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진실 (2)]
“이야- 잘도 마신다.”
이화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딱딱하게 감상을 말했다. 그러고는 우릴 데려온 ‘캠비온’에게 속삭였다.
“정말 저 술꾼이 ‘캠비온 녹스’예요?”
“그렇다. 동족으로서 부끄럽군. 저자를 보고 모든 ‘캠비온’이 술에 빠져 살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캠비온 녹스’라는 게 확인되자 이화의 표정은 한층 더 썩어들어갔다. 아마 굴 한쪽에 산더미처럼 쌓인 소주병을 바라보는 내 표정 또한 저렇게 썩어있었을 거다. 냉담한 우리의 반응에 무안했는지 ‘캠비온’은 사족을 붙였다.
“내가 이래서 ‘캠비온 녹스’에게 데려다 주길 꺼렸던 거다. 왜 만나고 싶어 하는지는 몰라도, 매일 같이 술만 들이켜는 저 친구가 자네들이 원하는 걸 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거든.”
‘캠비온’은 어떻게 할 거냐는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이대로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갈 순 없었다.
‘캠비온’을 고문하며 교주는 말했다. 만약 본인이 찾지 못한다면, 초월자들이 직접 나서서 ‘캠비온 녹스’를 찾을 거라고. 그 말로 미루어 보아, ‘낮은 시선의 소유자’와 ‘허영의 사내’는 ‘캠비온 녹스’를 찾기 위해 강림했을 가능성이 컸다.
초월자가 둘씩이나 직접 나서면서까지 찾으려 하는 존재인 만큼 ‘캠비온 녹스’의 시스템 조작에 대해선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크로노스’는 내가 원하는 답을 곧 얻게 될 거라 했다. 그 시점이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았으나 직감은 지금 ‘캠비온 녹스’와 대면한 순간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대화는 나눠볼게요.”
“알겠다. 그동안 난 자네의 다른 일행을 여기로 데려오도록 하지. 모두에게 전해줄 이야기가 있거든.”
그렇게 ‘캠비온’은 우리 셋만 덩그러니 남겨둔 채 굴 밖으로 나섰다.
‘캠비온’이 나간 뒤, 어떤 것들을 물어봐야 할지 정리하는데 수연이가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나름 용기 내어 건넨 인사였지만, ‘캠비온 녹스’는 꿈쩍도 안 했다. 이화랑 나도 번갈아 가며 말을 건넸으나 ‘캠비온 녹스’는 술만 들이켤 뿐이었다.
‘캠비온 녹스’의 무례한 태도에 짜증이 났는지 이화가 돌을 집어 던졌다. 이화가 던진 돌이 공병을 깨뜨리고서야 ‘캠비온 녹스’는 잔뜩 인상을 쓰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누구?”
완전히 충혈되어 핏발 선 눈으로 ‘캠비온 녹스’는 우리를 훑어보았다.
“인간이 여긴 어쩐 일이지? 돌아가.”
‘캠비온 녹스’는 잠깐 우리에게 관심을 주는 듯했으나, 이내 손을 휙휙 휘젓곤 다시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이대론 대화가 성립될 것 같지 않아, 결국 ‘캠비온 녹스’가 있는 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알코올 향이 코를 찔렀다. 숨만 쉬어도 취기가 올라올 것 같아 코를 막은 채 ‘캠비온 녹스’에게 말을 걸어야 했다.
“저희는 그쪽과 대화를 나누려고 왔어요.”
“아아- 그렇구나. 한잔하러 왔다고?”
“아니요. 술은 사양할게요.”
“뭐? 너네도 그런 놈들이었어?”
별안간 ‘캠비온 녹스’는 불같이 화를 냈다.
“왜 이놈이나 저놈이나 자꾸만 와서 술을 빼앗아 가려고 하는 건데? 어차피 곧 뒤질 거 퇴직금으로 받은 포인트로 술이나 펑펑 마시다 죽을 거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 처먹는 거야!”
“저희는 술을 빼앗으려고 온 게 아니에요.”
“뭐? 그럼 한잔하러 온 거야?”
