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61화 (162/168)

[25. 신기(1)]

‘방구석 만화광’의 도서관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꽤 오래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그야 그럴 게 시련이 시작된 이후, if 정현의 삶을 쭉 체험했으니까 아무리 초월자의 공간이라고 해도 잠깐 머물렀을 것 같진 않았다.

실제로 ‘방구석 만화광’의 도서관에서 빠져나오고, 곁에 있던 이화에게 들으니 우리가 기절한 지 하루가 지났다고 했다. 뭐, 하루 쓰고 그 정도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면 싸게 먹혔다고 생각해서 불만은 없었다.

다만, 초월자의 공간에서 빠져나오니 ‘CONTINUE?’와 관련된 이야기는 다시 할 수 없게 되어 답답하기는 했다. 김화영이나 수연이조차 그 이야기는 할 수 없는 듯했다.

잠깐 사이에 세 사람이 기절한 채 발견돼서 무척 놀랐다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이화에게 어떻게든 내가 전할 수 있는 내용들을 전했다.

시련이 벌어지게 된 이유. 우리가 처한 상황.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것 등등.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고 나서, 다음으로 신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신기라는 게 정확히….”

상점에서 포인트로 구매할 수 없는. 그러니까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입수도 불가능할뿐더러, 진명을 알아내기 전에는 제대로 활용할 수조차 없는 등급의 장비. 그게 바로 신기다.

설명을 들은 이화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오빠 말은 그거잖아. 오빠를 후원하는 초월자님께서 강림하시려면, 그런 신기를 네 개나 모아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살아남을 방법이다. 맞지?”

“그렇지.”

“하나 찾기도 어려운 신기를 네 개나 모아야 하는데, 거기에다 타임 어택까지 걸린 거고. 세상이 ‘허영의 사내’한테 완전히 쓸려버리기 전엔 전부 찾아야 할 테니깐.”

“그렇지.”

“그런데 어떤 신기를 모아야 하는지는 모르는 상황이고.”

“…그렇지?”

“반응을 보아하니, 뭔가 짚이는 건 있나 보네.”

이화 말대로다. 정확히 무슨 무슨 신기를 모아야 하는지는 몰라도 짐작 가는 게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크로노스가 어떻게 쓰러졌는지 기억해?”

“갑자기 신화 이야기? 음… 분명 그 자식들한테 당해서… 패배하고 타르타로스란 지옥에 갇혔었지?”

“더 자세하게 들려줄 수 있어?”

이후 이화가 들려준 신화 이야기는 이렇다. 크로노스는 제우스의 계략으로 본인이 삼켰던 자식들을 모두 토해내게 되고. 그렇게 제우스 휘하 신족과 크로노스 휘하 티탄 신족 간에 긴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전쟁은 팽팽히 이어져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다. 그때, 가이아가 제우스에게 전쟁에서 승리할 방법을 일러준다. 그 방법이란 헤카톤케이레스와 키클롭스를 구해내 같은 편으로 삼으라는 것.

가이아의 비책을 들은 제우스는 키클롭스를 구출한다. 구출된 키클롭스는 무기를 만들게 되는데.

제우스에겐 ‘아스트라페’와 ‘케라우노스’란 이름의 번개를.

포세이돈에겐 ‘트리아이나’란 이름의 삼지창을.

하데스에겐 ‘퀴네에’란 이름의 투구를 만들어주었다.

삼형제는 그 무기를 통해 팽팽했던 균열을 깼고, 결국 전쟁에서 승리해 크로노스를 타르타로스에 가두게 된다.

“…도움이 됐으려나?”

대충 짐작한 게 맞았던 것 같다.

신화대로라면, ‘크로노스’가 ‘죽음의 경계’에 갇혀 있는 건 제우스를 필두로 한 삼 형제 때문이다. 당연히 그 봉인을 풀기 위한 열쇠의 재료는 삼 형제에게 있을 거고. 마침 삼 형제가 지닌 무기는 총 네 개.

‘아스트라페’, ‘케라우노스’, ‘트리아이나’, 그리고 ‘퀴네에’.

“내가 모아야 할 신기는 그렇게 네 개겠네.”

지금까지 내가 모은 신기도 총 네 개다.

우선, ‘퀴네에’. 이 황금빛 투구는 ‘화탕지옥’이 펼쳐졌을 당시 김동건으로부터 빼앗은 후로 지금껏 시련에서 유용하게 사용해 왔다. 신기의 능력은 착용자의 모습과 기척을 지우는 것.

다음으론 허상헌이 지니고 있던 조그만 건전지. ‘독사지옥’이 펼쳐졌을 당시, 백민기는 김화영에게 이 건전지와 함께 두 단어를 전했었다. ‘번개’, 그리고 ‘그리스·로마 신화’. 그땐 몰랐는데, 이제야 그 단어를 전해준 의미를 알 것 같다.

“‘아스트라페’.”

[‘호색한 찬탈자’님이 당황합니다.]

당시 받은 건전지를 꺼내 진명을 읊자, 순간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글씨가 새겨졌다.

[‘호색한 찬탈자의 건전지’]

- 사용 가능 직업 : 전 직업

- 장비 등급 : 신기

- 내구도 0 공격력 0 방어력 0

- 1.5v

[‘호색한 찬탈자’님이 ‘아스트라페’ 이용 자격 부여를 거부합니다.]

[‘번개의 아내’님이 ‘호색한 찬탈자’님을 비웃습니다.]

[‘번개의 아내’님이 ‘호색한 찬탈자’님 대신 플레이어 ‘정현’에게 ‘아스트라페’의 이용 자격을 부여합니다.]

[‘호색한 찬탈자의 건전지’가 진정한 힘을 드러냅니다.]

