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54화 (155/168)

[24. 진실 (5)]

“저는, 아니 난 죽었을 텐데 어떻게 이 공간에 있는 거지?”

「자네가 참으로 신기한 처지에 있어서 가능했다네.」

어느새 과거의 나와 ‘크로노스’는 ‘죽음의 경계’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크로노스’는 일전에 이야기해줬던 것과는 달리 두 번째 설명이라며 귀찮다는 투의 사족은 붙이지 않았다.

「덕분에 ‘죽음 직후, 귀환 직전’에 놓인 자네를 여기로 초대할 수 있었지.」

「그나저나 자네에게 요리사 직업을 준 친구를 너무 미워하진 말게나.」

“그 직업 때문에 스탯이 0이 돼서 지금까지 수십 번 죽은 걸 생각하면!”

「아니, 반대지. 그 덕분에 자네가 지금까지 수십 번 되살아날 수 있었던 거라네.」

‘크로노스’가 ‘죽음의 경계’에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한 뒤,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레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 쪽으로 넘어갔다.

“무슨 소리야? 내가 살아난 건 전부 ‘CONTINUE?’ 특성 때문인데. 그쪽 덕분에 수십 번 되살아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거면 몰라도, 그 자식 덕분이란 말은 듣기 좀 그러네.”

「이 몸의 말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았네. 모든 스탯이 0이 아니었다면, 자네의 존재는 인과율에 의해 이미 소멸했을 터.」

이후 인과율에 의해 존재가 소멸하지 않도록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가 조치한 거란 이야기까지 마친 ‘크로노스’는 다음에 더 긴 이야기를 나누어보자며 과거의 나를 ‘죽음의 경계’에서 내보냈다.

눈앞에 ‘최근 저장 지점으로 돌아갑니다’라는 글씨가 새겨지고 얼마 안 되어 캄캄한 어둠이 걷혔다.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거냐니까?”

“어? 네 생각?”

빛이 주변을 밝히자 용산역 내부의 무기고 풍경이 보였다. 여러 무기가 잔뜩 쌓인 서점에선 또 다른 나를 보고 당혹스러워하는 송태섭이 있었다. 인과율이 지운 내 기억을 지켜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송태섭의 모습을 보자 나 역시 당혹스러웠다.

“왜 송태섭 헌터가….”

“장비 가져오라며. 나야말로 묻고 싶다. 네 생각을 읽을 수 있냐니? 무슨 말이야?”

“정현 헌터님, 무슨 일이에요?”

“죽음 직후, 귀환 직전에 놓였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전 신경 쓰지 마세요. 잠깐 넋을 놨었어요.”

“잠깐 넋을 놓은 사람이 할 법한 대사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쓸데없는 소리 하려고 따라오겠다 고집부린 거야?”

“죄, 죄송해요. 죄송한데….”

과거의 내가 일행과 나누는 대화를 듣는데, 뭔가 이질감이 들었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고 있다고 해야 할까? 과거의 나와 일행의 관계는 현재와 뭔가 미묘하게 달랐다. 다들 날카롭고 신경질적으로 나를 대하고 있었다.

“저희 작전 좀 변경해도 될까요?”

“또 그 소리야? 인제 와서 작전을 바꾸자고? 여기 적진 한가운데에서?”

“워워- 송태섭 헌터, 진정하세요. 저희 오빠 살짝 특이한 건 다들 알고 계셨잖아요. 그리고 항상 기발한 생각 떠올린다는 것도 다들 알고 계시죠? 그래서 오빠, 최종 점검까지 다 끝나서 장비만 오빠 특성으로 챙기고 나면 바로 출발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혹시 작전에 문제라도 있는 거야?”

그냥 내 느낌이라기엔 작전을 변경해도 되냐는 말을 귀담아들어 주는 것도 김화영과 이화뿐. 나머지 일행들은 또 헛소리하는 거냐는 투로 과거의 나를 무시하고 본인의 일에만 집중했다. 특히 이나은은 짜증 난다는 걸 숨길 생각도 없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이렇게까지나 일행에게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니. 이전의 난 대체 어떤 인간관계를 쌓아왔던 건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과거의 나는 이화의 도움을 받아 작전을 변경했다. 이화의 평판은 현재와 별반 다를 게 없는지 다행히 일행은 변경된 작전대로 움직여 주었다.

