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철상지옥 (14)]
거만한 태도로 검을 겨눈 상대의 몸에 초월자가 강림해 있단 사실은 인지하고 있는지, 이나은과 이화는 섣불리 싸움을 열지 않고 상황을 살폈다. 종종 우리 쪽도 힐끗힐끗 바라보는 걸로 보아 어떻게든 도망칠 구석을 찾는 듯했다. 그러나 ‘낮은 시선의 소유자’는 두 사람에게 대처법을 마련할 시간 따윈 주지 않았다.
“자네들의 가치를 피력하게끔 기회를 주었는데,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니. 이래서야 자네들을 탐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는가? 아니면 혹시 본인의 가치를 잘 모르고 있는 건가? 그런 거라면 하는 수 없지. 지상에 내려온 기념으로 자네들이 가치를 발할 수 있도록 본좌가 힘써보겠네.”
이내 도와주겠다며 검을 휘두른 ‘낮은 시선의 소유자’가 전투의 시작을 알리자, 그에 대응하여 이화의 우산에서 얼음 결정이 뻗어나갔다.
창 형태를 이룬 얼음 결정은 대검에 맥없이 갈라지는 듯했으나, 이화의 공격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쪼개진 얼음 결정은 땅으로 추락하기는커녕 더욱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그러더니 수십 갈래로 갈라져 ‘낮은 시선의 소유자’를 가차 없이 찔렀다. ‘낮은 시선의 소유자’의 몸을 관통하여 하늘 높이 솟아오른 얼음 결정만으론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이화가 우산을 반 바퀴 비틀 때마다 결정은 수십 갈래로 갈라지길 반복했다.
마침내 수백 갈래의 얼음 결정이 꽂힌 ‘낮은 시선의 소유자’는 허공에 매달린 채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가 되었다.
뜻밖에 상황이 ‘낮은 시선의 소유자’에게 불리하게 흘러가자 더는 안 되겠다고 여겼는지 교주가 앞으로 나섰다.
“불경하네요! 저희를 구원하기 위해 직접 내려오신 분께 감히!”
하지만 이나은의 움직임이 한 발 더 빨랐다.
이화를 향해 뻗었을 게 분명한 교주의 주먹은 이나은의 발길질에 가로막힌 채 갈 길을 잃었다. 그에 분노한 교주가 평정심을 잃고 욕설을 내뱉을 때, 저 위에서 근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본좌가 뒤로 물러나 있으라고 명했을 텐데!”
서용현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던 것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죽음의 경계’에서 ‘크로노스’와 대화할 때처럼 ‘낮은 시선의 소유자’의 목소리는 머릿속을 여러 번 울렸다.
“나약한 인간의 몸으론 이조차 뿌리치지 못하는 건가? 본좌의 초월력만큼은 최대한 쓰지 않고 즐기려 했건만.”
초월자의 몸에서 흐르던 피가 금빛으로 물듦과 동시에 그의 팔이 얼음 더미에서 벗어나려 했다.
검을 쥔 팔이 얼음 더미로부터 자유로워지려 하자 교주는 기쁨에 겨웠는지 눈물을 흘렸다.
“저희를 구원해주실 분의 힘을 의심하다니…. 불경한 건 저였네요. 제가 너무나 부족한 탓에 미처 뜻을 헤아리지 못했어요.”
그런 교주와 대비되게 이화는 무언가를 각오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스킬 ‘주테카의 얼음’이 발동됩니다.]
스킬이 발동된다는 글씨가 새겨지고 우산을 쥔 이화의 손이 푸르스름하게 변해갔다. 얼룩이 팔뚝 부근까지 번질 무렵 우산이 활짝 펴졌다. 활짝 펴진 우산은 빙글빙글 회전했고, 그 반동으로 이화의 몸은 점점 뒤로 밀려났다.
이화는 반대 손으로 우산을 쥔 팔을 지탱하면서까지 안간힘을 쓰며 제자리에 서 있으려 노력했다.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기온이 급속도로 떨어집니다.]
[‘화이트 아웃’에 시야가 제한됩니다.]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던 우산이 별안간 멈추자 사방이 하얘졌다. 바로 옆에 있던 동현이 형의 얼굴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얀 세상 속, 저 멀리서 ‘낮은 시선의 소유자’의 외침이 들렸다.
