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60화 (161/168)

[24. 진실 (11)]

되찾은 기억이 다 정리되기도 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답을 기다리는 소녀를 보니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크로노스’가 왜 절 여기로 보냈는지 알고 계셨던 거죠?”

「흐응? 어떨 거 같아?」

저 소녀의 말마따나 인과율이 이 공간에 개입할 수 없다는 게 사실이라면. 인과율의 눈을 피해 지워진 기억을 전할 방법은 이곳, ‘방구석 만화광’의 도서관에 기록된 책을 읽게 하는 것뿐이다.

‘캠비온 녹스’를 만날 때, 필시 김화영이랑 함께하라며 조언했던. 날 이곳에 보낸 장본인인 ‘크로노스’가 그걸 몰랐을 리는 없다.

처음부터 ‘크로노스’는 날 이곳에 보내 기억을 되찾게 할 생각이었던 거다. 아마 날 멸망 직전의 시점으로 보냈을 때부터 그럴 생각이었겠지. 그래서 인과율이 기억을 지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날 과거로 보낸 거고.

“본인의 즐거움을 위하긴 무슨.”

다만, ‘크로노스’의 계획에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그건 바로 ‘방구석 만화광’이 ‘크로노스’의 뜻에 따라 움직여줘야 한다는 것.

눈앞의 소녀가 도서관의 출입을 금하거나, 지워진 과거의 기억을 열람 못 하게 했더라면. 시간을 되감은 건 아무 의미 없어졌을 것이다.

즉, ‘방구석 만화광’이 ‘허영의 사내’를 없앨 본인의 계획에 동참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만- 그만! 거기까지만 해!」

「말했을 텐데?」

「난 세상 모든 사건을 목격하는 존재지, 해결책을 내리는 존재는 아니야.」

「‘허영의 사내’나 ‘알 수 없는 자’ 같은 초월자들이 네 세상에서 뭘 하고 노는지. 그걸 있는 그대로 목격하고 기록하기 위해 내가 존재하는 거라고.」

「그로 인해 세상이 멸망하든, 초월자들의 노름판으로 전락하든 간에. 그 결과는 지금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이해했어?」

“상관없다면….”

「상관없다면서, 왜 이런 친절을 베푸냐고?」

「음- 내가 친절을 베푼 적이 있었던가?」

소녀는 왠지 모르게 눈물 섞인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난 ‘있었던 일’을 전달해줬을 뿐인걸?」

「앞으로 네가 ‘어떻게 해야 한다’라고 일러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애당초 내가 그런 걸 생각할 수 있을 리도 없고…」

김화영이 서글픈 표정을 지어서일까. 아니면 수연이가 무심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서일까.

「하- 필멸자의 위로를 받는 날이 올 줄이야.」

“죄, 죄송해요!”

어느새 소녀는 원래의 장난 섞인 표정으로 수연이를 보고 있었다.

「이 모습을 깐깐쟁이가 봤어야 했는데. 아쉽네, 아쉬워.」

내 손에 놓인 노트를 낚아채 간 소녀는 키득거리며 물었다.

「이 노트의 저자가 누구라 생각해?」

“초월자님께서 기록하셨으니까….”

「아니.」

「이건 너와 네 주변에 있던 필멸자들. 그들과 엮인 초월자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야.」

「그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있어 해피엔딩이 아니더라고 해도.」

「치열하게 쌓아 올려진 결말인 건, 이 도서관에 있는 모든 노트와 다를 바 없어.」

「난 그저…」

「그런 이야기가 모두의 기억에서 잊힌 채, 이 도서관에서 썩어가는 게 싫었을 뿐이야.」

「뭐, 물론 이걸로 사건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가 궁금하기도 하고.」

「사소한 걸로 세상이 바뀌는 걸 보는 건 언제나 즐거우니까.」

“…썩어가는 게 싫다, 고요.”

소녀의 말대로다.

“그렇네요.”

수많은 죽음을 쌓아 올린 끝에 완성된 이야기다.

“거기에 적힌 이야기, 이 도서관에서 썩히기엔 좀 아깝죠.”

망할 시련 속에서 조금이나마 더 오래 생존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더 많은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서 그 많은 죽음을 겪어 왔다. 그때마다 겪은 고통? 이루 다 말할 수조차 없다. 당연히 어떤 죽음이 제일 고통스러웠는지 우열을 가릴 수도 없고.

그런 모든 고통이 의미 없어진 채, 이 도서관에서 썩어간다니.

“아니, 썩혀선 안 되죠.”

그래서야 안 된다.

“내가 왜 그런 개고생을 해 왔는데….”

그 죽음들은 어떻게 해서든 의미가 있어야 한다. 설령 의미 없다고 해도, 내가 의미 있게 만들고야 말 테다.

「오오- 당차네, 당차.」

“걱정하진 마세요.”

「응? 걱정? 갑자기?」

“제 기억 보여드린 값은 제대로 치를 생각이거든요.”

「그럼 기대해도 되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끝까지 지켜보세요. 분명 재미있을 거니까요.”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걸 ‘방구석 만화광’을 통해 듣는 건 애당초 바라지도 않았다.

저 소녀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해피엔딩으로 끝날 거라고 말해줬더라도, 내가 순순히 그를 따랐을 것 같지도 않다. 분명 내가 모르는 내막이 있으리라 의심하며 나름의 방식대로 앞으로의 방침을 정했겠지.

세상이 멸망한 이후, 고유능력으로 ‘식탐’을 부여받았을 때부터였다. 그때부터 내 방침은 변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죽음만으로 죽음을 회피하는 것.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난 지금껏 죽음에 정면으로 부닥치는 저 방식으로 이 망할 세계를 헤쳐왔다. 몸이 찢기고 베이고 갈리는 등. 저 방식을 따랐을 때, 그 끔찍한 고통을 겪는 건 결국 나다.

