.”

“전면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다들 도망치고 있는 겁니까?”

동작대교에서의 전면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묻자 렉스 영주는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퇴각하는 것 자체는 이 몸이 내린 명령이라네. 전투가 벌어진 지 얼마 안 되어 강경파 측 헌금함이 파괴되었다는 글씨가 새겨졌거든. 굳이 아까운 목숨을 잃을 필욘 없으니 전투가 커지기 전에 퇴각하는 게 옳다고 여겼네.”

“그런데 여태껏 여기 남아있다는 건….”

“강경파 측 헌터들이 본인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라며 하나라도 더 데려가겠다고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네. 그래서 최전선을 구축한 뒤, 다리를 폭파해 추격조부터 뿌리치고 물러나려 하는 바람에 퇴각이 지체되었지.”

하지만 렉스 영주가 말한 내용만으로는 양측 모두가 공포에 질려 도망치고 있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았다.

“영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다르게 이 주변의 강경파 측 헌터들은 동귀어진할 마음이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 같습니다만.”

“다리 중앙부에 구축한 최전선을 둘러싼 전투가 벌어지던 와중, 처음 보는 사람 넷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네.”

렉스 영주는 정확히는 텔레포트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고 덧붙였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 수 없는 존재의 등장에 혼란스러워하는데, 네 사람 중 젊은 여성 쪽이 먼저 움직임을 보였네. 그리고 그 순간 모두가 전의를 잃게 되었지.”

그는 차라리 자신이 잘못 본 거였으면 좋겠다며 말을 이어갔다.

“여성은 앞으로 나서더니 가까이에 있던 강경파 측 헌터의 배를 순식간에 갈랐다네. 그 뒤로 헌터들이 초 단위로 죽어 나갔지. 그때만큼은 강경파와 온건파가 힘을 합쳐 여성을 막아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네. 어떠한 무기조차 들고 있지 않던 여성은 최전선에서 대치 중이던 강경파와 온건파 측 헌터 모두를 불과 몇 분 만에 홀로 쓸어 버렸네.”

젊은 여성이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력 차를 보여준 이후, 헌터들 사이에 공포가 번져 지금과 같은 상황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렉스 영주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귀환 전 동작대교에서 본 적 없었던 젊은 여성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배를 갈랐다는 점을 보아선 교주일 가능성이 큰데, 문제는 그녀가 어떻게 그 많은 헌터를 상대로 홀로 학살극을 벌였냐는 거였다.

본인이 말했듯 SSS급 헌터이고, 규격 외의 스킬이나 고유 능력을 지녔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녀의 몸에도 초월자가 강림했기에 가능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

만약 후자라면 성안에서 ‘캠비온’을 고문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SSS급 헌터의 스탯을 지니고 있었던 교주가 잠깐 사이에 모든 스탯이 0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확실히 짚고 넘어가기 위해 그녀에 관해 좀 더 자세히 물어보려고 할 때, 글씨가 새겨졌다.

[8202-N 구역의 헌금함이 파괴되었습니다.]

예상보다 상황이 좀 더 긴박하게 흘러갔다.

이화가 온건파 측 헌금함을 파괴한 거며, 동작대교에 등장한 회사 측 인물들이 학살극을 시작한 것이며 모두 내가 원했던 것보다 빠르게 벌어지고 있었다.

교주에 관한 의문을 풀고 있다간 동현이 형과 이나은을 잃을 수도 있는 판국이었다.

“혹시 김동현 헌터랑 이나은 헌터 보셨습니까? 렉스 영주님의 말씀을 들으니 일행하고 한시 빨리 합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같은 상황이면 일행이 걱정되는 게 당연하겠지. 이 근처에서 그 둘의 모습은 보지 못했네. 이미 퇴각한 것이거나, 아니면….”

아니면 아직 여기까지조차 퇴각하지 못한 거겠지.

“감사합니다.”

감사를 표하고 곧바로 ‘퀴네에’를 썼다. 이후 위험하다며 나를 붙잡으려던 렉스 영주를 뒤로하고 다리의 중심부 쪽으로 나아갔다.

차라리 이미 다리에서 빠져나가서 일행의 모습이 보이지 않길 바랐으나, 나아간 지 얼마 안 되어 그 바람은 깨지고 말았다.

