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신기(2)]
이화가 일행을 부르러 나서고, 제일 먼저 찾아온 사람은 노인이었다. 기절해있던 우리가 멀쩡하다는 걸 확인한 노인은 다른 사람들이 마저 도착할 동안, 새로이 알아낸 사실을 들려주었다.
“아직 이 마을의 위치는 발각되지 않은 듯하네. 이걸 다행이라고 여겨도 될지는 모르겠다만… 이 마을에서 지내는 한 ‘우리’는 안전할 걸세.”
노인의 주름이 한층 깊어 보였다. 노인의 수심 깊은 얼굴은 분명 ‘허영의 사내’가 했던 경고에서 비롯된 거겠지.
동작대교에서의 전투가 ‘허영의 사내’ 측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뒤, 그는 괴수 사냥꾼 무리에게 말했다.
동작대교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나와 내 동생을 붙잡아서 본인 앞으로 데려오라.
그건 부탁 같은 게 아니었다. 당분간 목숨을 살려둘 테니, 죽고 싶지 않다면 서둘러 우릴 잡아 오라는 협박이라면 모를까.
저들의 희생으로 우리의 안전이 보장된 느낌이라 노인은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문득 우리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나서준 지은정을 비롯한 헌터들과 여우 수인이 걱정되어 물었다.
“그러면 마을 바깥 상황은 어때요? 그러니까 저희가 지냈던 곳은….”
“많이 안 좋다네.”
노인은 단 세 마디로 바깥의 상황을 일축했다. 자세한 상황 설명을 원하는 듯한 눈치를 보이자 노인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마을은 이미 점령당한 듯하네. 곳곳엔 시체가 널려 있었고, 우리와 친분이 조금이라도 있던 헌터와 괴수 사냥꾼은 모두 마을 중앙으로 끌려가고 있었지.”
“맞아요. 오전에 이면을 통해서 확인한 바로는 그랬어요.”
노인의 말을 긍정하며 김아람이 들어왔다. 그 뒤로 한성수와 박다현의 모습도 보였다. 마지막으로 문을 닫으며 들어오는 이화. 양옆에는 수연이와 김화영이 있었다.
“안타깝지만, 그분들이 저희한테 힘이 되어줄 순 없을 것 같아요. 저희가 마을을 탈환한다면 모를까….”
김아람의 말대로 마을에 남겨진 자들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면, 여기 모인 사람들끼리 마지막 신기를 빼앗아 와야 한다는 건데.
“오빠한테 필요한 신기를 빼앗아 오려면, 필연적으로 ‘허영의 사내’ 측 헌터들하고 맞붙을 수밖에 없을 거야.”
“캠비온 분들이 힘을 더해 줄 것 같지도 않으니, 결국 저희끼리 그를 해내야 한다는 거죠.”
고작 여덟 명이 ‘허영의 사내’ 측과 맞선다.
예전에도 비슷한 짓을 저지른 적이 있긴 하다. 강이란 세력에 맞설 때였는데, 그때와 지금 상황은 다르다. 초월자가 낀 이상, 예전 강이란 세력과는 차원이 다른 적이라고 봐야 한다. 솔직히 말해서 정면으로 맞붙는 건 아예 불가능할 정도의 전력 차다.
더군다나 전투에서 제힘을 발해주어야 할 이화도 한쪽 팔을 못 쓰는 상황이다. 수연이와 박다현은 전투에 있어선 뒤에서 지원하는 역할밖에 못 하기도 하고. 이 상태로 ‘허영의 사내’ 측과 맞붙는다는 건 그야말로 개죽음이나 마찬가지다.
“정면충돌은 최대한 피하면서 어떻게든 신기만 빼내 올 수 있도록 해보자. 그러고 어떻게 할지는 초월자님을 강림시킨 뒤에 생각하고.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인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정현 헌터님 말대로 하는 게 최선일 것 같네요. 문제는 전력만 부족한 게 아니라, 정보도 부족하다는 거겠네요.”
“하긴, 오빠한테 필요한 신기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거니까.”
포세이돈의 삼지창이 눈앞에 ‘툭’하고 떨어지면 좋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테고. 일단은 캠비온 마을 밖으로 나가서 정보를 수집하는 걸 우선시해야 할 것 같다.
“그러면 이렇게 하죠. 캠비온 분들한테 부탁해서 저희가 쓸 수 있는 식자재부터 최대한 끌어모으는 거예요.”
“…네?”
날 보며 어리둥절하는 김아람 등을 떠밀면서 다른 일행을 재촉했다.
“큰일 하기 전에 배부터 채워야죠. 시간이 많진 않으니, 서둘러 주세요. 전 여기 남아서 요리할 준비 하고 있을게요.”
일행을 밖으로 내보내고, ‘빛나는 눈의 전략가’로부터 받은 방패를 꺼내 들었다. 지워진 기억을 보고 온 지금이라면 이 방패의 진명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조용히 떠오르는 이름을 읊었다.
“’이지스의 방패’…?”
[‘빛나는 눈의 전략가’님이 미소 짓습니다.]
방패에서 따스한 기운이 감돌더니, 그 위에 글씨가 새겨졌다.
[‘빛나는 눈의 전략가’님이 플레이어 ‘정현’에게 ‘이지스의 방패’의 이용 자격을 부여합니다.]
[‘빛나는 눈의 전략가의 방패’가 진정한 힘을 드러냅니다.]
[‘이지스의 방패’]
- 사용 가능 직업 : 전 직업
- 장비 등급 : 신기
- 내구도 ∞ 공격력 0 방어력 ∞
- 예측 가능한 범위 내의 공격을 모두 방어합니다.