적어도 내 판단하에 그런 고통을 겪어야 그나마 덜 억울하기라도 하지. 다른 이의 판단에 맡겼다가 그런 고통을 겪었다? 벌써 치가 떨린다.

그러니, 소녀는 내게 정보를 준 것만으로 끝내면 된다. 굳이 해결책을 제시해줄 것까지야 없다. 이후부턴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그래도 덕분에 앞으로 제가 해야 할 건 알았어요.”

「해야 할 것?」

잊힌 기억 속, 난 ‘크로노스’에게 제안했다.

“내가 제물이 될 테니까 그쪽이 나한테 강림해. 초월자 상대는 초월자가 해야지. 안 그래?”

내 몸에 강림하라는 제안을 들은 ‘크로노스’는 봉인을 이유로 대며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그 대신 대안을 제시했다.

「자네가 ‘멸망 이전의 과거’로 가서 ‘허영의 사내’가 강림하기 전에 네 개의 신기를 모아 이곳의 봉인을 해제하는 거지.」

신기 네 개를 모아 ‘죽음의 경계’에 봉인 당한 ‘크로노스’를 풀어주는 것. 내가 과거로 보내진 이유는 그를 위해서였다.

물론, 이미 늦긴 했다. ‘허영의 사내’는 강림해버렸고, 아직 네 개의 신기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다.

전과의 차이점이라면….

“…‘허영의 사내’랑 제대로 맞붙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을 알았다는 건가.”

네 개의 신기를 찾아 봉인을 해제한 뒤, ‘크로노스’를 내 몸에 강림시킬 것.

“그리고….”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가 ‘빛나는 눈의 전략가’와 나눈 거래로 인해 시간선에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를 알아내는 것.

이 두 가지가 제일 급선무 되어야 할 일이다.

당연히 이 외에도 해결해야 할 건 많다.

‘열쇠를 만들 수 있는 자는 절름발이’라는 말의 뜻도 알아내야 하고.

‘허영의 사내’가 텔레포트 시키기 전, 이화의 계약도 해제해야 하지만.

할 일이 정해진 것만으로도 얻은 소득은 크다고 할 수 있다.

「한동안 바쁘겠네.」

“세상이 이 지랄 나고 나서, 바쁜 데엔 이골이 나서요.”

「흠. 결론은 이거지?」

「원하는 건 얻어갔다.」

「감상평으로선 나름 괜찮네.」

“혹시… 필요한 신기 네 개가 뭔지 안다거나….”

「네 질문에 대한 답은 충분했을 텐데?」

“예. 당연히 안 알려주시겠죠.”

「그럼 이제 남은 건, 우리 딸내미뿐인가?」

나와의 대화는 끝났음을 선언하듯, 소녀는 몸을 아예 김화영 쪽으로 틀었다.

“현아, 난 뭘 물어봐야….”

「쓰읍- 그건 안 되지.」

「그래서야 정현이 궁금한 것만 세 가지씩이나 해결해주는 꼴이잖아?」

「명색이 초월잔데, 필멸자 입맛대로 따라줄 순 없지.」

「임수연 때는 그냥 넘어가 줬지만, 지금은 딸내미가 궁금한 걸 물어볼 때야.」

말은 저렇게 했지만, 소녀에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 질문에 답하기 싫다기보단… 정말로 순수하게 김화영이 무엇을 궁금해할지 알고 싶다는 눈치….

“그러면….”

소녀에게 말이 막힌 뒤로 머뭇거리며 날 바라보던 김화영은 천천히 입을 뗐다.

“그… 별거 아니긴 한데….”

「아니긴 한데?」

“난, 나는 인간이 맞는 거야…?”

김화영의 질문에 당황한 건, 오히려 우리 쪽이었다. 물론 그 뒤에 이어진 답이 더 충격적이었지만.

「당연히 아니지.」

소녀의 단언에 김화영은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다.

「딸내미는 내 도서관에 보관되어야 할 기록을 수집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카샤’. 인간 형태로 만들긴 했어도 인간은 아니지.」

「쉽게 말하자면, 최신형 AI가 탑재된 기록 장치라고 할까나?」

“그치만….”

「지금껏 수많은 우주에 딸내미들을 파견해왔어.」

「난 이곳에서 나갈 수 없으니까. 나 대신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목격해 줄 존재가 필요했거든.」

「딸내미도 그 존재 중 하나.」

「U+2641에 파견되어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맡은 ‘아카샤’지.」

「물론…」

“아니야!”

무심코 뱉은 말이었는지, 소녀의 말을 끊은 김화영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놀란 듯 보였다. 그렇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수연이가 말했어. 내가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수연이한텐 언제나 화영 언니일 거라고.”

「…」

“그러니까 난 ‘아카샤’가 아니야. 난 ‘김화영’이야.”

「물론! 이미 자신이 누구냐는 질문을 한 이상, 내 답변이 중요할 것 같진 않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굳이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

「딸내미, 지금까지처럼 딸내미 마음대로 지내.」

「자신의 이름을 소중히 여긴 ‘아카샤’는 딸내미밖에 없었으니깐.」

자신 앞에 당당히 선 김화영을 바라보며 소녀는 미소 지었다.

「자, 질문에 대한 답변은 모두 끝났네.」

「이제 도서관 폐관 시간이야.」

「다시 올 일은 없을 테니까, 책은 모두 반납하고.」

「음- 도서관 정숙이 항상 좋은 것 같지만은 않네.」

「그럼 문 닫겠습니다!」

소녀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울리며, 도서관 풍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책장이 무너져 내린 곳마다 돌덩이가 들어섰고. 어느새 우린 동굴 한 가운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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