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56화 (157/168)

[24. 진실 (7)]

본래 같으면 ‘허영의 사내’를 보고 귀환을 택한 뒤, 교주로부터 ‘캠비온’을 구출하는 쪽으로 노선을 틀었어야 했다.

그런데 과거의 나는 궁중 식도로 본인의 팔을 긋지 않았다.

“이깟 조작된 ‘시련’ 따위에 목숨 걸고 덤비다니, 그야말로 미물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군.”

“궁중 식도.”

“네깟 것도 모든 스탯 0인 미물 아니었나? 그 조그만 검으로 발악이라도 할 생각인가?”

“…그때 송태섭 헌터도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쓰러져 있는 이나은을 바라보며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과거의 나는 그대로 ‘허영의 사내’에게 덤벼들었다. 당연하게도 과거의 내가 휘두른 궁중 식도는 허공을 가를 뿐, ‘허영의 사내’에겐 닿지 않았다.

여유롭게 공격을 흘려낸 ‘허영의 사내’는 혀를 차며 경멸 섞인 어투로 과거의 나를 매도했다.

“너무 느리고, 단조로운 데다가 힘조차 제대로 싣지 못하는군. 이 몸에게 공격을 가했다고 칭하기도 아까운 수준이야. 막 태어난 갓난아이라도 네깟 것보다 검을 더 잘 다루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몸의 의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뒷짐 진 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만 모든 공격을 피하는 걸 보면 그만 포기하고 귀환을 택할 법도 하다. 그렇지만 과거의 나는 계속해서 궁중 식도를 휘둘렀다. 그런 내 모습은 끈질긴 걸 넘어서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했다.

“이상하군. 상성이 아무리 좋지 않다고 할지언정, 강이란이란 미물이 고작 이딴 놈한테 패하다니. 미물 간의 싸움은 도통 이해할 수 없단 말이지.”

하품까지 내쉬며 지루함을 온몸으로 드러내던 ‘허영의 사내’가 처음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대충 휘두른 주먹에 옆구리를 가격당한 과거의 나는 헛기침을 토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상이 심한지 헛기침을 할 때마다 입에선 피가 뿜어져 나왔다.

“숨겨둔 비장의 패도 없이 덤빈 건가? 네깟 놈의 광대 짓을 구경하는 것도 이젠 지루하군. 어울려주는 건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허영의 사내’는 주먹을 아래로 내리찍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뻗어 나간 주먹은 그대로 상반신을 뚫고 나왔다. 몸을 완전히 관통당한 과거의 나는 신음조차 토하지 못했다.

“고작 이런 공격에 꺼질 목숨이었다니. 참으로 덧없고 하찮군. 이딴 미물을 위해 ‘피의 살육자’에게 대신 죽어준 헌터가 있다는 게 어이없을 정도야.”

‘허영의 사내’가 주먹을 뽑자 상반신에 뚫린 구멍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래도 이 몸에게 조금이나마 흥미를 안겨준 상은 줘야겠지. 가는 길 외롭지 않게 네깟 것의 동료들도 차례차례 죽여주겠다고 약속하지. 어차피 지루해지면 미물들이나 학살하며 남은 시련을 지켜볼….”

그와 동시에 ‘허영의 사내’를 노려보던 눈이 감겼고 주변은 어둠에 잠겼다.

「자네 대신 ‘피의 살육자’에게 죽은 헌터의 영향인가?」

얼마 안 가 들려온 ‘크로노스’의 목소리는 과거의 내가 ‘죽음의 경계’에 왔음을 알려주었다. 과정은 달랐지만, 결국 과거의 나도 죽음을 맞이해 이곳에 다다른 것이었다.

「대책 없이 ‘허영의 사내’에게 맞설 줄이야. 자네답지 않군.」

‘크로노스’의 말이 있고 나서 한참 후에야 과거의 내가 답했다.

“…대책은 있어.”

「대책? 강이란 헌터를 상대했을 때처럼 무수히 많은 죽음을 감당하는 것도 대책이라 할 수 있나?」

「그런 방식으로 강이란 헌터를 쓰러뜨릴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의 고유 능력 때문이었다는 걸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모든 스탯이 0이 된 상대조차 힘겹게 쓰러뜨려 놓고, 같은 방식으로 초월력마저 행사하는 초월자를 상대하겠다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떻게든 동작대교에서 벗어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으면서 왜 그를 직접 상대하려는 거지?」

그렇게 말한 ‘크로노스’는 별안간 호탕하게 웃었다.

「‘허영의 사내’가 동료들을 죽이기 전에 자네가 먼저 그를 쓰러뜨리려는 거였나.」

「설마 인제 와서 동료애라도 생긴 건가?」

「자네 동생 외에 다른 헌터들은 모두 생존을 위한 소모품 정도로 여기고 있던 거 아니었나?」

「지금껏 수많은 죽음을 겪으면서도 변치 않던 마음이 한 사람의 죽음으로 변하다니.」

「이래서 자네한테 기대할 수밖에 없다니깐.」

“여기서 쓰러뜨리지 않으면 이후에 걸림돌이 될 게 분명하잖아. 본인 입으로 지루해지면 미물들이나 학살할 거라 말하기도 했고. 그래서 쓰러뜨리려는 것뿐이야.”

「운명이란 알 수 없군.」

「우연히 ‘CONTINUE?’ 특성을 얻은 자의 심성을 이렇게 바꾸어 놓다니.」

「어쩌면 이 행성이 완전히 끝장난 건 아닐지도 모르겠어.」

“행성? 갑자기 무슨 소리야?”

