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55화 (156/168)

[24. 진실 (6)]

아쉽게 됐다고? 저게 내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벌써 몇 번씩이나 시련을 겪었으면서 왜 내 방식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거야? 시련에서 살아남으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려선 안 된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나?”

“오래 살아남을 사람들이 아닌 거죠. 이젠 남이나 다름없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요.”

“그래도 함께 한 정이 있는데. 얼마 못 가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게 안타까워서 그렇지.”

“됐고, 다음부터 작전 바꿀 거면 저한텐 미리 말해주세요. 하마터면 저도 휘말려서 구덩이에 빠질 뻔했다고요.”

“네 스탯이면 그 정도는 알아서 피할 수 있잖아?”

과거의 나는 표정의 변화 없이 너무나 냉정하게 단언했다.

“짜증 나는데 맞는 말이라 딱히 대꾸할 수가 없네. 그보다 구덩이 아래에 불붙여서 산소를 없앨 생각은 어떻게 하신 거예요?”

“그야 이전에 요리 가르쳐주던 분이 불에 관해선 특히 더 엄격하게 교육해주셨거든. 그분이 이산화탄소 소화기는 위험하다면서 강조했던 게 떠올랐어.”

“그분께 고마워해야겠네요. 덕분에 부대장을 쓰러뜨렸으니까요.”

“…그분껜 항상 고마워하고 있지. 넌 안 자도 괜찮아?”

“굳이 걱정하는 척 티 낼 필요 없어요.”

약간은 섬뜩하게 느껴지는 두 사람의 대화를 끊고 주인장이 나타났다.

“마셔.”

주인장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목부터 축이라고 권했다. 주인장이 건넨 잔을 단번에 마신 과거의 내가 말했다.

“시원하네요.”

“찬물 마시고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네.”

“참, 저랑 약속했던 건 들어주셔야 해요.”

“지인 소개? 내키진 않지만 들어줘야겠지.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약속해. 이번엔 우리 아르바이트생들이 휘말리지 않아서 넘어갔지만, 내가 소개해준 지인들이 네놈의 같잖은 작전에 휘말려서 죽는 일이 생긴다면 난 반드시 너를 찾아내 죽이고야 말 테야.”

사나운 눈빛으로 경고한 주인장의 말에도 과거의 나는 콧방귀만 낄 뿐이었다.

“전 약속대로 부대장을 쓰러뜨렸을 뿐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이번엔 내 지인들을 네 작전에 써먹겠다는 거야?”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강이란 그놈은 제 손으로 직접 죽일 생각이라 다른 사람들은 끼어들지 못하게 막을 거예요.”

***

주인장이 노들섬으로 과거의 나와 이나은을 데려다준 이후, 그들은 백민기를 만나 실험실에 침입할 작전을 세웠다. 작전은 전과 같았다. 강남 실험실 쪽에서 소란을 피워 전력을 분산시키는 동안, 나머지 인원이 공덕 실험실에 침입한다. 다만, 몇몇 일행이 곁을 떠난 터라 공덕 실험실에 침입하는 인원은 내가 알던 것과 달랐다. 떠나간 일행의 자리는 노들섬 헌터들이 메꾼 채 작전은 진행되었다.

“그럼 돌입하죠.”

수갑을 채운 백민기의 팔뚝을 붙잡은 과거의 나와 이나은이 편의점에서 나섰다. 세 사람이 공덕역 쪽으로 나아가자 역 주변을 돌던 헌터 둘이 다가왔다.

“너넨 뭐냐?”

그에 이나은이 행동을 취하려 했는데, 검을 든 헌터의 이마에 붉은 점이 찍혔다. 그러곤 곧 총알이 그의 이마를 꿰뚫었다.

자신의 동료가 쓰러지는 걸 보고 도망치려던 다른 헌터 역시 저격당하자 이나은이 당황하여 물었다.

“정현 헌터, 또 저 몰래 저격수를 배치한 거예요?”

하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인 건 마찬가지였는지 과거의 나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저편에서 송태섭과 동현이 형이 나타났다. 송태섭은 대검을 치켜세운 채 말했다.