“그런 게 아니라 뭐 좀 물어보려고 왔는데….”
“어차피 곧 뒤질 거 퇴직금으로 받은 포인트로 술이나 펑펑 마시다 죽을 거라고! 내 말 못 들었어? 이해가 안 가? 지능이 딸려? 어라? 근데 인간이 여긴 어쩐 일이지? 쓸데없는 짓 말고 어여 돌아가.”
말투부터 어눌하다 싶었는데, 역시나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 어찌나 술에 취했는지 내가 하는 말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다.
“오빠, 잠깐 비켜봐.”
취객을 앞에 두고 난감해하자 이화가 나섰다. 이화는 ‘캠비온 녹스’에게 다가가 그가 들고 있던 술병을 빼앗았다.
“저희 말 제대로 안 들어주면, 여기 있는 술병 전부 깨버릴 거예요.”
“거봐! 너네도 그런 놈들 맞았잖아! 내 술 빼앗으러 온 썩을 놈들. 내가 말이야. 어? 왕년에 말이야! 제기랄. 이딴 놈들한테까지 무시당하는 처지가 되었다니. 참으로 처량해, 처량하다고!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지? 내 처지 정말 개 같지 않아?”
‘캠비온 녹스’의 술버릇은 분노에서 신세 한탄으로 넘어갔다.
“우리 가문이 말이야. 어? 초월자 놈들 수발들어주면서 시스템 관리 권한을 얻어낸 덕분에 대대로 이 마을을 외부로부터 철저하게 숨겨올 수 있었다고! 듣고 있어? 우리 가문의 힘으로 이 마을이 괴수나 다른 헌터들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던 건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
술주정 속 시스템 관리 권한이란 단어가 귀에 박혔다.
“그리고 초월자 그놈들도 어이가 없는 게, 나를 자르고 앉힌다는 게. 고작 ‘인간계’에서 마법사 놀이나 하던 놈을 앉혀? 그럴 거면 나는 왜 자른 건데?”
“잠깐만요. 시스템 관리 권한. 그게 뭐예요?”
“흣. 흐흐흣. 흐하하하하하하하하하.”
‘캠비온 녹스’는 뭐가 웃긴 지 박장대소하며 바닥을 굴렀다.
“멍청한 놈들. 메인 MC에서 자를 거면, 시스템 관리 권한부터 전부 빼앗았어야지. 딴 권한은 전부 막았으면서, 스탯 조작 권한 막는 건 까먹고 말이야. 내가 멋대로 다른 헌터들 스탯을 조작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안 그래? 흐하하하하하하.”
“스탯을 조작한다고요?”
“당연하지. 난 지금 당장이라도 너희 스탯을 0으로 만들 수도 있는 몸이야.”
역시나 제물들의 스탯을 0으로 만들기 위해 ‘캠비온 녹스’를 찾았던 건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아 ‘허영의 사내’는 지상에 강림한 초월자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꾸리려는 것 같다. 어쩌면 ‘캠비온 녹스’를 내쫓을 때, 스탯 조작 권한을 남겨두었던 것도 ‘허영의 사내’가 세운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기 전에 술 도로 내놔.”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캠비온 녹스’가 이화의 손에 들린 술병을 낚아채 갔다. 그에 이화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 돌아다니다가 초월자님께 붙잡힐 바엔 이대로 계속 술이나 마시면서 여기 찌그러져 있는 편이 낫겠네. 그보다 스탯을 0으로 만들 수 있으면 반대로 증가시킬 수도 있는 거죠?”
“그게 될 것 같아? 헌터들 스탯을 손쉽게 올려준다고 해서 초월자 놈들한테 득 될 게 뭐가 있다고? 너희 고생하는 꼴 보고 즐기는 양반들이 그런 기능을 만들었겠어? 그리고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뭣 하러 스탯을 올려?”
‘캠비온 녹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한 뒤, 급기야 이화를 비웃기까지 했다.
