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진실 (10)]
“방법?”
과거의 내가 묻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 뜸 들이던 ‘크로노스’가 답했다.
「자네가 ‘멸망 이전의 과거’로 가서 ‘허영의 사내’가 강림하기 전에 네 개의 신기를 모아 이곳의 봉인을 해제하는 거지.」
그 답변을 듣자 입이 떡 벌어졌다.
딱히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그렇게 많은 암시가 있었는데, 여태 눈치채지 못했다면 그게 이상한 거겠지.
그런데도, 시련이 시작되기 전의 과거로 시간을 되감았단 사실을 직접 들으니 놀라움을 넘어 뭔가…. 뭔가 거대한 힘에 경외감이 들었다.
충격받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과거의 나도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과거의 난 가까스로 ‘크로노스’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멸망 이전의 과거? 설마 지금 시련이 시작되기 전으로 가라는 말이야? 그게 가능키나 해?”
「이 몸의 초월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단, 제약이 있네. 이 몸이 직접 시간의 축을 움직이게 되면 인과율이 반발할 걸세. 그 말인즉슨 멸망 이후 일어난 일들에 대한 자네의 기억이 모두 없어지게 된다는 거지.」
“과거로만 돌아갈 수 있다면 상관없어. 없어진 기억은 그쪽이 나한테 알려주면 되는 거 아냐?”
「이 몸이 기억을 알려줘봤자, 인과율이 다시 개입해 자네에게 있어선 안 되는 기억을 모두 지울 거네.」
“기억을 알려주지 않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충분히….”
「무엇보다 지금과 같이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이 몸은 봉인을 만든 초월자들의 감시를 피할 수 없어. 이 몸이 자네를 도와 무슨 일을 꾸미는지 눈치챈 순간, 그들은 자네를 죽이기 위해 움직일 거네.」
“그럼 과거로 가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
문제는 저거다. 시련 이후 ‘허영의 사내’란 큰 벽에 부딪힐 때까지 쌓아온 기억을 모두 잃은 채 과거로 돌아간다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거다. 인과율, 그리고 ‘죽음의 경계’에 ‘크로노스’를 봉인한 초월자들. 저들에 의해 ‘크로노스’가 직접 개입하지도 못하고. 그래서야 과거로 시간을 되돌린 의미가 없다.
실제로 ‘죽음의 경계’의 봉인을 해제하는 데 필요한 네 개의 신기가 무엇인지 모르는 건 저 때와 마찬가지인데. 지금은 ‘빛나는 눈의 전략가’로부터 ‘바사비 샤크티’를 얻어내지도 못했으니…. 상황은 더 악화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야 이 몸의 즐거움을 위해서지. 지루함을 달래기에 자네의 발버둥만큼 좋은 여흥 거리는 또 없거든. 자네를 과거로 보낸다면 세상을 구한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을 좀 더 지켜볼 수 있지 않겠나?」
하지만 저 말을 들으니 방금까지 한 내 고민이 우습게 여겨졌다.
즐거움을 최우선으로 둔 존재한테서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니.
“어쩔 수 없네. 기회라도 주어지는 게 어디야. 그럼 그렇게 해보자고.”
「좋은 생각일세. 그리고 혹시 아나? 자네가 이번엔 그녀를 살릴 수 있을지?」
‘크로노스’가 말하는 그녀라면 이화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이나은? 뭐, 둘 중 누구든 상관없나. 저 동작대교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으니.
“썩을 놈! 굳이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그럼 다음에 보자고. 참! 마냥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으니, 이 몸 대신 자네를 도우라고 우리의 오랜 친구에게 부탁해두긴 하겠네.」
“오랜 친구라면 내게 쓸데없는 직업을 준? 그 초월자는 시련 내내 방해만 됐는데, 무슨 도움을 준다고!”
「시끄럽긴.」
[‘이름 없는 자’님이 시간의 축을 되감습니다.]
[‘이름 없는 자’님이 지정한 시점으로 돌아갑니다.]
[인과율이 개입합니다.]
[‘이름 없는 자’님이 되감은 시간 동안 생성된 기억이 모두 지워집니다.]
글씨가 새겨지고. 그렇게 과거의 난 ‘죽음의 경계’에서 모습을 감췄다.
“이러고 시련이 시작되기 전의 시점으로 되돌아간 건가….”
인과율이 지운 기억은 여기까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주변에 펼쳐진 ‘죽음의 경계’는 사라질 생각을 안 했다.
“이젠 어떻게 되는 거죠? 아직 뭔가 더 볼 게 남은 거예요?”
소리 높여 물었으나, ‘방구석 만화광’으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허공에서 무언가 긁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았던 소리는 점차 커지며 불쾌감을 더해주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칠판 긁는 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주저앉았을 때, 눈앞의 공간에 틈이 벌어졌다.
곧 그 틈을 비집고 한 사내가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미칠 듯이 고막을 후벼파던 소리도 사라졌다.
갑자기 정면에 나타난 사내한테선 포도 향이 났다. 강렬한 포도 향은 금방 ‘죽음의 경계’를 가득 채웠다. 무색무취의 공간이 달콤한 향기로 가득 찬 공간으로 탈바꿈했을 때, ‘크로노스’가 말했다.
「아슬아슬할 때 도착했군.」
‘크로노스’의 말을 똑똑히 들었을 텐데도 사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잔뜩 헝클어진 장발의 머리를 벅벅 긁으며 코를 킁킁거릴 뿐이었다.
‘죽음의 경계’를 유유자적 걸으며 코를 벌렁거리던 사내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얼굴을 가리던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쓸어올리며 말했다.
