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진실 (3)]
갑자기 김화영이 사라진 데에 당황한 우리는 다른 건 제쳐두고 그녀부터 찾으러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녀가 스킬을 써서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 표식으로 순간 이동한 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안다고 해도 우리의 힘으로 수색할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었다. 만약 김화영이 ‘캠비온’ 마을 밖으로 이동했다면 사실상 그녀를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걱정이 앞섰다.
그렇게 흩어져서 김화영이 표식을 새겼을 만한 곳들 위주로 둘러보는데, 수연이가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현아, 저기.”
수연이가 가리킨 마을의 구석. 묘비가 늘어선 굴 앞에 김화영이 무릎 꿇은 채 앉아 있었다.
수연이가 먼저 다가가 어깨를 톡톡 건드리자 김화영은 흠칫 놀라며 뒤돌아보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된 상태였다.
“괜찮으세요?”
“난 인간인 걸까?”
김화영은 일전의 이해할 수 없었던 질문을 다시 던지고는 몸을 웅크리며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수연이는 난감한 듯 별말 없이 김화영의 등을 쓸어주었다. 그 상태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수연이가 입을 열었다.
“사실 김화영 헌터님이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어떻게 대답해 드려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은. 음- 김화영 헌터님이 인간이든 아니든 간에 김화영 헌터님은 김화영 헌터님이란 거?”
김화영이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자 수연이는 당황했는지 허둥지둥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김화영 헌터님이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저한텐 언제나 화영 언니일 거란 거예요.”
“…언제나?”
“당연하죠. 현아, 너도 그렇지?”
얼른 답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지? 수연이 말이 맞아요.”
“인간이든 아니든 간에 난 김화영이다. 그렇구나.”
“뭔가 말이 이상했죠?”
“아니야.”
김화영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좀 괜찮아지셨나요?”
“원래 이러면 안 되는 거지만 난 ‘아카샤’가 아니라 ‘김화영’이니까 괜찮아.”
그러고는 우리에게 말했다.
“‘방구석 만화광’님의 진명은 ‘아카식 레코드’야.”
“갑자기 그건 왜?”
“내 나름의 복수야!”
「건방진 딸내미네.」
「뭐, 좋아.」
「딸내미 투정에 한 번쯤 어울려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장난기 잔뜩 섞인 소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어디서 들리는 건지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는데, 동굴 속 풍경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천장이며 벽이며 바닥이며 내 시선이 닿는 곳마다 돌덩이 대신 책장이 들어서 있었다.
“현아, 지금 나한테만 이상한 게 보이는 건 아니지?”
“응. 나도 보고 있어.”
어느새 동굴은 책이 빽빽이 꽂힌 책장으로 둘러싸인 서재로 변화했다. 어느 방향이든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서재로 갑자기 이동한 이유는 한 가지. 초월자의 정신세계로 불려온 것이다.
“‘방구석 만화광’님의 정신세계에 초대받은 것 같아.”
「정신세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네?」
「우리의 고고하신 ‘빛나는 눈의 전략가’라면 “도움을 직접적으로 주는 건 성장에 도움이 안 돼. 아무리 전속 계약한 아이일지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해.”라고 말하면서 본인의 정신세계엔 한 번도 초대 안 했을 텐데.」
「전속 계약 맺은 초월자의 정신세계에도 가본 적도 없으면서, 이곳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건.」
코앞에서 불쑥 여자아이가 튀어나왔다.
「필시 ‘죽음의 경계’에 수시로 들락거렸기 때문이겠지.」
「이건 내 호기심인데, 그렇게 여러 번 죽으면 고통에 무감각해져?」
여러 가지 의미로 당황해 몸이 얼어붙었다.
어린 시절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소녀가 김화영의 느낌을 풍기는 것도 당황스러웠으나, 무엇보다 당황스러웠던 건 내가 ‘죽음의 경계’에 들락거린 걸 저 초월자가 알고 있다는 거였다.
「그게 왜 당황스러운 거지?」
「오히려 답답해하던 게 풀려서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
「본인이 지금껏 여러 번 죽었고, 죽을 때마다 과거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해서 답답해하고 있었잖아.」
「아니야?」
소녀는 내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한 마디 한 마디 당혹스러운 말을 나열했다.
초월자가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김화영과 수연이도 점점 나랑 같은 표정이 되었다.
“현아, 초월자님께서 하시는 말이 사실이야?”
「참! 네 친구는 처음 들었겠네.」
「네가 여러 번 죽어준 덕분에 여태껏 살아있을 수 있었던 거잖아?」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데, 아무도 몰라 줘서 슬펐어?」
「넌 그럴 때마다 어떤 기분이었어?」
「솔직한 네 심정을 말해주면, 나도 네가 듣고 싶은 걸 이야기해줄게.」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소녀는 답변을 요구했다. 그에 심호흡하고 김화영과 수연이를 바라보고 말했다.
“나한텐 죽을 때마다 귀환해서….”
말을 멈추고 상황을 살피는데, 두 사람의 표정에 변화는 없었다.
“귀환해서?”
오히려 다음 말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이상했다.
‘CONTINUE?’ 특성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금지된 명령어라며 언급하기 직전으로 시간이 되감겨야 하는데.
“죽기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는 특성이 있어.”
시간은 본래의 방향대로 똑바로 흘러갔다.
“뭐?”
“그러니까 난 죽을 때마다 귀환해서.”
“아니. 잠깐만. 죽을 때마다 그렇게 되기 전으로 돌아간다는 건. 설마….”