“저격수를 배치한 건 우리야.”

“두 사람이 여기엔 왜?”

“저 실험실엔 우리도 볼일이 있거든. 너네라면 저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아냈을 것 같아서 이 주변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지.”

“저희한테서 백민기 헌터를 빼앗아 갈 생각이라면 그만두세요.”

한동안 이어지던 이나은과 송태섭 간의 대치를 깬 건 백민기였다.

“피차 목적이 같은 것 같으니, 일단은 함께 움직이는 게 어떻겠나? 전력이 조금이라도 늘면 서로에게 좋은 거 아니겠나?”

백민기의 중재로 과거의 나는 송태섭 일행과 함께 실험실 내부로 침입하였다.

이후의 상황은 내가 알고 있던 대로 일어났다.

실험실이 폭파하여 여러 번 죽음을 겪은 뒤에야 과거의 난 강이란과 단둘이 마주하게 되었고. 수많은 죽음을 거듭하여 결국엔 그를 쓰러뜨리기에 이르렀다.

“인제 그만 지긋지긋한 연 좀 끊자.”

과거의 내가 ‘퀴네에’를 벗고 바닥에 떨어진 식도를 집자 강이란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럴 줄 알았어. 나를 쓰러뜨릴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자기일 줄 알고 있었어. 내가 말했잖아. 자기는 혼란을 퍼뜨릴 퍼즐 조각이라고. 즐길 건 다 즐겼으니, 이제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심장에 식도가 꽂혔으나, 강이란의 눈은 이미 뒤집히고 있었다. ‘피의 살육자’가 강림하기 시작한 거다.

‘피의 살육자’가 강림하는 장면을 지켜보는데 뒤편에서 송태섭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게 아니지? 네 앞에 쓰러져 있는 사람, 강이란 맞아?”

“제대로 본 거 맞아요.”

“네가 어떻게 강이란을….”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 근데 군인은 왜?”

“네가 한 방송을 들었거든. 그래서 저 자식 죽이려고 데려왔지.”

송태섭은 증오 서린 눈길로 강이란을 바라보다가 급히 말했다.

“다시 ‘퀴네에’나 써.”

강이란의 몸에 강림한 ‘피의 살육자’가 서서히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분명 심장을 찔렀을 텐데….”

“자기, 강림의 조건 기억해? 강이란이 극찬한 자기라면 강림의 조건쯤은 기억하고 있을 텐데.”

“너 설마….”

“너라니. 자기, 격이 다른 존재 앞에서 너무 예의 없는 거 아니야?”

‘피의 살육자’가 본인의 심장을 뽑은 뒤 꽉 쥐어서 터뜨리자 송태섭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기들, 혹시 내가 무서워? 눈에 두려움이 가득한데?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야! 그래, 이거였어. 자기들 눈에 공포가 새겨질 때 차오르는 희열. 난 이걸 다시 느끼고 싶었다고!”

‘피의 살육자’가 지껄이는 말을 듣고 공포에 떠는 과거의 날 밀치고 송태섭이 앞으로 나섰다.

“무슨 스킬을 썼기에 죽은 놈이 되살아난 건진 모르겠지만 잘됐네. 이러면 내 손으로 강이란한테 복수할 수 있다는 거잖아. 너한테 선수를 빼앗겨서 분했는데, 다행이야.”

“다행이라고요?”

“난 알아서 빠져나갈 테니까 이번엔 꼭. 꼭 다른 일행들 다 챙겨서 먼저 나가 있어. 저번처럼 또 누구 버리려고 들지 말고.”

“네?”

“못 들었어? 빨리 도망이나 치라고. 네가 잘하는 거잖아.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동료 하나쯤은 버리는 거.”

이번에도 송태섭은 나 대신 ‘피의 살육자’와 상대하려 했다.

“저, 저 사람은 강이란이 아니에요. 초월자님이 강림한 상태라고요. 맞선다고 해도 죽게 될 거예요. 그런데 왜?”