「와인 한 잔 없는 곳에서 억겁의 세월을 보내야 한다니. 그짝도 참 지루하겠어.」
「아니지. 우리 아버지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이 정도에서 끝난 걸 다행이라고 봐야 하나?」
「뭐가 됐든 불쌍하긴 하네. 그래도 한동안 포도 향이라도 맡을 수 있게 해뒀으니 고맙게 생각하라고.」
머리를 쓸어올리자 드러난 미형의 얼굴. 가히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외모의 소유자는 장난기 가득 섞인 표정으로 ‘크로노스’를 약 올리는 데 열중했다.
「그런데 이런 재미없는 곳에 불러놓고, 뭐 손님 대접도 안 해주는 건가?」
「‘허영의 사내’, 그 재수 없는 자식이 이번에야말로 쓰러질지 아닐지 지켜보고 있던 참이었다고.」
사내가 불평하자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가죽 의자 하나가 생겨났다. 그를 본 사내는 미소 지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다리를 꼬았다.
「한결 났네.」
「그나저나 안타깝네. 아슬아슬할 때 도착했단 건, 방금까지 그짝이 선택한 청년이랑 있었다는 거잖아.」
「그랬었지.」
「하…, 얼굴 정돈 봐두고 싶었는데 말이지.」
얼굴을 봐두고 싶었다고? 평소 내게 관심을 가졌던 초월자 중 한 명인 건가.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부른 거야?」
「‘자네’가 기다리던 때가 됐어.」
「그 말은….」
「우리의 친구가 드디어 마지막 단계에 진입했단 뜻이네.」
‘크로노스’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자, 사내는 멋들어지게 웃으며 생뚱맞은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문’을 열 열쇠의 재료는 뭐지?」
「이 몸을 봉인한 세 형제의 신기를 합쳐야 하지.」
「열쇠를 만들 수 있는 자는?」
「절름발이라면 가능하다.」
「지금 나눈 대화를 우리의 오랜 친구에게 전할 방법은?」
「‘도서관’에 발을 들이게 할 거다.」
「그곳의 사서라면 이 몸의 의도대로 움직여줄 거야.」
「오래도록 홀로 있던 터라, 그녀는 지루함을 참지 못하지. 재미있는 일이 펼쳐질 기회를 놓칠 리 없다네.」
「흠, 분명 지금까지의 ‘분기’에선 도서관에 다다르지 못했지.」
「그 MC 놈이라도 내쫓아봐야 하나?」
「일단 의도는 이해했어. 그쪽은 내가 알아서 해결해 볼게.」
「방금 몇 가지 방법이 떠올랐거든. 한 네 가지 정도?」
「생각대로만 되면, ‘허영의 사내’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 몰골 볼 생각에 벌써 설레는군.」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와인을 홀짝이며 사내는 장난기 섞인 웃음을 흘렸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 자네가 해주어야 할 일이 더 있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 저렇게 멀쩡해 보이는 남자가…, 그동안 날 괴롭혔던 미친놈이었다고?”
새로이 등장한 남성이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였다는 사실에 놀랄 틈은 없었다. ‘크로노스’와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는 멈추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귀찮은 건 질색인데. 일단 말해봐. 내가 뭘 해야 하지?」
「다음 분기가 시작되면 ‘빛나는 눈의 전략가’를 찾아가게.」
「왜? 걘 매사에 딱딱해서 말 섞기도 싫단 말이야.」
「‘빛나는 눈의 전략가’라고 해서 딱히 그대를 좋아할 것 같진 않지만…, 그런 걸 가릴 처진 아니지 않나.」
「‘빛나는 눈의 전략가’는 우리를 도와주는 몇 안 되는 초월자 중 한 명이네. 서로 도울 이유는 충분하다고 보네.」
「물론 ‘빛나는 눈의 전략가’는 순순히 그 청년의 행보에 반해서 우리를 돕는 것 같긴 했다만.」
「호오? 걔가 누구한테 반한 건 오랜만인 것 같은데. 세상이 망하기라도 하려나?」
「아니, 이미 망해버렸지? 하하, 그래서 찾아가서 뭘 하면 돼?」
「이 몸이 그녀와 거래하고 싶어 했다고 전해주게나.」
「거래? 뭘 요구하려고?」
「몇몇 초월자들을 시련에 초대하고 싶네. 그를 위해선 해킹에 능통한 친구가 필요하지.」
「겁이 많은 친구지만, ‘빛나는 눈의 전략가’의 부탁이라면 움직여줄 거야.」
「그 초월자들까지 끌어들이려고? 이번엔 정말 제대로 해볼 생각인가 보네.」
「좋아. 걔가 그 요구를 받아준다고 쳐. 그럼 그짝은 뭘 해주려고?」
「‘빛나는 눈의 전략가’가 이 몸에게 바라는 건 항상 같았지.」
「그를 받아들이겠다고 전해주면 될 거네.」
「너….」
「하, 내 문제는 아니니 알아서 해. 거래 건은 전해줄게. 들어주고 말고는 걔가 결정할 문제지만….」
「그짝이 그를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한 이상, 반드시 들어주겠네.」
내가 들을 수 있었던 대화 내용은 거기까지였다. 거래에 관한 대화를 끝으로 눈앞의 풍경은 뒤바뀌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와 ‘크로노스’는 사라지고, 읽을 수 없는 글귀가 적힌 노트만이 손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럼, 네 감상평은?」
고개를 드니 ‘방구석 만화광’의 모습이 보였다.
「다 보고 감상평 들려주기로 약속했잖아.」
「설마 나랑 한 약속을 어기려는 건 아니지?」
‘방구석 만화광’은 귀엽게 주먹을 휘둘렀다. 저래 보여도, 저 주먹을 맞으면 즉사할 게 분명했다. 소녀의 협박 아닌 협박에 정신이 돌아왔고, 지워졌던 과거의 기억은 거래에 관한 대화로 끝났다는 걸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