동현이 형과 이나은은 후퇴하는 헌터들의 최후방을 지키고 있었다.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을 포함한 몇몇 헌터들이 교주와 대치한 덕에 학살극이 잠시나마 멈춘 것 같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교주는 자신을 막아선 헌터들을 바라보기만 할 뿐, 전투를 이어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대치가 이어지는 틈에 동현이 형과 이나은 옆으로 가서 ‘퀴네에’를 벗었다.

“정현 헌터? 여기엔 언제?”

나를 보자 놀란 건 이나은뿐이 아니었다. 교주 역시 내 얼굴을 보자 놀란 듯 입을 살짝 벌렸다.

“‘이면’에 오래도록 숨어있을 거라 여겼는데 뜻밖이네요. 마침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었는데 잘됐어요.”

그러곤 뒤편을 향해 손짓했다. 교주의 손짓에 삼지창을 든 노파가 걸어 나왔다. 노파의 옆엔 거대한 거품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는데, 그 안엔 눈을 감은 채 서용현이 늘어져 있었다.

교주가 거품 속에 손을 집어넣어 서용현의 이마에 손을 대자 글씨가 새겨졌다.

[고유 능력 ‘탐욕’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이하민’이 플레이어 ‘서용현’의 스탯을 탐합니다.]

[‘낮은 시선의 소유자’님이 플레이어 ‘이하민’이 탐하는 플레이어 ‘서용현’의 스탯에 포인트를 매깁니다.]

[플레이어 ‘이하민’이 해당 포인트를 지불합니다.]

[플레이어 ‘서용현’은 포인트를 탐합니다.]

[플레이어 ‘서용현’의 모든 스탯이 플레이어 ‘이하민’에게 양도됩니다.]

모든 스탯 양도.

저 고유 능력 때문에 서용현의 모든 스탯이 0이 되어 초월자가 강림할 수 있었던 거였다.

“박다현 헌터, 지금 당장 우리 셋 ‘이면’으로 넣어줘.”

서둘러 동현이 형과 이나은이 비치도록 유리 조각을 틀었는데, 교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다현 양은 우리 회사의 인재였어요. ‘이면’의 원리 정도는 파악해두었답니다.”

유리 조각 속 저 멀리엔 교주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교주가 본인의 바로 뒤로 이동했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이나은이 크게 반원을 그리며 발을 뻗었다. 교주는 팔을 뻗어 그를 막고는 거리를 벌렸다. 그런 교주의 모습은 여전히 유리 조각에 비치고 있었다. 이나은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막으면서도 유리 조각에 비치는 공간을 계산해 움직인 것이었다.

이후로 이나은과 교주 간의 접근전이 이어졌다. 그런 사이 서용현이 갇혀 있던 거대한 거품이 '펑' 하고 터졌다. 거품이 터지고 땅에 엎어진 서용현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내가…, 왜 여기에…. 무슨….”

의문에 가득 찬 말을 내뱉던 서용현은 별안간 머리를 감싸더니 비명을 질렀다. 그런 그의 눈동자는 점점 위로 올라가 곧 흰자로 가득 찼다.

얼마 안 지나 서용현의 안구가 뒤집혔고, 그의 눈동자는 완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최악의 시나리오 대로네.”

결국 ‘낮은 시선의 소유자’가 강림하고야 말았다. 강림한 초월자는 혀를 할짝대며 교주를 불렀다.

“자넨 이만 뒤로 물러나게. 이제부턴 본좌가 모든 걸 탐할 시간이니 말이야.”

초월자가 강림하기 전이었다면 어떻게든 손쓸 수 있었겠지만, 이미 강림하고 난 뒤라면 상황이 다르다. 초월자를 소멸시킬 방법이 마련되기 전까진 일행과 맞붙게 해선 안 됐다.

“이나은 헌터, 지금은 어떻게든 여기서 도망….”

말을 잇기도 전에 유리 조각이 빛났다. 그러곤 이화가 ‘이면’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화는 두리번거리며 상황을 살피더니 곧장 이나은 쪽으로 합류했다.

“동현 오빠, 울 오빠 좀 부탁해요.”

이나은의 옆에 서서 전투태세를 취한 이화를 보더니 ‘낮은 시선의 소유자’는 본인의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전력을 다하진 않겠네. 본좌가 탐할 만한 존재인지 한번 보여줘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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