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진실 (1)]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눈을 뜨자 뜻밖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젠 좀 괜찮은가?」
괜찮냐고 물은 그 목소리에 머리는 더 지끈거려왔다.
방금까지만 해도 일행들과 함께 식당에 있었는데, 왜 뜬금없이 ‘죽음의 경계’에 있어야 할 ‘크로노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그야 이곳이 ‘죽음의 경계’이기 때문이지.」
“뭐?”
인제 보니 난 ‘죽음의 경계’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설마 그사이에 내가 죽기라도 한 건가?
「자네와 전속 계약 맺은 초월자가 손쓰지 않았더라면 그럴 뻔했지.」
그럴 뻔했다?
「인과율이 그대로 더 개입했더라면 자네의 존재 그 자체가 소멸했을 거네.」
전에 ‘크로노스’가 비슷한 말을 한 적 있었다. 모든 스탯이 0이 아니었다면, 내 존재는 인과율에 의해 이미 소멸했을 거라고.
“인과율은 이 세계가 돌아가게끔 하는 장치라고 했었지?”
「의외로 이 몸의 말을 잘 귀담아들었나 보군.」
“그런 인과율이 개입했다는 건, 내게 벌어졌던 일이 세계가 돌아가는 것을 방해했다고 보면 되는 건가?”
「그렇게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네.」
내게 벌어졌던 특이한 일이라곤 벌어진 적 없는 상상 속의 장면들이 떠오른 것뿐. 그게 어쨌다고 인과율이….
잠깐, 설마?
“아니지?”
순간 떠오른 생각에 조심스레 물었는데 ‘크로노스’는 침묵을 지켰다.
남의 생각을 자유자재로 읽는 양반이 내가 뭘 묻는지 모를 리는 없었다.
“아무 말도 없으면 불안하니까 차라리 내 생각이 틀렸다고 말해줘.”
「자네 생각? 무슨 말인지 이 몸은 잘 이해가 안 가네.」
그러고 보니 ‘죽음의 경계’에 처음 온 순간 ‘크로노스’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무척 놀라 했던 게 기억났다.
이전처럼 편하게 대해도 된다.
이 설명만 벌써 두 번째 반복한다 등등.
그땐 그저 듣고 넘겼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상하기 그지없는 말들이었다.
‘크로노스’가 내게 했던 말은 ‘죽음의 경계’에 처음 온 사람한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전에도 ‘죽음의 경계’에 방문한 적 있는 사람한테나 해야 할 법한 말이다.
그런 말들을 몇 번이고 내게 했다는 건.
당시 ‘크로노스’는 이미 나와 ‘죽음의 경계’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 뜻.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인과율이 개입한 이유에 관한 내 추측하고도 맞아떨어진다.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장면들, 그건 제멋대로 지어낸 상상 같은 게 아니었어.”
난 이미 ‘허영의 사내’와 전투한 적이 있고. 그러다 어떤 이유로 인해 ‘죽음의 경계’에 처음 방문한 시점보다 더 이전 순간으로 귀환….
「그만! 더 말했다간 인과율이 개입할 수도 있네.」
“인과율이 개입할 수도 있다는 건, 내 추측이 사실이란 거지?”
「자네는 곧 원하는 답을 얻게 될 거네. 다만, 그 답을 얻을 곳은 이곳이 아니야.」
“그쪽이 답을 말해주지 않으면, 대체 누구한테 답을 들을 수 있는 건데?”
「지금 이 몸이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네.」
인과율이 엮여있어 대화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상황에 답답해하는데, ‘크로노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그때 이 몸을 찾아오게나.」
“준비? 뭘 준비해야 하는지 말해줘야 내가 준비를 하든지 말든지….”
「이제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건가.」
[‘죽음의 경계’에서 벗어납니다.]
***
“깨어날 기미는 좀 보이나?”
