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신기(3)]
올 게 왔다.
자신이 하는 말, 잘 들으라는 멘트를 듣자마자 저런 생각부터 들었다.
「제 옆의 초월자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초월자 중 ‘물길을 인도하는 자’란 초월자가 있답니다.」
「저희 셋은 초월자들이 직접 강림해서 여러분의 시련을 방해하는 행위만은 막아야 한다고 뜻을 모았어요.」
「그래서 저희는 그대를 도와 강림한 ‘허영의 사내’가 꾸미는 짓을 막을 생각이에요.」
과거의 기억에서 들어 본 말 그대로다. 당연하게도 여전사가 말을 마치니, 옆의 날개 달린 여성이 내게 창을 건넸다. 그를 받아 들자 ‘빛나는 눈의 전략가’는 신기의 이용 자격을 부여해주었다.
「그대에게 건넨 신기의 이름은 ‘바사비 샤크티’.」
「‘물길을 인도하는 자’가 그대에게 전해달라고 제게 맡긴 신기예요.」
[‘??? ???? ?? ?’ 장비가 이름을 드러냅니다.]
[‘물길을 인도하는 자의 창’]
[‘물길을 인도하는 자’님이 플레이어 ‘정현’에게 ‘바사비 샤크티’의 이용 자격을 부여합니다.]
[‘물길을 인도하는 자의 창’이 진정한 힘을 드러냅니다.]
[‘바사비 샤크티’]
- 사용 가능 직업: 전 직업
- 장비 등급: 신기
- 내구도 1 공격력 ∞ 방어력 0
- ‘바사비 샤크티’에 찔린 존재는 반드시 소멸합니다. 그 후, ‘바사비 샤크티’는 파괴됩니다.
- 현재 이용 자격은 플레이어 ‘정현’에게 있습니다.
창에 찔린 존재는 반드시 소멸한다.
한 번의 공격을 성공시킨 후, 즉시 신기가 파괴된다는 제약이 있긴 하지만. 지금 봐도 말도 안 되는 스펙임은 틀림없었다.
문제는 저 사기적인 스펙의 창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허영의 사내’를 쓰러뜨리지 못했다는 거다. 이길 수 있다는 직감이 든 순간, ‘시기’ 특성이 사라져 결과적으론 ‘허영의 사내’의 스탯이 원래대로 돌아온 탓이었다.
“역시 봉인을 푸는 게 우선인가.”
‘크로노스’를 강림시키지 않는 한, 저 창을 이용할 방법이 없다는 쪽으로 생각이 정리될 때. ‘빛나는 눈의 전략가’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과연 그럴까요?」
「그대가 소유한 세 가지 신기를 잘만 활용한다면 반드시 ‘허영의 사내’를 쓰러뜨릴 수 있을 거예요.」
「이 정도만 말해도 그대의 지혜라면 제가 준 정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알 수 있으리라 믿어요.」
「그럼 그대에게 승리가 있길 축복하며 이만 인사드릴게요.」
“잠시만요. 과연 그렇다니, 그게 무슨 의미….”
“의미냐니? 어떤 게 말입니까?”
어느새 여전사도, 날개 달린 여성도, 신전도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대신 내 앞엔 여러 식자재를 든 채 괜찮냐며 상태를 살피는 한성수가 있었다.
“괜찮은 거 맞으십니까? 굳이 저희를 위해 무리해서 요리하지 않아도 되니, 지금이라도 쉬시는 게….”
“아니야. 난 괜찮아. 평소 하던 것처럼 도와줄 수 있지?”
“네. 의외로 평범한 재료가 많아서 손질하는 것 정도는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네. 그럼 솜씨 좀 발휘해볼까?”
“정말 괜찮으신 거죠?”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한성수의 등을 툭툭 치며, 선언했다.
“아까 말했잖아. 큰일 하기 전에 배부터 채워야 한다고. 그러니 지금부터 이 방을 식당으로 사용하고자 하는데.”
[‘식당’을 개업합니다.]
[요리에 필요한 설비가 마련됩니다.]
* * *
한성수의 말대로 ‘캠비온’ 마을에는 의외로 평범한 식자재가 많았다. 쌀, 밀가루 같은 재료부터 시작해서 소금, 설탕 같은 조미료까지. 물론 평범한 식자재만 있는 건 아니었는데, 채소로 추정되는 초록색의 무언가나 왜인지 몰라도 썩은 표정을 짓고 있는 토마토, 어디서 나온 건지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 등. 도전욕을 자극하는 재료들도 꽤 있었다.
이화를 필두로 김아람과 몇몇 일행이 ‘캠비온 마을’ 밖 상황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동안, 난 한성수와 수연이의 도움을 받아 식사를 준비했다.
목표는 최대한 많은 종류의 요리를 하는 것.
샐러드, 스튜, 토스트, 찌개, 생선조림, 샌드위치, 스테이크, 튀김, 덮밥 등. 만들 수 있겠다 싶은 요리가 생각나면 한성수와 수연이에게 바로 재료 손질을 부탁했고. 그 둘이 재료를 준비해 주면 그 즉시 요리를 시작했다.
술집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불평만 늘어놓던 평화로운 시기. 과 행사라고 단체 손님이 끊임없이 쏟아지던 때, 쉬지 않고 요리만 하던 기억을 되살려 최대한 빠르게 한 요리를 끝내고 다음 요리로 넘어갔다.
악덕 주방장의 요구에도 한성수와 수연이는 별 불만 없이 재료 손질을 해줬고. 시간이 남으면 완성된 요리를 접시에 담아 주기도 했다. 그런 착한 두 사람 덕분에 뷔페 준비는 계획대로 차근차근 이루어졌다.
