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철상지옥 (15)]
‘허영의 사내’는 ‘미물’이나 ‘네깟 것’ 같이 상대방을 업신여기는 명칭 대신 내 이름을 똑바로 부르며 다가왔다. 그런 초월자의 손에는 어디서 주웠는지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검집에서 검을 뽑는 ‘허영의 사내’의 번뜩 뜬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자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분명 지금 이 상황 어디선가 한 번 본 듯했다. 언젠가의 꿈에서였던가? 그 꿈에서는 죽음을 앞둔 나를 밀치고 나타난 이나은이 ‘허영의 사내’의 검에 베였었다.
아니지, 그 꿈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었다.
꿈의 정확한 내용은 이러했다. 죽음을 피하긴 글렀다며 난 체념한 채 눈을 감았고, 결국 심장에 검이 꽂혀 죽임을 당해….
죽임을 당해 ‘죽음의 경계’로 넘어가서….
그런 다음에 ‘크로노스’와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어라? 방금 뭔가?”
무언가 떠오를 것만 같은 답답한 기분과 함께 별안간 아까 전 스쳤던 장면이 다시 재생되었다.
불타는 동작대교 위. 나와 이나은은 등을 맞댄 채 강림한 ‘허영의 사내’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나은의 전투 방식이 뭔가 달랐다. 그녀는 발길질하면서도 기다란 창을 휘두르며 ‘허영의 사내’에 맞섰다. 한편, 까다롭다는 표정을 지은 ‘허영의 사내’는 검으로 창을 받아칠 생각은 하지 않고 피하는 데에만 급급하였다.
“창?”
어딘가 익숙한 느낌의 창을 자세히 보려고 하자 그 위를 또 다른 장면이 덮었다.
새롭게 재생되는 장면엔 ‘허영의 사내’와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내가 등장했다. 뜻밖에 나는 아까 이나은이 휘두르던 창을 들고 있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저 장면 속의 나는 이미 여러 번 죽음을 거듭해서 패턴을 익힌 뒤, ‘허영의 사내’의 공격을 피해 어떻게든 창으로 찌르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후로도 ‘허영의 사내’와 전투하는 여러 장면이 떠올랐다.
검에 베여 죽임을 당하는 장면. 붉은 용에 집어삼켜져 온몸이 불타는 장면. 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으로 ‘허영의 사내’의 공격을 피하는 장면 등등.
머릿속을 스쳐 가는 장면을 하나하나 바라보는데 엄청난 두통이 일었다.
[인과율이 개입합니다.]
그와 동시에 모든 장면이 깨졌다. 머릿속 장면이 모두 사라지자 초월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두통이 가셨다.
“지금 이 시점에서 왜 인과율이 개입한 거지? 이 몸은 정당하게 정성훈이란 미물의 몸에 강림해서 초월력을 사용했다. 그 과정에서 인과율이 개입할 만한 일은 저지른 적 없단 말이지?”
고개를 들어 ‘허영의 사내’를 바라보니, 그는 이상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면 혹시 이 몸이 아니라 이깟 미물 때문에 개입한 건가? 어째서지? 미물, 대체 무슨 짓을 한 게냐?”
“난 딱히 아무것도….”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장면들 때문인 것 같단 생각이 얼핏 들자 다시 한번 뇌를 찌르는 듯한 두통이 일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머리를 부여잡으며 끙끙대는 사이, 어느새 ‘허영의 사내’는 내 앞에 서서 검을 높이 치켜들었고.
“흥밋거리로 살려두었다간 귀찮아질 수도 있겠군. 그럼 잘 가라.”
작별 인사를 끝으로 검을 휘둘렀다.
칼날이 번뜩이며 내 목을 탐하려 다가올 때.
“정현 헌터라도 살아야 해요.”
이나은이 나타나 나를 밀쳤다.
“왜?”
이나은은 곧장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집어서 내 쪽으로 던졌다.