“아직이요. 이화도 정신을 차렸는데, 현이는 왜 여태껏 깨어나질 못하는 건지….”
노인과 수연이의 대화가 들린다.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는 걸 보니 ‘죽음의 경계’에서 벗어났나 보다.
“지, 지금 눈을 뜬 거 같은데?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
“네?”
‘크로노스’에게 묻고 싶은 게 많이 남았는데, 의문만 늘어난 채 ‘죽음의 경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답에 거의 근접했다가 놓친 것 같아 찝찝함은 더 많이 남았다.
“현아, 정신이 들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두 사람을 무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죽음의 경계’에서 생겨난 의문은 잠시 넣어두었다. 대신 몸을 이리저리 흔드는 수연이를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수연이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어려 있었다.
“특별히 어디에 이상 있는 것도 아닌데 며칠 동안 깨어나질 않아서 뭔가 잘못된 줄 알고….”
며칠 동안 깨어나질 않았다고?
“혹시 나 기절하고 얼마 만에 깨어난 거야?”
“일주일 동안이나 기절해 있어서 다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그래도 깨어나서 다행이야.”
“현이 몸 상태 좀 봐주고 있게나. 난 다른 사람들한테 현이가 깨어났다고 전하고 오겠네.”
노인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고 나갔다. 그제야 내가 흰색으로 도배된 방 안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주둔지에선 본 적 없는 방의 모습에 여기가 어딘지 물었다.
“‘캠비온’들이 지내는 마을이야. 네가 기절한 이후로 줄곧 여기서 지냈어.”
결국 ‘캠비온’을 따라 도망치기로 정했던 건가. 아,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지금 중요한 건 기절해 있던 사이에 시련이 어떻게 끝났는지다.
“시련은 이미 끝난 거야?”
“응. 양측 헌금함을 파괴한다는 작전이 먹혀들었어.”
하기야 수연이와 나 모두 살아남았으니 강경파와 온건파에 속한 헌터 모두가 시련을 클리어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다음 시련은 어떻게 해야 클리어할 수 있어?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지금이라도 서둘러서….”
“그건 아직 몰라.”
“모른다니?”
의문에 대한 답은 방문을 박차고 들어온 이화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수연 언니 다그쳐도 소용없어. 다음 시련은 일 년 뒤에나 시작되거든.”
“뭐? 일 년 뒤? 어째서?”
“그것까진 나도 모르지. 그나저나 몸은 어때? 괜찮아?”
“너야말로 괜찮아?”
내가 되묻자 이화는 붕대를 칭칭 감은 팔을 들어 보였다.
“생명에 지장은 없는데, 아무래도 앞으로 이쪽 팔은 쓰지 못할 거 같더라고.”
이화는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 태평하게 말하곤 수연이 옆에 앉았다.
“강림한 초월자님을 꼼짝 못 하게 만든 건데 한쪽 팔로 끝난 게 다행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붕대 사이사이로 보이는 푸르스름한 피부에 괜히 맘이 시려왔다.
“참, 며칠 전부터 삼촌 모습을 한 사람들이 동작대교로 모이고 있다더라.”
이화는 본인의 팔에 시선이 꽂혀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자연스레 화제를 전환했다.
“뭐 짐작 가는 거 없어?”
“또 다른 초월자님들을 강림시킬 준비라도 하는 게 아닐까?”
그를 위해 시스템을 조작해 줄 ‘캠비온 녹스’를 찾고 있었으니 아마 틀림없을 거다.
“그런 분들이 앞으로도 더 많이 강림하신다는 건가.”
“모든 스탯을 0으로 만들 방법을 찾았다면 그렇게 되겠지?”
현재까지 회사 측이 모든 스탯을 0으로 만드는 데 사용한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교주의 고유 능력 ‘탐욕’을 쓰는 것.