「맞아. 네 친구는 너희를 위해서 수백 번도 넘게 죽어가면서 시련을 클리어해줬어.」
「스탯도 0인 주제에 강이란을 쓰러뜨렸을 땐 정말 멋졌다니깐!」
「어디 보자.」
소녀가 손을 뻗자 저 멀리 있는 책장에서 책 한 권이 빠져나왔다. 책은 허공을 가르고 소녀의 손으로 날아왔다. 소녀는 책을 펼치곤 거기에 적힌 내용을 읽어주었다.
책에는 내가 죽음을 거듭하며 강이란과 전투한 게 자세히 적혀 있었다.
소녀가 책 읽기를 마쳤음에도 금지된 명령어라며 시간이 되감기는 일은 없었다.
「이상해할 것 없어.」
「여기 도서관은 나만을 위한 공간.」
「벌어진 모든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할 수 있도록 그 무엇도 개입할 수 없는, 인과율조차도 손댈 수 없는 공간으로 만들어졌으니깐.」
「네 특성 ‘CONTINUE?’에 엮인 제약도 여기서는 작동 안 한단 뜻이지.」
「그렇다고 딱히 걱정하지는 않아도 돼.」
「네가 인과율이 싫어할 짓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는 걸 아는 초월자는 나랑 ‘죽음의 경계’에서 지내고 있는 초월자들뿐일 테니깐.」
“인제 와서 일행한테 ‘CONTINUE?’ 특성에 관해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후련하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겠지.
「이해해.」
「많은 걸 알고 있으면서 말할 수 없다는 고통은 나도 오래 겪어왔거든.」
「물론 내 경우는 초월력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들과의 접촉이 금해져서인 거지만.」
「그들이 여기로 들어오려고 시도할 때마다 인과율이 개입해서 막아버리거든.」
「기록을 멋대로 바꿔버리는 일을 막기 위해서라는 이유였던가?」
「그래서 누군가랑 대화하고 싶어서 얼마나 입이 근질거렸는지 몰라.」
“그런 거라면 우리를 이곳으로 불렀듯이 다른 헌터들을 부르면 됐었잖아요.”
「그건 힘들어.」
「플레이어랑 전속 계약 맺을 수 있는 권한을 못 받았거든.」
「내 진명을 직접적으로 알려주면 안 된다는 제약도 있고.」
“그럼 김화영 헌터는 어째서?”
「김화영. 그런 이름이었던가?」
소녀는 신기하다는 듯 김화영을 바라보고는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상황을 보아하니, 여러모로 궁금한 게 많은 것 같던데.」
「딱 하나씩.」
「딸내미가 처음으로 친구 데려온 기념으로 각자 궁금한 걸 물어보면 그에 관련된 기록을 들려줄게.」
「‘크로노스’가 너희를 나한테 보내려고 그토록 노력했는데 그냥 보내기도 뭐하고.」
「그럼 임수연부터 시작.」
왜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방구석 만화광’의 변덕이 바뀌기 전에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갑자기 궁금한 걸 물어보라고 하셔도, 뭘 물어봐야 할지.”
“시련에 관해서 물어봐 줘. ‘캠비온 녹스’가 시련이 조작되었다고 한 게 무슨 뜻이었는지.”
수연이는 내가 부탁한 그대로를 물어봐 주었다.
「날카롭네. ‘캠비온 녹스’를 만나서 시련이 조작되었단 걸 알게 된 건가?」
소녀는 서재를 두리번거리더니 몇 권의 책을 자신의 손으로 날아오게 했다.
「어떻게 조작되었는지 알기 위해선, 당연히 조작되기 전의 상황부터 알아야겠지?」
「시련은 말이야.」
「너희가 사는 U+2641 행성의 관리자이자 창조주인 ‘균형을 재는 자’가 크게 실망해서 만든 일종의 시험이야.」
그딴 게 시험이라고? 일방적으로 서로 죽고 죽이게 하는 게 어떻게 시험이 된다는 거지?
「자자, 일단 들어봐.」
소녀는 일그러진 내 표정이 웃긴다며 키득대다가 말을 이었다.
「U+2641의 주민들이 각자가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타인을 유린하는 일이 점차 많아지는 걸 보고 ‘균형을 재는 자’는 엄청나게 실망했어.」
「특히 핵폭탄이었나?」
「다 같이 죽자는 식의 무기까지 만들어지고 나니 현타가 온 거지.」
「지금의 주민들에게 과연 희망이, 미래가 있을까 하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주민들을 시험해보기로 했어.」
「과연 선한 마음이 더 많이 남아 있는지, 아니면 악한 마음이 더 많이 남아 있는지 말이야.」
정말 그런 의도에서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 시련을 만들었다면 그딴 내용으로 진행했으면 안 됐다.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놓고는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다니. 어이가 없다.
「뒷담 까는 와중에 미안한데, ‘균형을 재는 자’는 시련이 어떤 내용으로 진행되는지 몰라.」
「‘균형을 재는 자’ 성격이 엄청 깐깐하거든?」
「본인이 시련에 개입하면 선입견이 들어가 공정하지 않게 진행될 수도 있다면서 시련의 진행을 다른 초월자 둘에게 맡겼어.」
「그러고는 지옥을 관리하는 초월자들한테 시련이 하나 끝날 때마다 판결 결과만 본인에게 알려달라고 부탁했지.」
「‘균형을 재는 자’는 몰랐던 거야.」
「진행을 맡긴 초월자 중 악을 관장하는 ‘알 수 없는 자’가 선을 관장하는 ‘자비를 베푸는 자’가 개입할 수 없게 막고 초월자들이 즐길 수 있는 게임처럼 시련을 조작할 거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