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57화 (158/168)

[24. 진실 (8)]

동작대교가 얼핏 보이는 걸로 보아 ‘허영의 사내’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텔레포트한 건 아닌 듯했다.

“여긴 어디지?”

이동한 곳의 정확한 위치라도 파악해두려고 둘러보는데, 다시 한번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어느덧 과거의 난 거대한 신전 앞에 서 있었다. 두 번씩이나 새로운 장소로 이동한 데에 정신이 없었는지 과거의 난 멍하니 주변을 살피기만 했다.

「들어오세요.」

그런 와중 신전 안쪽에서 따뜻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에 홀린 듯 과거의 내가 천천히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 신전 쪽으로 걸어가던 도중, 문득 이곳이 어딘지 떠올랐다. 과거의 나도 마찬가지였는지 신전 이름을 중얼거렸다.

“파르테논 신전?”

완벽히 복원된 신전은 이 장소가 어딘지 알려주기에 충분했다.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 여신을 모시는 신전. 여긴 ‘빛나는 눈의 전략가’가 만들어낸 정신세계 안이었다.

“직접 만나보는 건 처음이네.”

인과율이 기억을 지운 이후, ‘빛나는 눈의 전략가’와 정신세계에서 대면한 적은 없었기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흥미가 일었다.

과거의 내가 신전 안에 들어서자 수많은 올빼미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사방에 흩날리는 깃털을 헤치고 신전 중심부에 다다르니 갑옷을 걸친 여전사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반겨주었다. 여전사 옆에는 날개 달린 한 여성이 서 있었는데, 그녀는 오로지 여전사를 바라볼 뿐 신전에 새로 들어온 손님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고귀하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는 두 여인의 기품에 사로잡혀 넋을 잃고 쳐다보는데, 여전사가 말을 건넸다.

「그대의 전투를 방해한 건 아닌가 걱정되네요.」

「전쟁의 여신이라고도 불리는 제가 그대와 ‘허영의 사내’ 간의 전투를 방해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이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셨으면 해요.」

「저는 그대의 혼이 초월자의 흥미를 위해 스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거든요.」

초월자임에도 인간을 존중해주는 여전사의 말은 그녀야말로 진정한 여신이라고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는 한편 의아한 기분도 들었다.

저렇게 인간을 존중할 줄 아는 초월자가 왜 조작된 시련을 방관하고만 있는 건지 의아해한 것도 잠시. ‘빛나는 눈의 전략가’가 먼저 그 이유를 밝혔다.

「그대들에게 주어진 시련 자체가 증오의 연쇄를 야기하고 이기주의, 혐오 같은 부정적인 감정만을 증폭시키도록 유도하는 건 알고 있었어요.」

「시련이 뭔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건 눈치챘지만, 저 나름대로 품고 있던 기대가 있었기에 따로 행동에 나서진 않고 뒤에서 그대들을 지켜보고 있었답니다.」

「저런 시련 속에서도 인간의 정의롭고 선한 마음은 빛을 발할 거라고 믿었거든요.」

「하지만 시련이 진행될수록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회의감만 커졌어요.」

「그대들의 본질은 사실 악이 아닐까 하고요.」

「그러다 그대의 변화를 목격했어요.」

「주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정의로운 과정을 포기했던 그대가, 그들의 영향을 받아 정의로운 과정마저 추구하는 쪽으로 변화하는 걸 말이에요.」

「그 변화에 다시 한번 인간이란 존재를 믿기로 했어요.」

「그리고 제 믿음의 결과를 지켜보고 싶어 그대와 전속 계약을 맺게 된 거였답니다.」

내가 전속 계약을 맺을 상대로 ‘빛나는 눈의 전략가’를 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그 많던 초월자 중 그나마 정상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랬는데 정작 초월자는 저렇게나 깊은 뜻을 갖고 나와 전속 계약 맺었던 거였다니.