[‘아스트라페’]

- 사용 가능 직업 : 전 직업

- 장비 등급 : 신기

- 내구도 ∞ 공격력 ∞ 방어력 0

- 강력한 번개 한 줄기를 떨어뜨립니다.

- 현재 이용 자격은 플레이어 ‘정현’에게 있습니다.

어느새 건전지는 사라졌고, 대신 내 손엔 얇은 번개 모양의 나뭇조각이 들려 있었다.

“오빠, 그건….”

이어서 또 다른 건전지를 꺼내 들었다. ‘빛나는 눈의 전략가’에게 받은 ‘후원 미션’을 클리어하는 것으로 함께 클리어 된 ‘번개의 아내’의 ‘후원 미션’. 그 보상으로 받은 신기였다. 당연히 이 신기의 이름은….

“….‘케라우노스’.”

정답이라는 듯, 빛과 함께 글씨가 새겨졌다.

[‘번개의 아내의 건전지’]

- 사용 가능 직업 : 전 직업

- 장비 등급 : 신기

- 내구도 0 공격력 0 방어력 0

- 1.5v

[‘호색한 찬탈자’님이 ‘번개의 아내’님에게 따집니다.]

[‘번개의 아내’님이 ‘호색한 찬탈자’님을 가볍게 무시합니다.]

[‘번개의 아내’님이 플레이어 ‘정현’에게 ‘케라우노스’의 이용 자격을 부여합니다.]

[‘번개의 아내의 건전지’가 진정한 힘을 드러냅니다.]

[‘케라우노스’]

- 사용 가능 직업 : 전 직업

- 장비 등급 : 신기

- 내구도 ∞ 공격력 ∞ 방어력 0

- 강력한 번개 한 줄기를 떨어뜨립니다.

- 현재 이용 자격은 플레이어 ‘정현’에게 있습니다.

내 손에 들린 두 개의 나무 조각을 보고, 이화는 두 눈이 동그라졌다.

“그건 또 뭐고?”

“마지막으로 나한테 남은 건 방패인데… 그건, 봉인을 해제할 열쇠는 아닌 것 같고….”

제우스의 번개, 하데스의 투구가 손에 주어졌으니. 이제 더 모아야 할 건, 포세이돈의 삼지창.

“오빠, 혼자 진도 나가지 말고 나한테도 설명해줄래?”

“아!…알겠어.”

‘크로노스’의 봉인을 풀 열쇠는 제우스, 포세이돈, 하데스의 신기이며. 그중 세 개가 내 수중에 있으니, 이제 포세이돈의 삼지창만 찾으면 된다고 전해주자 이화는 뭔가 떠오를 것 같다는 듯 말했다.

“그 삼지창,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다리에서 싸웠을 때, 거품 둥둥 띄우고 다녔던 할머니 기억나?”

이화의 말을 들으니 확실히 떠올랐다. 교주의 명령에 따르던 노파. 그 노파는 분명 삼지창을 지니고 있었다.

“다음에 할 일은 그 노파한테서 삼지창을 빼앗는 거겠네. 그래야 초월자님을 강림시키든 할 테니깐.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리 전해둘게. 오빤,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좀 더 쉬고 있어.”

이야기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는 이화를 붙잡았다.

“아직 남은 게 있어.”

이화를 붙잡고는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를 불렀다. 대답은 없었지만, 아마 날 주시하고 있을 테니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을 했다.

“네 번째 시련에서 베팅 결과로 받은 ‘플레이어 지명권’ 아직 유효한 거지?”

앞으로 남은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선 전력 보강은 필수적이다. 문제는 우리 일행의 핵심 전력이라고 볼 수 있는 이화를 전속 후원해준 초월자가 ‘허영의 사내’라는 것.

초월자는 본인이 전속 후원한 헌터를 언제든 원하는 곳으로 텔레포트 시킬 수 있다. 지금이라도 이화는 ‘허영의 사내’ 코앞으로 텔레포트 당할 위험에 처해있는 것이다.

그를 해결하기 위해선.

“그 ‘플레이어 지명권’으로 이화랑 전속 계약해줘. 그 대가로 그쪽이 제안한 건 뭐든…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 테니….”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와의 거래를 성사해야만 한다.

잔뜩 긴장한 채 답을 기다리는데, 글자가 새겨졌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플레이어 ‘정현’을 대상으로 ‘후원 미션’을 등록합니다.]

[후원 미션]

- 대상 플레이어 : 정현

- 클리어 조건 : 특정 시점,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의 명령 하나에 복종할 것.

- 성공 보상 : 없음

- 실패 패널티 : 없음

- 본 후원 미션을 수락하지 않을 경우,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지닌 ‘플레이어 지명권’은 소멸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N]

이래서야 받아들일 수밖에 없나.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등록한 ‘후원 미션’을 수락합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플레이어 지명권으로 플레이어 ‘정이화’를 지목합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플레이어 지명권을 갈기갈기 찢습니다.]

[플레이어 ‘정이화’의 전속 계약이 ‘허영의 사내’님에게서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에게로 옮겨갑니다.]

[플레이어 ‘정이화’는 지금부터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 님 외의 초월자에게 후원 및 후원 미션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현재 진행 중인 ‘후원 미션’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이거 오빠가 한 거야?”

고개를 끄덕이자, 이화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실은 전속 계약 때문에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해결될 줄은 몰랐네.”

필요한 신기 세 개를 얻은 것과,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 수중에 ‘플레이어 지명권’이 있던 것. 단순히 운이 좋아서 상황이 잘 풀린 건지, 아니면 여기까지 전부 ‘크로노스’의 계획에 있던 건진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부터 반격이 시작되었다는 느낌은 분명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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