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진실 (9)]
더군다나 ‘허영의 사내’는 ‘시기’ 특성으로 인해 모든 스탯이 0이 되어버린 상황. 그런데도 그를 쓰러뜨리지 못했다는 건.
“‘허영의 사내’에게 감춰둔 패가 있다는 거겠지.”
그 패가 무엇이기에 강림한 ‘허영의 사내’를 막아낼 수 없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로써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시기’ 특성하고 저 창만으론 ‘허영의 사내’를 쓰러뜨릴 수 없다.
보기엔 ‘허영의 사내’가 수세에 몰린 것 같았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음을 파악하고 다시 전황을 바라보니 새로운 사실이 눈에 띄었다.
창을 찔러 넣으려다 실패한 과거의 내가 ‘CONTINUE?’ 특성으로 귀환해 또 다른 방식을 시도해 보는 동안, ‘허영의 사내’는 동작대교를 불태웠을 때 사용했던 것과 같은 대규모 기술을 전혀 쓰고 있지 않았다.
“나랑 이나은 헌터 정도는 그런 기술 없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건가? 그게 아니면….”
…그때와 달리 지금은 대규모 기술을 사용할 수 없다거나.
“전투를 좀 더 지켜보면 답이 나오려나?”
의문을 품고 전투를 지켜보는 사이에도 과거의 나는 몇십 번이고 죽음을 거듭하며 ‘허영의 사내’에게 덤벼들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과거의 내가 겪는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해, ‘아카식 레코드’의 책에는 왜 2배속이나 스킵 기능이 없는 거냐고 불평하려는데.
“드디어.”
방심했는지 ‘허영의 사내’는 이나은이 발길질을 빗맞혀 일으킨 균열에 발을 헛디뎠고. 그에 몸의 균형이 살짝 무너졌을 때, 과거의 나와 이나은이 공격을 퍼부어 ‘허영의 사내’가 바닥에 쓰러지고야 말았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네.”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엎어진 ‘허영의 사내’에게 창을 겨눈 이나은. 그 상황이 수치스러웠는지 ‘허영의 사내’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네깟 것들이 감히!”
그런 ‘허영의 사내’의 호통에 굴하지 않고 과거의 나는 말했다.
“…이나은 헌터, 이제 끝내자.”
내 말에 가쁜 숨을 몰아쉬던 이나은이 창을 높이 들어 올렸고. 이윽고 짧은 기합과 함께 창을 아래로 내리찍었다.
심장을 노리고 떨어지는 ‘바사비 샤크티’. 이대로면 ‘허영의 사내’란 존재를 소멸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허영의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우습군.”
이나은 역시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는지, 창을 쥔 손에 힘이 더 들어갔으나.
[플레이어 ‘정성훈’을 이길 수 있는 존재라고 인식하였습니다.]
[‘시기’ 특성이 해제됩니다.]
[플레이어 ‘정현’과 플레이어 ‘정성훈’의 모든 스탯이 본래의 수치로 돌아갑니다.]
이미 ‘바사비 샤크티’는 ‘허영의 사내’의 손에 붙들려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정말로 이 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크핫, 크하하하하! 어이가 없군. 이 몸이 고작 이깟 미물 따위한테 무시당할 줄이야.”
창을 사이에 둔 힘의 균형을 깨기 위해 이나은이 용을 썼으나, ‘허영의 사내’는 바닥에 엎어진 채로 너무나 편안하게 힘겨루기를 이어갔다.
“‘시기’ 특성은 이 몸이 ‘레비아탄’에게 부여한 것. 그 효과와 한계에 대해 이 몸이 모를 리가 없지.”
‘허영의 사내’의 시선은 이나은을 향해 있지도 않았다. 그는 과거의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 특성이 네깟 것에게 넘어간 건 상정 외였으나, 덕분에 잠시나마 즐길 수 있었군. 이 몸의 연기에 속아 넘어가는 꼴이라니. 한심하기 그지없어.”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선 ‘허영의 사내’는 창을 자신 쪽으로 당겼다. 갑작스럽게 힘의 균형이 깨지자 이나은의 몸은 창과 함께 ‘허영의 사내’ 쪽으로 쏠렸다. 그런 이나은의 목을 살포시 움켜쥐며 ‘허영의 사내’는 말했다.