고유 능력 ‘탐욕’을 쓰면 포인트를 지불하고 상대방의 스탯을 구매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이 고유 능력은 특수한 조건이 갖춰져야만 쓸 수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캠비온 녹스’를 찾아 헤맬 이유가 없었다.
다른 하나는 삼촌의 고유 능력을 쓰는 것. 그러나 이 방법 역시 삼촌에게만 적용되는 듯했다.
“근데 내 생각대로라면 아직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을 거야.”
“그…. 강림한 ‘허영의 사내’님이 내 스탯하고 스킬을 빼앗아 간 건 알고 있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이화는 입술을 깨물며 간신히 말을 이어나갔다.
“나한테 그랬듯이 그분과 계약한 다른 헌터들의 스탯도 빼앗을 수 있지 않을까?”
“그건 신경 쓸 필요 없어. ‘허영의 사내’님은 본인과 전속 계약 맺은 헌터들의 스탯만 빼앗을 수 있잖아.”
“그러니까 스탯이 0이 된 헌터들의 몸에 다른 초월자님들이 강림한다면…. 그럴 수가 없겠구나.”
강림의 조건은 총 세 가지.
제물, 진명, 그리고 모든 스탯 0.
이 조건 중 ‘진명’으로 인해, 모든 스탯이 0인 제물이 있다 해도 그의 몸에는 전속 계약 맺은 초월자만이 깃들 수 있다.
다시 말해 ‘허영의 사내’가 아무리 많은 헌터의 스탯을 빼앗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몸에 ‘허영의 사내’ 외에 다른 초월자는 강림할 수 없다.
더군다나 ‘변성대왕의 판결’이 내려지고 난 뒤, 다른 초월자와 전속 계약을 맺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게 된 상황. 따라서 스탯을 빼앗은 다음 ‘허영의 사내’와의 전속 계약을 파기하고 다른 초월자와 전속 계약을 맺게 해 그를 강림시킨다는 선택지 역시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면 아직까진 ‘허영의 사내’님만 강림해 있다는 거지?”
“그렇지.”
“그나마 다행인 건가.”
다만, 모든 스탯이 0이 된 이화의 몸에는 언제라도 ‘허영의 사내’가 강림할 수 있다.
“참, 그래도 내 스탯을 완전히 다 빼앗긴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이화가 손사래 치며 말했다.
“오빠가 만들어준 음식 먹고 오른 스탯은 빼앗기지 않았더라고. 그건 ‘허영의 사내’가 부여해준 힘이 아니라서 빼앗기지 않았나 봐.”
그렇다면야 최악의 상황은 비켜난 것 같다.
이화에게 ‘허영의 사내’가 강림할 일은 없다는 것에 안심하는데 ‘캠비온’이 모습을 비쳤다. 그는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덕분에 무사히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캠비온’ 일족 모두가 시련을 클리어할 수도 있었고. 일족을 대표하여 감사를 표하는 바다.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해라. 들어줄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면 도울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보겠다.”
괜찮다고 답하려다 교주로부터 ‘캠비온’을 구했던 목적이 떠올랐다.
“그러면 ‘캠비온 녹스’를 만나게 해주세요.”
그러자 ‘캠비온’은 난감한 듯 날개를 긁적였다.
“안 그래도 자네 동생에게 자네가 깨어나면 ‘캠비온 녹스’에게 데려다 주기로 약조했었다. 그런데 정말 그거면 되겠나?”
고개를 끄덕이니 ‘캠비온’은 본인을 따라오라고 말했다.
방 밖으로 나서자 ‘캠비온’의 마을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거대한 종유석과 석순들. 마을은 동굴 안에 있었다.
동굴 안을 누비던 ‘캠비온’은 허름한 굴 앞에서 멈춰 섰다.
“‘캠비온 녹스’는 저 안에 있다.”
그의 안내에 문을 열고 들어가니, 굴 안에 처박힌 한 ‘캠비온’이 보였다. 어둠 속, ‘캠비온’은 소주병을 들이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