“나도 너 같은 놈 살려주고 싶진 않지만, 시련 초반에 네게 목숨 한 번 빚졌으니까. 무엇보다 네가 방송한 걸 들으니 마냥 썩어빠진 놈인 것 같지도 않고.”

말을 마친 송태섭은 인질로 삼은 군인의 목을 그었다.

[플레이어 ‘송태섭’이 직업 승급 조건, ‘단시간에 플레이어 일곱 명 쓰러뜨리기’를 달성하였습니다.]

[플레이어 ‘송태섭’의 직업이 ‘광전사’로 승급합니다.]

“…너에 관한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후회하는 일은 없게 해줘라.”

송태섭이 발로 쳐낸 책상에 부딪힌 과거의 난 제어실 밖으로 밀려 나갔다. 송태섭의 대검이 번뜩이자 벽이 무너져 제어실로 이어진 통로가 완전히 막혔다.

[플레이어 ‘송태섭’이 ‘광기’에 휩싸여 이성을 잃습니다.]

***

지워진 기억에서도 송태섭은 본인을 희생하여 ‘피의 살육자’로부터 다른 일행들을 지켜냈다. 그리고 과거의 나 역시 그 사실에 완전히 멘탈이 나갔다. 그런 나를 대장간까지 데리고 간 사람은 노인이었다.

장면이 바뀌고 기절에서 깨어난 과거의 내가 보였다. 그런 내 곁엔 아빠의 행방을 묻는 한 소녀가 있었다. 과거의 내가 소녀의 말에 힘겹게 대꾸할 때, 노인이 나타났다. 소녀를 돌려보낸 노인은 과거의 나에게 현 상황을 들려주고는 뜸을 들이다 물었다.

“그러면 이제 내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나? 자네에겐 힘든 일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난 알아야겠네. 태섭이는 어떻게 된 건가?”

과거의 나는 한참 동안 입을 떼지 못하다가, 공덕 실험실에서 벌어진 일을 노인에게 말해주었다.

“만약 자폭 장치가 가동될 때까지 강림한 초월자님과 싸우고 있었다면 태섭이도 실험실 폭파에 휩쓸렸겠군.”

“죄송해요. 저 대신 강림한 초월자님과 싸우는 바람에….”

“죄송하다니? 자네가 사과할 이유가 어디 있나? 태섭이는 본인의 선택으로 그 자리에 남겠다 한 거네.”

“그렇지만 제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더라면….”

“자네가 아닌 그 누구라도 그 짧은 시간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을 거라네. 자네는 자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거야. 태섭이도 마찬가지고. 다만.”

노인은 잠시 단어를 고르더니 말을 이어갔다.

“지금껏 자네는 타인의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최대한 많은 일행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 거고. 태섭이는 본인의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최대한 많은 일행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점이 다르겠지.”

이후 노인은 엄하게 말하며 과거의 나를 토닥여줬다.

“강림한 초월자님을 상대했으니 아마 남은 수명을 거의 다 소비해 스탯을 올렸을 테지.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광전사’로 승급한 거고. 아마 처음부터 태섭이는 자네들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결심하고 ‘광전사’로 직업을 승급한 걸 거야. 그러니 자책하며 태섭이의 선택을 의미 없게 만들진 않았으면 하네. 그건 태섭이의 선택을 깎아내리는 거나 다름없으니. 그 대신 태섭이가 선택한 자네가 앞으로는 옳은 길을 택했으면 좋겠네. 태섭이도 말하지 않았나. 자네에 관한 본인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후회하고 싶진 않다고.”

과거의 내가 숨죽인 채 눈물을 흘리자 노인은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나 역시 태섭이가 죽기 직전에 내린 판단이 잘못되지 않았기를 바라네.”

송태섭의 희생, 노인과의 대화 때문이었을까? 그 뒤로의 행보는 현재의 내가 겪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족자 안에서 시련을 겪고.

‘축생계’와 합쳐진 뒤 만나게 된 수인들과 화합하기 위해 앞장서고.

양측 헌금함을 파괴하기 위해 노력하고.

동작대교에 나타난 초월자와 마주하게 된 것까지.

행보가 달라진 건 ‘허영의 사내’를 마주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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