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진실 (4)]
확실히 시련이 진행되는 동안 ‘자비를 베푸는 자’라는 초월자를 본 기억은 없다.
「그럼 그럼. 내가 거짓말이라도 할까 봐?」
‘자비를 베푸는 자’가 시련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을 만큼 ‘알 수 없는 자’의 힘이 강하다는 건가? 그 정도로 힘의 격차가 나면 ‘자비를 베푸는 자’ 대신 다른 초월자들에게 시련을 맡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적어도 ‘알 수 없는 자’를 견제할 수 있는 초월자한테 말이다. 그랬더라면 이렇게 시련이 조작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깐깐하다는 것치곤 ‘균형을 재는 자’의 빈틈이 너무 컸다.
「‘균형을 재는 자’의 빈틈이 크다고? 그것도 너무?」
내 생각을 읽은 ‘방구석 만화광’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크게 웃었다.
뭐가 저렇게까지 웃긴 건지. ‘방구석 만화광’이 폭소한 포인트가 짐작되지 않아 잠자코 있었다.
「그 깐깐쟁이가 본인의 피조물한테 그런 평가를 받는 날이 올 줄이야.」
어느새 눈에 고인 눈물을 훔치며 ‘방구석 만화광’은 내 평가를 정정해주었다.
「깐깐쟁이의 빈틈이 큰 게 아니야. ‘알 수 없는 자’의 정신머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어긋나 있었던 거지.」
「그 어떤 초월자가 알았겠어?」
「‘알 수 없는 자’가 초월자 사이의 맹약을 깨고 본인의 재미부터 챙길지 말이야.」
“맹약, 이라고요?”
수연이의 물음에 ‘방구석 만화광’은 새끼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다른 초월자가 창조한 우주에 관여할 시 해당 초월자가 정한 규칙을 반드시 따라야만 한다.」
「제멋대로인 ‘알 수 없는 자’라고 하더라도 이 맹약만큼은 지킬 줄 알았던 거지.」
「이번 시련이 시작되기 전까진 단 한 번도 어겨진 적 없는 맹약이었거든.」
‘방구석 만화광’은 새끼손가락을 접고는 이번엔 검지와 중지를 펼쳤다.
「U+2641 행성의 주민들에게 시련을 부여하기로 정한 뒤, ‘균형을 재는 자’는 총 두 가지 규칙을 세웠어.」
「규칙 하나! ‘균형을 재는 자’의 우주에서는 시련의 무대를 제작하는 초월자들, 그러니까 지옥을 관리하는 초월자들만 초월력을 행사할 것.」
「규칙 둘! 초월력을 행사하여 시련에 임하는 주민에게 개입하지 않을 것.」
「‘균형을 재는 자’는 이 두 가지 규칙을 세우고 본인만의 공간에 틀어박혔지.」
「하지만 이 두 가지 규칙 모두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어.」
선서하듯 진지하게 외치던 ‘방구석 만화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소녀는 씁쓸하게 말을 이어갔다.
「‘균형을 재는 자’가 틀어박힌 지 얼마 안 되어 ‘알 수 없는 자’와 함께 U+2641 행성을 살피던 ‘자비를 베푸는 자’는 그대로 모습을 감췄어.」
「정확하게는 ‘균형을 재는 자’의 우주 어딘가에 봉인 당하고 말았지.」
「‘알 수 없는 자’가 첫 번째 규칙의 맹점을 이용한 거야.」
첫 번째 규칙의 맹점. 그건 분명….
「‘알 수 없는 자’는 평소 본인과 뜻이 맞았던 지옥의 판관 ‘진광대왕’을 포섭한 후, ‘자비를 베푸는 자’를 봉인하라 시켰지.」
…‘균형을 재는 자’가 만든 우주에서는 지옥을 관리하는 초월자만이 초월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거다.