“스탯을 왕창 올려서 이 세계의 지배자라도 되고 싶은 거야? 그래봤자 아무 의미 없으니 그만둬. 어차피 조작된 시련이 진행되는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상 끝엔 죽음뿐이야.”
조작된 시련?
“시련이 조작되었다니, 그게 무슨 의미예요?”
“보면 모르겠어? 흐하하하하하하. 너네도 쓸데없이 발악하면서 힘 빼지 말고 남은 포인트로 술이나 사서 여생을 즐겨.”
‘캠비온 녹스’는 메인 MC로서 초월자들 곁에서 시련을 지켜봤던 만큼, 우리가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 인물의 입에서 시련이 조작되었다는 말이 나오다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전혀 모르겠으니까 말해주세요. 시련이 어떻게 조작되었다는 거예요?”
그때 김화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구부터 이게 무슨 냄새람? 술을 얼마나 많이 마신 거야?”
뒤돌아보니, 김화영을 포함한 나머지 일행이 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본 ‘캠비온 녹스’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풉. 푸흡. 흐하하하하하하.”
결국 참을 만큼 참았다며 이화가 ‘캠비온 녹스’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대체 뭐가 웃긴 거예요?”
그런데도 ‘캠비온 녹스’는 눈물까지 흘려가며 한참을 웃었다.
“오빠, 더 대화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은데? 완전 맛이 갔어.”
“흐하하하하. 내가 맛이 갔다고? 아니지. 맛이 간 건 너네야. 바로 옆에 모든 정답을 쥔 인물이 있는데, 왜 자꾸 나한테 이것저것 묻는 거야?”
‘캠비온 녹스’는 본인의 손에 들린 술병으로 김화영을 가리킨 뒤, 다시 한번 웃었다.
“참 신기해. 얼마나 지냈다고 옆에 사람들하고 다를 바 없네. 어쨌든 간에 조작된 시련이든, 시스템 권한이든 전부 저 ‘아카샤’한테나 물어봐. 그분이라면 분명 신나서 이것저것 물어보지도 않은 것까지 알려줄 테니.”
‘아카샤’는 마포대교에서 만든 김화영의 코드 네임. 그걸 ‘캠비온 녹스’가 어떻게….
“‘아카샤’란 코드 네임 대체 어디서 들은 거야?”
“코드 네임? 흐하하하하.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캠비온 녹스’는 정신없이 웃다가 별안간 앞으로 고꾸라졌다.
깜짝 놀라 다가가니 그는 코를 골며 가며 자고 있었다.
‘캠비온 녹스’가 깊은 잠에 빠져 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우리는 굴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우리를 이곳까지 데려온 ‘캠비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대충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했는지 ‘캠비온 녹스’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사과부터 했다. 그러곤 우리 일행을 한자리에 모은 이유를 이야기해주었다.
“몇 가지 주의사항을 말할 테니, 집중해서 들어주면 고맙겠다.”
대충 ‘캠비온’의 마을에서 지내려면 지켜야 하는 규칙에 관한 내용이었다. ‘캠비온’의 동행 없이 마을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등의 규칙을 이야기해줬는데, 머릿속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김화영에 관한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김화영’, 그리고 ‘아카샤’.
‘캠비온 녹스’는 왜 본인에게 물어보지 말고 그녀에게 물어보라 했을까?
‘크로노스’가 ‘캠비온 녹스’를 만날 때, 필시 김화영과 함께 있으라고 조언했던 건 뭐 때문이었을까?
혼자 생각한다고 의문이 풀릴 리는 없었다. 그저 잠자코 떠오르는 의문을 곱씹으며 김화영과 대화할 틈이 생기길 기다릴 뿐.
“여기까지가 알아두어야 할 주의사항이다. 외부인이 와 있단 사실에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으니, 주의사항은 꼭 지켜주길 바란다.”
마침내 ‘캠비온’의 설명이 끝났다.
의문을 풀기 위해 김화영에게 다가가는데,
“김화영 헌터, 잠깐 저랑 이야기 좀….”
“현아, 난 인간인 거지?”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네?”
오히려 내게 질문을 던진 김화영은 눈물을 훔치며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