- 고르곤의 머리를 바라본 상대에게 상태이상 ‘공포’를 부여합니다.
따스한 기운이 사라졌을 땐, 방패 앞에 어디서 많이 본 얼굴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뱀으로 이루어진 머리카락을 지닌 흉측한 여성의 조각. 흔히 말하는 메두사의 얼굴인 듯싶다.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이어서 글씨가 새겨졌다.
[‘빛나는 눈의 전략가’님이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고 당신에게 지혜를 전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주변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무너져 내리더니, 거대한 돌기둥이 세워졌고. 지워졌던 기억에서 보았던 ‘파르테논 신전’이 눈앞에 나타났다.
지워졌던 기억 속 난 죽음을 거듭하며 ‘허영의 사내’와의 싸움을 이어간 끝에 이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방패의 진명을 읊은 것만으로 ‘빛나는 눈의 전략가’가 만들어낸 정신세계에 초대받을 수 있었는지 전혀 모르겠다.
「들어오세요.」
영문 모를 상황에 주춤하고 있자, 신전 안쪽에서 따스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를 들으니 홀린 듯 신전 안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신전 안에 들어서자 수많은 올빼미가 반겨주었다.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르는 올빼미를 뚫고 신전 중심부에 다다르니 익숙한 풍채의 여전사가 미소 지은 채 서 있었다.
“음… 안녕하세요?”
「그대가 당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니. 흔치 않은 일이네요.」
사용할 수 있는 신기를 하나라도 늘려 전력을 보강하고자 했을 뿐인데, 초월자를 만난 셈이니 당황할 수밖에 없지 않나.
「그렇겠네요. 그대는 당신을 사이에 두고 ‘이름 없는 자’와 제가 나눈 계약을 모를 테니.」
계약?
「인정하기 싫지만, 이러면 인정할 수밖에 없겠네요.」
「전속 계약 맺지 않은 헌터에게 후원 미션을 부여하다니.」
「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할 계획이라는 건 믿어줘야겠군요.」
여전사를 바라만 보고 있자, 그녀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대가 ‘허영의 사내’와의 마지막 싸움을 준비하고 있던 건 알고 있어요. 그런 그대를 이렇게 방해하게 된 건, 제가 ‘이름 없는 자’와 나눈 계약 때문이랍니다.」
“어떤 계약을 말씀하시는 거죠?”
「’이지스의 방패’. 그대가 그 진명을 읊었을 때, 정신세계에 초대하는 것.」
「그런 내용의 계약을 맺었거든요.」
「그땐, 몰랐는데 인제는 ‘이름 없는 자’의 진의가 뭔지 알 것 같네요.」
「그대의 싸움이 아무 의미 없이 스러지는 건 원치 않으니, ‘이름 없는 자’의 뜻에 어울려 드리도록 하죠.」
「그대의 전투에 힘을 더할게요.」
여전사는 더 자세한 내용을 이야기할 생각은 없는 듯, 모호한 말을 마치곤 기품 있게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대들에게 주어진 시련 자체가 증오의 연쇄를 야기하고 이기주의, 혐오 같은 부정적인 감정만을 증폭시키도록 유도하는 건 알고 있었어요.」
「시련이 뭔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건 눈치챘지만, 저 나름대로 품고 있던 기대가 있었기에 따로 행동에 나서진 않고 그대들을 지켜보고 있었답니다.」
「저런 시련 속에서도 인간의 정의롭고 선한 마음은 빛을 발할 거라고 믿었거든요.」
「하지만 시련이 진행될수록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회의감만 커졌어요.」
「그대들의 본질은 사실 악이 아닐까 하고요.」
「그러다 그대를 목격했어요.」
「그대는 부조리한 시련 속에서도 정의로운 과정을 추구하며 주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왔죠.」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며 포장해 왔지만, 주변 사람들을 누구보다 위해온 그대의 마음은 주변에 변화도 일으켰어요.」
「다른 이들을 믿지 않고 마음을 닫은 채, 자신의 생존만을 추구하기로 한 이나은 헌터의 마음을 변화시키기도 했고.」
「힘이 지배하는 세상 속, 인연으로 뭉친 사람들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죠.」
「그를 보고 다시 한번 인간이란 존재를 믿기로 했어요.」
「그리고 제 믿음의 결과를 지켜보고 싶어 그대와 전속 계약을 맺게 된 거였답니다.」
과거의 기억에서 들었던 말을 다시 들어야 하나 싶었는데. 초월자는 일전과 다른 내용으로 말을 마쳤다.
「첫 만남이다 보니 서론이 길어졌네요.」
「그대를 돕기로 마음먹었으니, 지금부턴 제 지혜를 전달해 드릴게요.」
「올바른 정의관과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앞세워 ‘허영의 사내’와 맞서려고 마음먹은 점은 높게 사요.」
「하지만 전투에선 언제나 냉정해야 하죠.」
「감히 단언컨대 지금 그대가 지닌 것만으론 초월력을 행사하는 초월자에게 맞설 수 없어요.」
“전 그와 맞서려는 게 아니라, 그를 따르는 노파에게서….”
「제 아버지는 어떻게든 신기를 지키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그 과정에서 그대는 다시 한번 초월자와 맞서게 되겠죠.」
「그대가 원하지 않아도 말이죠. 그대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지 않나요?」
초월자의 말대로다. 제우스, 하데스의 신기가 내게 넘어온 상황. 내가 다음으로 포세이돈의 신기를 노리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을 테다. ‘크로노스’의 봉인이 풀리는 걸 막기 위해, 나와 적대하리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그들의 부조리함에 맞설 지혜를 짜내는 데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