「‘자비를 베푸는 자’의 힘은 지옥을 관리하는 초월자보다 훨씬 강하지만, 뭐 어쩌겠어?」
「맹약 때문에 ‘균형을 재는 자’가 만든 우주 안에선 초월력을 전혀 사용할 수 없는걸.」
「당연하게도 ‘진광대왕’은 너무나 손쉽게 ‘자비를 베푸는 자’를 봉인했어.」
「초월자 중 유일하게 힘으로써 본인을 견제할 수 있었던 ‘자비를 베푸는 자’가 봉인되자 ‘알 수 없는 자’는 곧장 맹약을 깼지.」
맹약을 깬 ‘알 수 없는 자’는 초월력으로 다른 우주의 괴수를 U+2641 행성에 끌어오기도 하고, 본인이 창조한 우주의 ‘축생계’에서 적용하던 시스템을 그대로 옮겨와 스탯 및 스킬 등을 도입하기도 했다. 포인트를 비롯한 후원 시스템을 만들어 초월자들이 게임처럼 시련을 즐길 수 있도록 마련한 것도 ‘알 수 없는 자’였다.
「‘자비를 베푸는 자’한테 방해받을 일도 없어졌겠다 ‘알 수 없는 자’는 본인이 원하는 대로 시련을 설계하기 시작했어.」
「시련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죄악 수치가 점차 쌓일 수밖에 없도록 말이지.」
「물론 나머지 지옥의 판관들을 포섭하는 것도 잊지 않았어. 너희 U+2641 행성의 주민들이 악행을 펼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도록 시련의 무대를 꾸며줄 초월자들이 필요했거든.」
「결국 ‘염라대왕’을 제외한 지옥의 판관들은 ‘알 수 없는 자’에게 포섭되어 그가 설계한 대로 시련의 무대를 제작했지.」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다음 ‘알 수 없는 자’는 다른 초월자들을 ‘균형을 재는 자’의 우주에 초대했어. 후원자로서 시련을 즐기라며 말이야.」
「물론 ‘자비를 베푸는 자’를 따르던 일부 초월자들은 초대하지 않았지. 아예 그들에겐 후원자로서 시련에 참여할 권한조차 부여하지 않았더라고.」
거기까지 말한 ‘방구석 만화광’은 지긋이 수연이를 바라보았다.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수연이를 한참 바라보던 소녀는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알 수 없는 자’가 너를 싫어한 거야.」
“저, 저를요?”
「‘자비를 베푸는 자’를 따르던 초월자가 너를 후원하고 있으니 싫어할 수밖에.」
“네? ‘자비를 베푸는 자’님을 따르던 초월자님들은 시련에 초대받지 못한 거 아니었어요?”
「그랬지. 하지만 한 대장장이 초월자의 해킹으로 ‘자비를 베푸는 자’를 따르던 몇몇 초월자들이 시련 중간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거든.」
「초월자들이 계속해서 임수연, 너를 죽이려는 이유도. ‘캠비온 녹스’가 메인 MC 자리에서 잘린 이유도 거기에 있어.」
마포대교에서 ‘레비아탄’ 때문에 몇 번이고 고생한 게 그런 이유에서였나.
「질문에 대한 답변 정리!」
「‘알 수 없는 자’는 U+2641 행성의 주민들이 악행을 행할 수밖에 없도록 시련을 조작했다.」
「이대로 시련이 계속되면 결국 죄악 수치가 100이 되어 최종 판결에서 주민 전원이 심판 대상이 될 예정이다.」
「결과적으로 ‘균형을 재는 자’는 U+2641 행성을 리셋시킬 거다.」
「이 정도면 첫 번째 질문엔 충분히 답하고도 남은 것 같은데. 아니야?」
행성이 리셋될 거란 말에 모두의 말문이 막혔다. ‘방구석 만화광’이 자세히 설명해주진 않았지만, 리셋이 대충 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너희가 짐작하고 있는 대로야.」
「리셋은 현재 행성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의 존재를 말소하고, 처음부터 새로이 문명을 시작하는 것.」
「그렇게 되면 U+2641 행성의 주민들은 ‘알 수 없는 자’를 비롯한 그를 따르는 초월자들의 손에 놀아나다 죽게 되겠지?」
‘어차피 조작된 시련이 진행되는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상 끝엔 죽음뿐이야.’란 ‘캠비온 녹스’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어찌어찌 시련을 클리어해서 살아남았다고 해도 리셋을 막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 없는 거네요.”