“계약자에게 이런 스킬까지 전해주었단 말인가!”
[‘화이트 아웃’이 지나갑니다.]
세상은 뒤쪽에서부터 점차 원래의 빛을 되찾아갔다.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 헌터들은 모두 멍하니 이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이화의 우산 끝에서 뻗어나간 엄청난 크기의 얼음 더미였다.
회오리치듯 나선 형태로 뻗은 얼음 더미는 정확하게 ‘낮은 시선의 소유자’가 매달려 있던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 궤적 안에 있던 ‘낮은 시선의 소유자’는 얼음 더미에 완전히 파묻힌 채 미동조차 못 하고 있었다.
엄청난 규모의 기술에 다들 말문이 막혀 있을 때, 이화가 우산을 옆으로 크게 휘둘렀다. 그에 덩달아 얼음 더미도 허공을 크게 가르며 강 아래로 떨어졌다.
얼음 더미가 강 표면에 닿자 엄청난 파도가 일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얼음 더미가 닿은 표면에서부터 시작하여 다리 쪽을 덮치려던 파도까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이런 기술이 있었으면서 왜 지금까지 쓰지 않은 거….”
의문을 끝까지 내뱉을 필요는 없었다.
이화는 완전히 푸르스름하게 물든 본인의 오른팔을 붙잡은 채 고통 섞인 신음을 내고 있었다.
“현아, 잠깐!”
동현이 형이 붙잡으려던 걸 뿌리치고 곧장 이화에게 달려갔다.
“너….”
굳이 물어보지 않더라도 오른팔의 상태가 심각한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큰 기술을 쓴 덕분에 강림한 초월자를 무력화하긴 했지만, 앞으로 저 오른팔을 더 쓸 수 있을 진 장담할 수 없었다.
“힘들더라도 조금만 버텨봐. 수연이한테 금방 데려가 줄게.”
내가 원했던 대로 상황이 흘러간 건 아니었으나 이화의 활약으로 양측 헌금함도 파괴했고 강림한 초월자마저 막아냈다. 이제 여기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이번 시련은 어떻게든 넘길 수 있다. 이화의 오른팔이 맘에 걸리긴 해도 어쩔 수 없다. 일단은 여기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다.
하나 변수가 될 만한 교주마저 얼어붙은 초월자 쪽으로 달려간 지금이 동작대교에서 벗어날 기회….
[‘허영의 사내’님이 500만 포인트를 사용하여 자신의 수혜자를 텔레포트 시킵니다.]
“뭐? 텔레포트?”
이화를 부축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글씨가 새겨지며 등 뒤에서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네.”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그 목소리에 분노가 치밀었는지 이화의 눈빛이 바뀌었다.
“…삼촌.”
“아니지. 너희는 내 모습을 한 헌터들을 몇 번 접해봤으니 오랜만인 건, 나뿐인가? 그렇지?”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오는 삼촌의 말에 이화가 몸을 틀어 우산을 겨눴다.
“진짜든 또 다른 가짜든 간에 우리한테 다가오지 마.”
이화의 경고를 들은 삼촌은 양손을 번쩍 들어 올리면서도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걸 멈추지 않았다.
“나도 멈춰 서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이래야만 내가 구원받을 자격이 생기거든. 고유 능력으로 내 모습을 다른 사람 위에 덧입혀서 스탯을 나눠주면서까지 그 자격을 얻기 위해 노력했는데. 인제 와서 그만둘 순 없잖아?”
모습을 타인에게 덧입혔던 본 목적이 스탯을 나눠주기 위해서란 건, 교주 없이도 스탯을 0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의미. 그제야 ‘허영의 사내’가 무슨 생각으로 삼촌을 우리 코앞으로 텔레포트 시킨 건지 알 수 있었다.
그를 깨닫자마자 머릿속에 경보가 울렸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이화만이라도 데리고 ‘이면’으로 도망칠 마지막 기회다.
이 기회를 놓치면 이번에도 죽음을 면치 못할 거다.