빙글빙글 허공을 돌던 유리 조각에 나와 이화의 모습이 비치고 곧 빛이 뿜어져 나왔다. 유리 조각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끌려들어 가는 순간 이나은은 말했다.
“정현 헌터라면 이번에도 최선의 수를 찾아줄 테니까요.”
그 말에 뭐라 답하기도 전에 ‘이면’으로 끌려간 몸은 어딘가로 튕겨 나왔다. 튕겨 나오는 과정에서 ‘허영의 사내’에게 꺾인 팔이 땅바닥에 부딪힌 터라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팔뚝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가는 열기에 고통스러워할 때, 내가 도착한 곳이 어딘지 알려줄 목소리가 들렸다.
“현아, 왜 그래?”
피부를 찢고 나온 뼈를 보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하며 고개를 들자 새하얗게 질린 수연이가 보였다. 수연이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내 팔 부근을 가리키다가 이윽고 기절한 이화 쪽으로 뛰어갔다. 내 옆에 쓰러져 있는 이화는 ‘허영의 사내’에게 힘을 빼앗긴 부작용 때문인지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이화는 또 왜 이러고? 동작대교에서 무슨 사고라도 생긴 거야?”
동작대교에 초월자 둘이 강림했다. 그 중 ‘낮은 시선의 소유자’는 얼음 속에 봉해졌지만, ‘허영의 사내’가 이화의 힘을 흡수하는 바람에 수많은 헌터가 죽었다. 혼란 속 나와 이화는 이나은 덕분에 이곳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수연이에게 상황을 설명해줄 말은 준비되었으나, 입을 열었을 땐 신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뜻밖의 상황에 당황하고 있던 수연이는 흠칫 놀라더니 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 ‘성역’이 발동됩니다.]
“미안. 우선 치료부터 해줄게.”
[스킬 ‘성역’으로 인해, 플레이어 ‘임수연’이 ‘전투 불가’ 상태가 됩니다.]
[‘성역’ 안의 아군 판정 플레이어의 ‘회복력’이 50 상승합니다.]
[‘성역’ 안의 아군 판정 플레이어의 피로가 모두 회복됩니다.]
[스킬 ‘백의의 천사’가 발동됩니다.]
수연이의 손길이 닿자 뜨거운 열기가 점차 따스한 온기로 바뀌고, 고통이 사그라졌다. 끔찍한 상태의 팔 역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제야 주변을 살필 여유가 생겼다.
동작대교에서 빠져나와 도착한 곳은 식당이었다. 이곳엔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있던 일행이 몇 명 더 있었다.
성에서 곧장 이곳으로 도망친 김화영과 ‘캠비온’. 온건파 측 헌금함을 지키던 김아람, 노인 그리고 한성수. 마지막으로 노인 앞에서 유리 조각을 뚫어지라 바라보는 박다현까지. 동현이 형과 이나은을 제외한 일행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있었다.
다들 내게 무언가 묻고 싶은 표정이었으나 부상이 심했던 탓인지 말을 아끼는 듯했다. 서로 눈치만 살피는 일행들 사이 수연이가 손을 건넸다.
“혼자 일어날 수 있겠어?”
고맙다고 말하며 그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수연이는 나를 일으키자마자 한성수를 도와 이화를 탁자 위에 눕혔다. 그 뒤로 얼마간 푸르스름하게 물든 이화의 팔을 살피던 수연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현아, 아직 동현 오빠랑 나은이는 못 찾은 거지?”
“응. 아까부터 계속 불하고 얼음하고 연기밖에 안 보여.”
박다현의 옆에서 같이 유리 조각을 보던 김아람은 어떻게 된 영문이냐며 나를 바라보았다. 따로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동작대교에서 일어난 일을 묻는 눈치였다.