저런 뜻을 지닌 초월자라면. 어쩌면 지금 헌터들에게 닥친 가장 큰 문제인 조작된 시련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으로 ‘방구석 만화광’의 도서관에서 나간 뒤의 일을 궁리하는데, ‘빛나는 눈의 전략가’의 말이 이어졌다.

「첫 만남이다 보니 서론이 길어졌네요.」

「한시 빨리 동작대교로 돌아가 강림한 ‘허영의 사내’를 막고 싶어 하니 본론으로 넘어갈게요.」

「제가 그대를 정신세계에 초대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지혜를 전달하고 싶어서예요.」

“지혜를요?”

「올바른 정의관과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앞세워 ‘허영의 사내’를 상대하고 있다는 점은 높게 사요.」

「하지만 전투에선 언제나 냉정해야 해요.」

「감히 단언컨대 ‘시기’ 특성만으론 초월력을 행사하는 초월자를 쓰러뜨릴 수 없어요.」

“지금은 그렇겠지만, 전투를 이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당연히 ‘빛나는 눈의 전략가’도 ‘CONTINUE?’ 특성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허영의 사내’와의 전투가 더 이어졌다간 내가 죽게 될 것을 염려하여 기회를 보아 안전한 곳으로 텔레포트 시킨 거였다.

「그대는 상황을 직시하고 냉정하게 문제를 파훼하는 지혜로 전투에서 이겨나가는 법을 알고 있어요.」

「부디 감정은 삭이고 냉정을 유지하세요.」

“…알겠습니다.”

여전사의 자애로운 미소에 과거의 나는 숨을 골랐다. 지금 여기서 ‘빛나는 눈의 전략가’와 실랑이를 벌여봤자 ‘CONTINUE?’ 특성에 관해선 어차피 전하지도 못하고 시간만 낭비할 뿐, 초월자의 선의마저 무시하는 행위임을 깨달은 듯했다.

「냉정을 되찾으셨다면,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강림한 ‘허영의 사내’를 쓰러뜨릴 지혜를 짜내는 데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전달하고 싶다던 지혜가 ‘허영의 사내’를 쓰러뜨리기 위한 지혜였다니. 필요한 정보를 얻을지도 모르는 뜻밖의 기회에 덩달아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제 옆의 초월자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초월자 중 ‘물길을 인도하는 자’란 초월자가 있답니다.」

「저희 셋은 초월자들이 직접 강림해서 여러분의 시련을 방해하는 행위만은 막아야 한다고 뜻을 모았어요.」

「그래서 저희는 그대를 도와 강림한 ‘허영의 사내’가 꾸미는 짓을 막을 생각이에요.」

여전사가 눈짓하자 날개 달린 여성이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노란빛을 띤 기다란 창이 나타났다. 날개 달린 여성은 여전히 시선을 여전사에게 고정한 채 창을 과거의 나에게 건넸다.

과거의 내가 창을 받아들자 글씨가 새겨졌다.

[‘??? ???? ?? ?’]

- 사용 가능 직업 : 전 직업

- 장비 등급 : 신기

- 내구도 ? 공격력 ? 방어력 ?

「그대에게 건넨 신기의 이름은 ‘바사비 샤크티’.」

「‘물길을 인도하는 자’가 그대에게 전해달라고 제게 맡긴 신기예요.」

[‘??? ???? ?? ?’ 장비가 이름을 드러냅니다.]

[‘물길을 인도하는 자의 창’]

[‘물길을 인도하는 자’님이 플레이어 ‘정현’에게 ‘바사비 샤크티’의 이용 자격을 부여합니다.]

[‘물길을 인도하는 자의 창’이 진정한 힘을 드러냅니다.]

[‘바사비 샤크티’]

- 사용 가능 직업 : 전 직업

- 장비 등급 : 신기

- 내구도 1 공격력 ∞ 방어력 0

- ‘바사비 샤크티’에 찔린 존재는 반드시 소멸합니다. 그 후, ‘바사비 샤크티’는 파괴됩니다.