***

‘이면’에서 여러 괴수를 쓰러뜨리고 마침내 ‘레비아탄’까지 쓰러뜨린 과거의 난 빛에 휘감겨 유리 조각 밖으로 튀어나왔다.

“SSS급 괴수까지 쓰러뜨릴 정도면….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거야…. 오지 마세요!”

벌벌 떠는 박다현에게 과거의 나는 허세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이대로 우릴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면 나도 널 해치지 않을게.”

정말 악당 같은 표정으로 ‘궁중 식도’를 빙빙 돌리던 과거의 난 울먹거리는 박다현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아가는 다 죽었지만, 그쪽을 ‘이면’에 가두어둔다면…. 그러면 부대장님이 다 해결해줄 거예요.”

“방금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우릴 방해하지 않으면 넌 건드리지 않겠다니깐.”

“거짓말!”

박다현에 의해 과거의 나는 다시 ‘이면’으로 끌려갔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저 시점의 난 이미 ‘이면’에 관해 어느 정도 파악해둔 상태. 얼마 지나지 않아 스크린도어 조각에 얼굴을 비친 과거의 나는 다시 박다현의 앞으로 돌아왔다.

박다현의 앞으로 돌아온 과거의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란 책을 언급하며 그녀를 구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박다현은 이미 기절해버린 뒤였다.

“이미 기절해버렸네. 아직 기절하면 안 되는데.”

“어? 현아, 네가 쓰러뜨린 거야?”

과거의 내가 당황해하는데 김화영이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의 나와 김화영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노인을 비롯한 일행들도 다가왔다.

“다들 괜찮으세요?”

“난 괜찮다네. 다만, 한성수 헌터도 괜찮은지는 모르겠군. 나를 감싸다가 본인이 대신 다치는 바람에….”

“전 괜찮습니다. 일행에서 제 역할은 공격을 방어하는 것. 일행분에게 가해지는 공격을 대신 받는 건 익숙합니다. 오면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지금부터 저희는 위쪽으로 가서 교란팀을 도우면 되는 거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관계가 미묘하게 바뀌었다는 것 외엔 사건이 달라진 게 없이 흘러가서 계속 지켜봐야 하나 싶던 와중, 과거의 내가 뜻밖의 말을 했다.

“수연이만 여기 남고 다른 분들은 서둘러 위쪽으로 올라가 주세요. 수연이는 해줘야 할 일이 있어.”

분명 여기선 태울 만한 것들로 구덩이 안을 채워달라고 해야 할 터였다. 그런데 다들 위쪽으로 올라가 달라니.

“알겠습니다.”

다른 헌터들을 위로 올려보낸 뒤, 과거의 난 수연이만을 남겨둔 이유를 밝혔다.

“수연아, 이 여자애 좀 깨워줄 수 있어?”

“깨워달라고? 위험하지는 않을까?”

“괜찮을 거야. 나만 믿어.”

“알겠어.”

[스킬 ‘축복’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박다현’의 모든 상태 이상이 해제됩니다.]

[플레이어 ‘박다현’이 ‘기절’ 상태에서 깨어납니다.]

정신을 차린 박다현이 눈을 비비며 일어나자마자 과거의 나는 그녀를 붙들고 말했다.

“‘데스웜’, ‘이면’ 속에 집어넣어.”

“저 아가는 왜?”

“잔말 말고!”

살짝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한 탓인지 박다현은 잔뜩 긴장한 채 명령에 따랐다. 그때부터 사건은 처음 보는 형태로 흘러갔다.

과거의 난 수연이는 위로 올려보내고 박다현만을 곁에 남겼다. 그러곤 차분히 무언가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는 곧 알 수 있었다.

위쪽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과거의 난 박다현에게 또 한 번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여기 바로 위에다가 ‘데스웜’ 소환해.”

“네? 여기 위에는….”

“네 알 바는 아니잖아.”