그에 ‘낮은 시선의 소유자’의 등장부터 ‘허영의 사내’가 모두를 학살한 것까지, 동작대교 위에서 벌어진 참상을 말해주었다. 이야기를 끝마치자 식당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당장이라도 동작대교에 가서 남겨진 일행을 구해야만 한다는 목소리와 가봤자 함께 죽을 뿐이라는 목소리가 충돌했고. 기어코 박다현에게 자신만이라도 동작대교로 보내달라는 사람까지 나왔다.
그러던 와중 식당 문을 열고 여우 수인이 뛰어 들어왔다. 여우 수인은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캠비온’을 보고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으나 이내 크게 헛기침해 장내를 조용히 만들었다. 모두가 여우 수인만을 바라보자 그녀는 침착하게 말을 전했다.
“여러 번 말할 시간 없으니까 다들 잘 새겨듣길 바라. 방금 동작대교에서 도망쳐온 괴수 사냥꾼 무리가 주둔지에 도착했거든? 그런데 그들 말로는 동작대교에 ‘허영의 사내’란 초월자님께서 나타나셨고, 렉스 영주님 포함 그곳에 있던 헌터 대부분이 초월자님께 맞서다가 전사하고 말았대.”
헌터 대부분이 전사했다고? 그럼 동현이 형과 이나은은….
“그들도 다른 헌터들과 마찬가지로 죽을 뻔했는데, 초월자님께서 본인의 말을 전하게 시키고는 풀어줬다 하더라고.”
“말을 전하게 시켰다고요?”
“그게.”
여우 수인은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동작대교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정현 씨랑 그 동생분을 붙잡아서 초월자님 앞으로 데려오라는 거였던가?”
여우 수인의 말에 일행은 하나둘 무기를 장비했다.
“지은정 씨가 이끄는 헌터 몇 명이 여기로 몰려오는 괴수 사냥꾼들을 막아보고는 있지만, 시간을 많이 벌진 못할 거야.”
거기까지 말한 여우 수인은 곧장 식당 밖으로 나가 버렸다.
여우 수인이 나가자 잠자코 있던 ‘캠비온’이 입을 열었다.
“양측 헌금함을 모두 부순다는 목적은 이루었으니, 난 이만 마을로 돌아가 볼 생각이다. 나를 구해준 보답으로 너희만 원한다면 함께 마을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지.”
‘캠비온’은 확신에 차 마지막 말을 강조했다.
“그곳이라면 초월자님으로부터도 안전할 거다. 하지만 들었다시피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군. 나랑 함께할 건지 빨리 결정해라.”
한 번에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온 탓일까?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다.
이번 시련에서 벌어진 일들을 떠올리면 여태껏 헤쳐 왔던 일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단 생각밖에 안 든다.
그도 그럴 게 강림한 초월자를 둘씩이나 상대해야 한다니, 죽음을 벗어나는 조건부터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스탯이 0이 되지 않도록 하여 강림 자체를 막아서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어떻게 해서 교주가 고유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는다고 해도, 이미 본인의 스탯을 수많은 사람에게 나눠준 삼촌의 모든 스탯이 0이 되는 것까진 막을 수 없다.
삼촌의 몸에 강림하는 초월자가 ‘낮은 시선의 소유자’였다면 이화가 막아설 수 있을 텐데, 하필 강림하는 초월자마저 ‘허영의 사내’다. 우리 일행 최고 전력인 이나은과 이화조차 그의 앞에선 완전히 무력해진다.
‘허영의 사내’로부터 도망친다고 해도, 언제까지 숨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죽음을 거듭하며 내가 직접 ‘허영의 사내’와 싸워봤자….
그 순간, 생각의 틈을 비집고 여러 장면이 떠올랐다.
모든 장면에서 난 ‘허영의 사내’와 직접 싸우고 있었다.
“아까부터 대체 왜 이런 장면이 떠오르는 거야?”
[인과율이 개입합니다.]
어지러운 머릿속 상태에 혼란스러워하는데, 누군가 뒤통수를 세게 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모든 장면이 저 멀리 사라지며 정신이 아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