- 현재 이용 자격은 플레이어 ‘정현’에게 있습니다.

‘빛나는 눈의 전략가’가 건넨 신기의 위력을 확인하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공격에 적중당한 존재를 반드시 소멸시킬 수 있다니. 저래서 ‘허영의 사내’와 마주했을 때 떠올랐던 기억 속 이나은과 내가 저 창을 들고 있던 거였다.

「그대가 소유한 세 가지 신기를 잘만 활용한다면 반드시 ‘허영의 사내’를 쓰러뜨릴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대가 잊고 있는 게 있어요.」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에게 ‘플레이어 지명권’이 있단 사실.」

「이 정도만 말해도 그대의 지혜라면 제가 준 정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알 수 있으리라 믿어요.」

「그럼 그대에게 승리가 있길 축복하며 이만 인사드릴게요.」

그를 끝으로 ‘파르테논 신전’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다. 곧이어 ‘빛나는 눈의 전략가’는 포인트를 사용해서 과거의 나를 동작대교로 텔레포트 시켜 주었다.

또 한 번 본인의 앞에 나타난 나를 본 ‘허영의 사내’는 겁먹고 도망친 것 아니었냐며 코웃음 치다 사레들린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의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는 온통 ‘바사비 샤크티’에 꽂혀 있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과거의 나는 공격을 감행했다.

본인의 존재마저 소멸시킬 수 있는 신기의 등장에 당황했지만, 자존심 때문인지 ‘허영의 사내’는 싸움을 피하진 않았다. 심지어 본인 대신 과거의 나를 상대하겠다던 교주까지 직접 죽일 정도였다.

‘허영의 사내’와의 이차 전이 시작되고 과거의 나는 또다시 수많은 죽음을 거듭해야만 했다.

‘크로노스’의 도움으로 귀환 시점을 새로운 신기를 받은 이후로 앞당기기까지 한 과거의 나는 ‘퀴네에’와 ‘바사비 샤크티’ 뿐만 아니라 ‘빛나는 눈의 전략가’에게 받았던 또 다른 신기 ‘아이기스 방패’까지 장비한 채 전투를 이어갔으나 본격적으로 초월력을 쓰기 시작한 ‘허영의 사내’에겐 역부족이었다.

결국 과거의 나는 ‘플레이어 지명권’이란 카드까지 꺼내 들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로 하여금 이나은과 전속 계약을 맺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어째서인지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전속 계약을 맺자마자 엄청난 양의 포인트를 후원해 이나은의 스탯을 올릴 수 있도록 조치해주기까지 했다.

그때부터 과거의 내가 집중하기 시작한 포인트가 달라졌다.

죽음을 거듭하면서 이나은이 기절에서 깨어날 수 있을 때까지 버티는 쪽으로 노선을 바꾼 것이다.

얼마나 많은 죽음을 반복했을까.

이나은이 마침내 기절에서 깨어났다. 과거의 나에게 대략적인 상황 설명을 들은 그녀는 곧장 전투에 참여했다. 강림한 ‘허영의 사내’를 막고 싶다던 초월자들이 작정하고 합심했는지 이나은에게도 곧 ‘바사비 샤크티’ 이용 자격이 주어졌다.

그 뒤부턴 ‘허영의 사내’와 마주했을 때 머릿속을 스쳐 갔던 장면대로 기다란 창을 찔러넣기 위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나은과 과거의 내가 힘을 합쳐 ‘허영의 사내’를 몰아넣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한 존재를 반드시 소멸시킬 수 있는 신기. ‘허영의 사내’를 쓰러뜨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초월자들. ‘CONTINUE?’ 특성까지.

‘허영의 사내’를 이길 만한 재료는 다 갖춰진 것 같은데 왜 나는 여기서 그를 쓰러뜨리지 못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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