「별 의미 없는 말이니 평소처럼 무시하게나.」

「그보다 승부의 향방이 어찌 흘러갈지 궁금하지 않나?」

「자네가 비참한 죽음을 몇 번이나 맞이하게 될지 짐작조차 안 가는군.」

“재수 없는 소리 할 거면 ‘허영의 사내’ 쓰러뜨리는 데 도움 될 만한 정보나 알려줘.”

「그자의 초월력은 초월자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빼어나다네.」

「자네의 공격이 그자에게 닿는 일은 없을 거야.」

「보통의 경우라면 말이지.」

“전혀 도움 안 되는 정보 고맙다. 어차피 뭘 더 알려줄 것 같지도 않으니 귀환이나 시켜줘.”

「자네가 정말 내 기대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지 이번에야말로 확인할 수 있겠군.」

「조금이라도 빨리 즐거움을 누리고 싶으니 이거 하나 정도는 해주겠네.」

[‘이름 없는 자’님이 최근 저장 지점을 앞당깁니다.]

[CONTINUE?]

[최근 저장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크로노스’의 생각은 정확했다. 귀환 이후, 과거의 내가 뻗은 공격이 ‘허영의 사내’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스탯 0인 주제에 강림한 초월자의 몸놀림을 따라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고작 주먹 두 방. 합을 겨루었다고 볼 수도 없는 전투 끝에 죽음을 맞이한 것도 벌써 수백 번이 넘어갔다.

“이깟 조작된 ‘시련’ 따위에 목숨 걸고 덤비다니, 그야말로 미물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군.”

“궁중 식도.”

“네깟 것도 모든 스탯 0인 미물 아니었나? 그 조그만 검으로 발악이라도 할 생각인가?”

이대로 아무런 소득 없는 죽음만을 거듭하는 건지 의아해하는데 이변이 일어났다.

[플레이어 ‘정성훈’을 이길 수 없는 존재라고 인식하였습니다.]

[‘시기’ 특성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정현’과 플레이어 ‘정성훈’의 모든 스탯이 같은 수치로 맞춰집니다.]

[두 플레이어 중 한 명이 죽는 순간 스탯은 본래의 수치로 돌아갑니다.]

예상치도 못한 특성의 발동. 과거 ‘이면’에서 ‘레비아탄’을 먹고 얻은 특성이 발동됨과 동시에 ‘허영의 사내’의 표정이 굳었다.

“어째서 네깟 미물한테 그 특성이 있는 거지? 그 특성은 이 몸이 ‘레비아탄’에게 특별히 부여해준 거란 말이다!”

지금껏 발동된 적 없기에 ‘시기’란 특성에 저런 효과가 있는지조차 몰랐다. 이길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한 상대와 본인의 모든 스탯이 같은 수치로 맞춰진다니. ‘요리사’란 직업의 제약 조건으로 인해 내 스탯이 오를 일은 없으니 자연스레 삼촌의 몸에 깃든 ‘허영의 사내’의 모든 스탯이 0으로 맞춰진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스탯이 0이 되어서인지 ‘허영의 사내’의 움직임은 눈에 띌 정도로 현저히 느려졌다. 그가 뻗는 주먹은 강이란과의 싸움을 겪고 난 과거의 내가 피하기엔 충분한 속도였고, 오히려 ‘허영의 사내’가 공격을 피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상황이 역전되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초월력을 조금씩 쓰고 있는지 궁중 식도에 몸이 베인 순간 상처는 바로 회복되었고. 공격 한 번 한 번의 위력도 엄청나 조금이라도 스치면 ‘죽음의 경계’에 가는 신세를 피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전 수백 번의 전투에서 한 발짝 나아간 건 분명했기에 과거의 내 표정은 무척이나 밝아졌다. 오히려 느려진 몸에 적응하지 못한 ‘허영의 사내’ 쪽이 혼란스러운 듯 보였다.

“네깟 미물은 이딴 허약한 몸을 갖고 시련을 헤쳐왔던 건가?”

“지금이라도 제 노고를 위로하는 의미에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주시는 건 어떨까요?”

“감히 이 몸을 우롱하는 건가!”

모든 스탯을 0으로 만들고 그로 인해 혼란스러운 감정을 갖게 만든 걸로는 부족했던지, 분노한 ‘허영의 사내’의 주먹은 정확히 과거의 나의 명치에 꽂혔다. 스탯 0인 상태라기엔 주먹을 뻗은 속도가 빨랐던 것으로 보아 초월력을 실은 듯했다.

명치에 부딪힌 주먹은 몸을 뚫고 등 쪽에서 튀어나왔다. 초월력을 실은 공격을 피하지 못한 과거의 나는 한 발짝 나아간 데에서 만족하고 ‘죽음의 경계’로 돌아가야 했다.

그 뒤로도 분투는 계속되었다. ‘크로노스’가 다시 한번 귀환 시점을 앞당겨준 덕분에 ‘시기’ 특성이 발동된 직후의 상황으로 귀환하게 되었지만, 초월력을 조금씩 발휘하기 시작한 ‘허영의 사내’를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와의 전투를 고작 십 분 연장하는데 수백 번의 죽음을 감내해야 할 정도였다.

그래도 진전은 있었다.

공격 패턴을 익힌 건지, 아니면 수백 번의 죽음 속에서 몸이 절로 터득한 건진 모르겠지만 과거의 나는 조금씩 익숙한 몸놀림으로 ‘허영의 사내’의 공격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몇 번은 궁중 식도로 그를 위협하기도 했다.

죽음을 거듭하며 조금씩 전투 시간을 연장한 결과, 전황을 바꿀 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빛나는 눈의 전략가’님이 당신의 정의관과 용기를 높이 사 지혜를 전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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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눈의 전략가’가 과거의 나를 처음 보는 장소로 텔레포트 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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