물론 복잡한 과정 없이 끝마친 요리도 있었던 반면, 재료 손질 단계부터 애먹은 요리도 있긴 했다. 칼을 가져다 대려고만 하면, 침을 뱉으며 욕설을 내뱉는 토마토가 그중 하나였는데. 토마토가 하도 고래고래 소리 지른 탓인지, 근처에 있던 캠비온이 와서 요리법을 알려주었다.
그가 알려준 요리법이란, 토마토가 뱉은 즙…, 을 이용해서 소스로 쓴다는 거였다. 그렇게 해당 토마토는 심의상 재료에서 탈락. 결국 우리를 찾아온 캠비온 손으로 넘겨주게 되었다.
“저딴 게 별미라니, 이해가 안 갑니다.”
“아직도 이 세계엔 우리가 모르는 게 많네.”
그 일로 충격받은 탓인지, 이후 수연이는 한동안 얼굴을 펴지 못했고. 처음 보는 식자재가 있으면, 우선 먹을 수 있는 건 맞는지 의심부터 하고 들었다.
툭툭 찔러보고, 흔드는 등. 철저한 위생 검사를 끝낸 수연이의 보고에 따르면, 다행히 토마토 뒤로는 위생적으로나 비위 쪽으로 이상한 식자재는 없었다고 한다.
이후엔 특이사항 없이 요리를 이어 나가, 우린 스테이크를 끝으로 본 요리를 모두 마쳤다. 그때쯤, 마을 밖의 상황을 살피던 나머지 일행도 돌아와 우린 본격적인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시작하기 전, 난 말했다.
“우선 오늘 만찬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준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 드리고요.”
한성수와 수연이 쪽으로 눈짓하니, 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식사를 즐기실 분들껜 하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보시다시피 요리 종류가 꽤 많은데, 조금씩. 정말 조금씩 입에 댔다 떼기만 해도 괜찮으니, 최대한 모든 음식을 맛봐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한 식전 인사라 여겼는지, 김화영이 갸웃거렸다. 그래서 본마음을 덧붙여주었다.
“요리 하나 먹을 때마다 여러분의 스탯이 오르니까요. 싸움 나가기 전에, 조금이나마 올릴 수 있는 스탯은 최대한 끌어모아서 올려둬야죠. 그리고….”
이 방식으로 올린 스탯은 설령 초월자가 반납하라고 해도 빼앗길 염려가 없다. 그 말은 따로 하지 않았다. ‘허영의 사내’와 전속 계약 맺은 헌터를 제외하고는 아직 초월자에게 스탯을 압수당한 헌터를 본 적은 없으니. 굳이 걱정거리를 하나 만들어 주기는 싫었다.
본심을 드러냈음에도 일행은 감사를 표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난 그동안에도 남은 식자재로 무얼 더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며 먹는 데에는 큰 집중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먹어 봤자, 스탯 하나 오르지 않으니 다른 일행 입속으로 들어가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생각하긴 했어도, 다 먹고 살자 하는 일이라며 노인이 먹을 걸 권하기도 했고. 이화나 수연이가 입에 뭔갈 계속 집어넣어 주기도 해서 나름 배를 든든하게 채우긴 했다.
식사 후, 푸딩과 아이스크림으로 입가심까지 하고 나서야 맘 편히 드러누웠다. 먹고 바로 누우면 소가 된다지만, 이런 세상에선 소가 되는 편이 나을지도….
“오빠, 치우는 건 우리가 할 테니까. 쉬면서 아람이한테 바깥 상황 듣고 있어.”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걸 눈치챘는지, 이화가 내 곁에 김아람을 붙였다. 김아람은 쉬는 걸 방해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도, 상황이 긴박하다고 판단했나 조심스럽게 상황 설명을 해줬다.
전에 들었던 내용에서 크게 바뀐 건 없었지만, 그래도 좋은 소식 하나는 있었다.
“그 할머니 말이에요. 마을에 머무르고 있더라고요.”
“확실해?”
“네. 따로 숨어 있지도 않았어요. 마을 한복판에서 붙잡은 분들을 괴롭히고 있었거든요.”
봉인을 풀기 위한 마지막 신기인 ‘트리아이나’를 내가 노릴 걸 뻔히 알면서도, 대놓고 마을에 있었다는 건.
“모습을 드러낸 게 함정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함정일 가능성이 크겠지.”
날 끌어내려고 판 함정임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함정을 돌파해서 창을 빼앗지 않는 한, 어차피 승기를 가져올 순 없으니.
“한 번 부딪혀 보는 게 낫겠네.”
“네, 저도 그게 낫다고 생각해요. 저희한테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런데?”
“초월자님을 정현 헌터님 몸에 강림시키는 건, 괜찮은 거예요?”
“‘허영의 사내’를 쓰러뜨리려면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다는 건가요….”
김아람이라면 초월자를 강림시키는 것 외에 ‘허영의 사내’를 상대할 방법이 없다는 건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거다. 그런데 왜 저런 질문을 한 건지 궁금해 넌지시 물었다.
“근데, 그건 왜?”
“그냥요. 뭔가 몸의 통제권을 영원히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 위험을 감수한다고 한 게, 정현 헌터님답다고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허영의 사내’를 쓰러뜨리고 나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김아람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그 초월자가 또 다른 ‘허영의 사내’처럼 될지 말이에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지점이었다. ‘크로노스’가 날 돕는 척, 자신이 봉인에서 빠져나와 강림하려는 거였다면.
“괜한 소리를 한 것 같네요. 죄송해요.”
“…아니야. 덕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알겠어.”
“그런가요? 아! 다른 분들 정리 끝난 것 같아요.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이야기하러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