「안타깝게도 그렇답니다.」
“그럼 행성의 리셋을 막을 방법은 없나요?”
근심 어린 표정으로 수연이가 묻자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나 ‘아카식 레코드’는 세상 모든 사건을 목격하는 존재지, 해결책을 내리는 존재는 아니야.」
「만약 해결책이 존재한다면 여기서 들은 사실을 바탕으로 너희가 직접 도출해내길 바라. 그런 다음 너희가 세운 해결책이 사건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는지 보여줘.」
「사건의 흐름을 기록할 준비는 언제든지 돼 있으니깐.」
아무것도 없던 허공을 휘젓자 소녀의 손에 메모지가 집혔다. 신기하게도 메모지에는 지금 우리가 나누는 대화가 곧이곧대로 적혀 있었다.
소녀는 메모지를 바로 옆의 서재에 꽂아 넣고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질문 하나는 해결 완료!」
「지금부터는 정현, 네가 질문할 차례야.」
수연이가 물어봐 준 덕분에 시련이 어떻게 조작되었고, 이대로 가면 어떤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지 알게 되었다. 그다음으로 알아봐야 할 건….
“…‘죽음의 경계’에 처음 간 이후 제게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제가 묻고 싶은 건 그거예요.”
「인과율이 지운 네 기억을 알고 싶다는 거지?」
“네.”
「그거라면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는 게 낫겠네.」
「책 읽는 건 좋아하는 편?」
“딱히 싫어하지는 않죠.”
「굳!」
소녀가 손뼉을 치자 서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마구잡이로 서로 위치를 바꾸던 서재들은 소녀의 손짓에 맞추어 멈췄다. 소녀는 내 바로 옆의 서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서재엔 네가 겪었던 일들이 기록되어 있어.」
「받아.」
소녀가 다시 한번 손짓하자 서재에서 노트 한 권이 삐져나와 내 손에 잡혔다. 책을 펼치니 소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흔들었다.
「즐감해. 다 보고 감상평 꼭 들려주고!」
그 말을 끝으로 눈앞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그 많던 서재는 온데간데없고 온통 새하얀 공간만이 펼쳐져 있었다.
“초월자님? 수연아? 김화영 헌터!”
방금까지만 해도 같이 있던 사람들도 어디 갔는지 부름에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영문 모를 상황에 당황해하는 와중 누군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새하얀 공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닥친 어둠 탓에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대화라도 나눠보려고 말을 건네려던 때.
“여, 여긴 어디야?”
무척이나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망할 자식 때문에 ‘레비아탄’한테 머리를 씹혀서 죽은 게 아니었나?”
「망할 자식이라니? 그 덕분에 자네가 여태껏 살아남은 건데,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깜짝이야!”
「너무 아무 준비 없이 자네를 맞이했나? 생각보다도 더 놀라는군.」
당황한 듯한 목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근엄한 목소리 간의 대화 덕분에 지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놀랄 수밖에 없잖아. 초월자가 만든 공간 속이었나. 그럼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 크로노스가 맞았던 거야?”
「그 친구는 자네에게 전혀 존중받지 못하나 보군. 나름 초월잔데 이런 취급을 받을 줄이야.」
“네가 나한테 지금껏 해온 걸 생각하면!”
「진정하게나. 이 몸은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가 아니라네. 그 친구와 잘 아는 사이이긴 하다만.」
“뭐야, 그럼 난 왜 여기에….”
「이 몸의 이름은 ‘크로노스’. 본래 농업을 관장하는 신이지만, 이 지구에서는 시간을 관장하는 신으로 더 널리 알려져 시간을 다루는 힘을 쓰고 있다네. 그래 봤자 죽음의 경계에 갇힌 처지지만.」
지금 내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건 ‘크로노스’와 과거의 나. 그리고 서재에서 이동해 온 이곳은 ‘죽음의 경계’였다.
직접 보여주는 게 낫겠다더니, ‘죽음의 경계’에 처음 온 상황을 코앞에서 재생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