위층의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이나은과 이화가 부대장하고 싸우고 있을 거란 건 대충 예상이 갔다. 그런데도 ‘데스웜’을 소환하라니. 과거의 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어서!”

‘궁중 식도’를 까닥이며 다그치자 박다현은 유리 조각에서 ‘데스웜’을 꺼냈다. ‘이면’ 밖으로 나온 ‘데스웜’은 거대한 입으로 천장을 파먹고 들어갔다. 그렇게 바닥에서부터 위층까지 이어진 거대한 통로가 파였다.

통로가 파인 동시에 부대장의 외침이 들렸다.

“내가 멋대로 스킬 쓰지 말라고 했잖아! 그런데 ‘이면’에 있어야 할 ‘데스웜’이 왜 여기 있는 거야! 강이란 헌터님께서 그날이 오기 전까진 스킬을 함부로 노출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리고 충격음이 이어졌다.

[A급 괴수 ‘데스웜’을 퇴치하였습니다.]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차등 배분됩니다.]

[기여한 바가 없어 보상이 지급되지 않습니다.]

부대장의 주먹에 터져 사방으로 흩어지는 ‘데스웜’ 파편 사이로 여러 헌터들이 떨어졌다. 구덩이 아래로 추락하는 헌터 무리에는 부대장뿐만 아니라 우리 일행에게 힘을 더해준 헌터들 또한 있었다. 아무래도 부대장과 싸우는 걸 돕다가 미처 피하지 못해 휘말린 모양이었다.

작전대로 하지 않고 멋대로 ‘데스웜’을 소환해 새로운 구덩이를 팠는데 우리 일행이 한 명도 휘말리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아군 적군 가릴 것 없이 구덩이 아래로 빠뜨린 과거의 난 천장에 대고 외쳤다.

“이화야, 구덩이 밑에 불 좀 질러줘!”

“어, 어?”

작전과 달라진 상황에 이화는 누가 봐도 당황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의 난 그런 건 아랑곳하지도 않고 구덩이 아래로 무기고에서 챙겨온 장비를 뿌렸다. 무수히 많은 장비가 구덩이를 메울 때쯤, 과거의 난 또 외쳤다.

“오빠, 저기엔 우리를 도와주신 분들도….”

“떨어진 충격으로 이미 다들 죽었으니깐, 빨리!”

이화는 망설이다가 눈을 질끈 감고 우산을 구덩이 아래쪽으로 뻗었다.

[스킬 ‘천마적룡’이 발동됩니다.]

우산에서 일곱 개의 머리가 달린 붉은 용 형태의 화염이 뻗어 나오더니 구덩이 아래로 쏜살같이 내려갔다. 부대장이 장비를 부수어 연소할 물질을 늘려준 덕분에 구덩이 아래에선 강한 불길이 일었다.

“‘레비아탄’의 시체.”

그를 흡족하게 바라보던 과거의 나는 ‘레비아탄’의 시체를 꺼내 구덩이 틈에 끼웠다.

이후 구덩이 아래의 산소를 부족하게 만들어 부대장을 쓰러뜨렸지만, 일행 간에 의견 충돌이 벌어졌다.

이대로 있다간 본인들마저 죽게 될 거라며 더는 못 참겠다고 외치는 김아람과 오빠도 다 좋은 뜻으로 한 일일 거라며 말을 뭉그러뜨리는 이화. 둘 사이의 말다툼을 들으며 과거의 난 피곤하다고 말한 채 기절하고 말았다.

***

“일어났네요.”

“어떻게 된 거야?”

“피곤하다고 말하자마자 바로 뒤로 자빠져서 주무시던데요.”

이나은과의 대화가 들리며 장면이 바뀌었다. 책에는 내가 겪었던 일만 기록되어 있는 건지 기절한 사이 벌어졌던 일은 볼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구덩이 메우고 있고, 저희만 먼저 여기로 왔어요.”

“왜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오지 않고?”

“더는 함께 행동하지 않겠다네요. 그쪽 동생하고 임수연 헌터랑 김화영 헌터 빼곤 다들 구덩이만 메우고 바로 떠난다고 했어요.”

“아쉽게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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