“어울려주는 것도 이제 질리는군. 여흥은 여기까지. 강림한 이 몸이 해야 할 일은 차고 넘쳤다.”
“닥….”
“그 입 다물라고 했을 텐데.”
“큭.”
목을 움켜쥔 손에 핏줄이 솟자, 숨이 막히는지 이나은의 얼굴이 붉어져 갔다.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이나은을 내버려 둔 채, ‘허영의 사내’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고 얼마 안 되어 수많은 글씨가 새겨졌다.
[‘허영의 사내’님이 500만 포인트를 사용하여 자신의 수혜자를 텔레포트 시킵니다.]
[‘허영의 사내’님이 500만 포인트를 사용하여 자신의 수혜자를 텔레포트 시킵니다.]
[‘허영의 사내’님이 500만 포인트를 사용하여 자신의 수혜자를 텔레포트 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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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의 사내’님이 500만 포인트를 사용하여 자신의 수혜자를 텔레포트 시킵니다.]
[‘허영의 사내’님이 500만 포인트를 사용하여 자신의 수혜자를 텔레포트 시킵니다.]
[‘허영의 사내’님이 500만 포인트를 사용하여 자신의 수혜자를 텔레포트 시킵니다.]
헌터들은 하나둘 ‘허영의 사내’ 주위로 텔레포트 되었다. 마지막 글씨가 새겨졌을 땐, 제법 많은 수의 헌터들이 ‘허영의 사내’를 둘러싸고 있었다. 다들 자신이 포함된 구역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던 모양인지, 온몸이 피로 흥건했다.
전속 계약 맺은 초월자가 별안간 자신들을 텔레포트 시킨 것이 의아했던 듯, 그들은 하나같이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중에는 이화도 있었다. 다른 헌터들과 마찬가지로 주변을 둘러보던 이화는 나를 발견했는지 뭐라 뭐라 외쳤다. 하지만 ‘허영의 사내’의 외침에 이화의 말은 묻히고 말았다.
“지금껏 이 몸에게 빌린 힘으로 충분히 즐겼겠지. 인제 이 몸이 요구했던 대가를 받아낼 차례다.”
‘허영의 사내’의 선언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한번 글씨가 새겨졌다.
[빌려온 힘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빌려온 힘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빌려온 힘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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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온 힘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빌려온 힘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빌려온 힘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글씨가 새겨지자, 온몸에 힘이 빠져나간 듯 모두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허영의 사내’에게 붙들려 있던 이나은도 어느새 축 늘어져 있었다.
이나은을 헌터 무리 쪽으로 집어던지곤 ‘허영의 사내’는 전에 동작대교에서 썼던 기술을 사용했다.
화염으로 뒤덮인 붉은 용과 얼음으로 뒤덮인 푸른 용이 다리 위를 자유로이 누비며 쓰러진 헌터들을 사냥하는 동안, ‘허영의 사내’는 과거의 내게 말을 건넸다.
“인제 본래의 힘을 일부나마 쓸 수 있게 된 것 같은데…. 아직도 이 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허영의 사내’의 모욕에도 과거의 나는 아무 말 없이 입술만을 깨물고 있었다. 따로 답을 하진 않았지만, 과거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표정에서 드러났다.
‘초월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허영의 사내’를 상대로 승리를 가져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인진 몰라도 과거의 나는 상황이 점차 악화하는데도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죽음을 거듭하며 ‘허영의 사내’를 상대했던 것과는 분명 대조되는 행동이었다.
그런 과거의 날 맘껏 비웃던 ‘허영의 사내’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가 손을 뻗은 부근의 허공이 벌어지더니, 붉은 틈이 생겨났다. ‘허영의 사내’는 그 붉은 틈에서 검 한 자루를 뽑아냈다. 검 끝부터 자루까지 완전히 붉게 물든 검. ‘허영의 사내’는 그 검을 집은 채로 과거의 나에게 다가갔다.