하지만 경보와 동시에 어떤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불타는 동작대교 위. 나와 이나은이 등을 맞댄 채 강림한 ‘허영의 사내’를 상대하는 장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오른 장면은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전에 무의식 저편으로 흩어져버렸다.
일어난 적도 없는 일이 제멋대로 머릿속에 떠오른 탓에 허겁지겁 달려오는 이나은이 눈에 밟혔다. 그에 유리 조각을 들어 올리던 팔이 잠시 멈추었고.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지만, 삼촌은 이만 구원받으러 가볼게.”
‘허영의 사내’가 강림하기 전에 ‘이면’으로 도망칠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빨리 ‘이면’으로 도망쳐보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이 몸을 보자마자 도망치려고 하다니, 미물 따위가 주제는 잘 알고 있나 보군. 하지만 이 몸은 네깟 것에게 도망쳐도 된다고 허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코앞에 다가온 삼촌이 팔목을 세게 비틀어 그 충격으로 유리 조각을 놓치고 말았다.
눈이 완전히 붉게 물든 삼촌은 코웃음 치며 내 팔목을 꺾었다. 비틀어진 뼈는 너무나 쉽게 팔 가죽을 뚫고 나왔다. 그 고통을 억지로 무시한 채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보려고 말을 걸었다.
“‘캠비온’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으면 우릴 죽여선 안 될 거야.”
그러나 ‘허영의 사내’는 대답 대신 내 배를 걷어찼다.
“감히 미물 주제에 이 몸을 협박해?”
‘허영의 사내’가 다시 한번 발을 들어 올렸을 때, 이화의 우산이 불길을 뿜었다. ‘허영의 사내’는 나를 걷어차려던 걸 멈추고 뒤로 물러서며 흥미롭단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이 몸보다 일찍이 강림한 ‘낮은 시선의 소유자’는 네깟 미물에게 당했었지.”
이화는 잔뜩 긴장된 표정을 지으면서도 왼손으로 우산을 휘둘렀다.
[스킬 ‘천마적룡’이 발동됩니다.]
우산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은 일곱 개의 머리가 달린 붉은 용 형태를 띠더니 ‘허영의 사내’에게로 쏜살같이 뻗어갔다.
“이 몸이 네깟 것에게 부여한 스킬을 쓰다니. 힘을 부여하며 이 몸과 맺은 계약은 잊었나 보군.”
“계약을 먼저 깨고 우리 오빠를 죽이려던 건 초월자님이었어요.”
“아니지. 아니야. 이 몸은 미물의 쓸모없는 팔을 비틀었을 뿐, 하찮은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네. 그러니 네깟 것에게 요구했던 대가를 받아낼 자격은 충분해.”
[빌려온 힘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글씨가 새겨지자 화염에 휩싸인 붉은 용은 ‘허영의 사내’ 주위를 빙빙 맴돌 뿐,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허영의 사내’의 손짓에 맞추어 거대한 몸을 비틀어댔다.
“지금부터 지옥의 불길과 얼음은 어떻게 쓰는 건지 이 몸이 친히 보여주지.”
‘허영의 사내’가 무심한 눈빛으로 손가락을 튕기자 붉은 용이 동작대교에 몸을 부딪치며 난동을 부렸다. 이곳저곳 용이 부딪칠 때마다 화염이 번졌고, 꺼지지 않는 불길은 차츰 몸집을 키워나갔다.
그에 그치지 않고 ‘허영의 사내’는 반대 손으로 큰 원을 그렸다. 완성된 원에선 얼음으로 뒤덮인 푸른 용이 튀어나왔다. 푸른 용도 붉은 용과 마찬가지로 동작대교 이곳저곳을 누볐다.
그렇게 온 세상이 불타고, 얼어붙었다.
인간과 수인.
동작대교 위의 모든 생명체는 화염에 집어삼켜지거나, 얼음 속에 갇힌 채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의 비명이 울려 퍼지는 이곳은 그야말로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내가 제때 이화를 데리고 도망쳤더라면, 적어도 ‘허영의 사내’가 이화에게 빼앗은 힘을 써 붉은 용과 푸른 용을 풀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떠오른 장면에 정신이 팔린 탓에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 한 번의 실수로 인해 만들어진 광경에 참담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허영의 사내’가 말을 걸었다.
“정현, 넌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