“잘 가라.”
과거의 나는 체념한 채 눈을 감았고, ‘허영의 사내’가 집은 검은 그대로 심장에 꽂혔다.
[죽음의 경계로 이동합니다.]
이젠 익숙해진 글씨가 새겨지고, 세상은 어둠에 잠겼다.
「그렇겠지. 아무리 인간의 몸에 강림했을지라도, 초월자는 초월자. 한낱 인간이 상대하기엔 벅찰 수밖에.」
‘크로노스’의 목소리가 들리고 다시 주위가 밝아졌다. ‘죽음의 경계’에 온 것이다.
“깜짝이야!”
멋대로 등장한 ‘크로노스’에 놀란 과거의 나는 보기 좋게 뒤로 자빠졌다.
“나올 거면 인기척이라도 보이라고!”
꽤 능글맞게 말하긴 했지만, 목소리에선 좌절감이 느껴졌다. 그 좌절감은 이길 수 없는 존재와 맞닥뜨린 데에서 나왔을 게 분명했다.
「자네는 보면 볼수록 재미있군. 초월자에게 그렇게 대할 수 있는 인간은 자네밖에 없을 거네. 그나저나 이번 귀환에서도 429, 514, 515, 821번째 죽음을 겪었을 때와 같은 실수를 범했더군.」
“굳이 그렇게 자세히 언급할 필욘 없잖아.”
「그러면 과거가 아닌 미래의 이야기를 해보지. 다음 귀환 때는 어떻게 할 거지? 이번에야말로 죽음을 피할 방법이 떠올랐나?」
‘시기’ 특성이 해제되어 본래 스탯을 되찾고 초월력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허영의 사내’를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비꼼이겠지.
‘크로노스’의 물음에 과거의 나는 말없이 한참을 있었다. 그러다 입을 열었을 땐, 의외로 당당한 어투로 말했다.
“한낱 인간이 초월자를 상대하긴 벅차다며.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잖아.”
과거의 내가 말하려는 방법이라면 역시….
「하나뿐?」
“내가 제물이 될 테니까 그쪽이 나한테 강림해. 초월자 상대는 초월자가 해야지. 안 그래?”
…‘크로노스’를 내 몸에 강림시키는 것.
「자네 지금 뭐라 그랬나?」
과거의 나답게 지금껏 과거를 지켜봐 온 나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강림? 초월자 따윈 혐오스럽다며 도움받지 않겠다더니, 인제 와서 이 몸 보고 자네에게 강림하라고?」
“나라고 좋아서 이러는지 알아? 남은 방법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그러지.”
「제안은 고맙다만, 안타깝게도 이 몸은 자네에게 강림할 수 없다네.」
그렇겠지.
“뭐?”
‘크로노스’가 내 몸에 강림할 수 있었더라면, 이미 이 시점에서 ‘허영의 사내’를 어떻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러지 못했고, ‘허영의 사내’는 지금도 날뛰고 있는 형상이다. 당연히 ‘크로노스’가 내 몸에 강림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고 보는 게 맞다.
그러니 지금부터 내가 초점을 맞추어야 할 건, ‘크로노스’의 강림을 방해한 제약이 무엇인지. 또 그를 어떻게 없앨 수 있을지. 이거다.
「이 몸은 여기 ‘죽음의 경계’에 봉인 당한 상태. 봉인이 해제되기 전까진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네.」
“지금껏 그런 말 한 적 없잖아. 그렇게 중요한 걸 왜 이제야 말하는데!”
「그야 자네가 초월자의 도움 따윈 필요 없다고 설치지 않았나.」
“제길. 그럼 그 망할 봉인은 어떻게 풀 수 있지?”
「지금으로선 불가능하네. 이곳의 봉인을 해제하려면 네 개의 신기가 필요한데, 자네가 정해진 시점으로 귀환한다고 하더라도 그를 모으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
네 개의 신기?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