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신기(4)]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뭐, 초월자님들께서도 동의해주신 바인데. 내가 괜찮고 말고 할 게 있나?”
“내 말 무슨 뜻인지 알면서 또 그런다.”
[‘번개의 여신’님이 플레이어 정이화를 향해 자애로운 미소를 보냅니다.]
이화가 뭘 걱정하는지는 당연히 알고 있다.
신기 탈환 작전에 앞서, 내 안전을 최대한 보강하고 싶어 하는 거다. 속으로는 내가 ‘캠비온 마을’에 남아있길 바라고 있을 테지.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순 없다.
이번 기회에 노파에게서 신기를 빼앗지 못하면, 앞으로 기회는 없다. 아마 영영 없을 거다.
‘허영의 사내’는 점차 초월력을 발휘하는 데 익숙해질 테고. 그럴수록 노파에게서 신기를 빼앗는 건 더 어려워질 거다. 최악의 상황까지 가면 개고생 끝에 신기를 빼앗아 가까스로 ‘크로노스’를 강림시켰는데, 초월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게 된 ‘허영의 사내’에게 패배하는 그림마저 나올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시련이 끝날 때까지… 아니지, ‘시련이 언젠가 끝나리란 것’도 희망적인 관측이다.
다시 정정. ‘초월자들이 우리를 갖고 노는데 질릴 때까지 쭉 이어질 시련 속’에서 ‘허영의 사내’로부터 도망 다니며 간신히 살아남거나. 그 전에 발각되어 노리개로 전락하거나. 둘 중 하나의 삶을 살아가게 되겠지.
선택권이 내게 주어진다고 해도, 어느 쪽 하나 선택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번 작전에서 봉인을 풀기 위한 마지막 퍼즐 조각을 반드시 손에 쥐어야만 하는 건 물론. ‘허영의 사내’가 초월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게 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신기를 빼앗아야만 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을 대처하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내가 그 전장 속에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 일행 중 제일 강한 전력에 힘이 될 만한 건 모두 몰아주는 것도 당연하고. 몹쓸 오라버니 걱정으로 이화의 이마에 주름살 하나 늘어난다고 할지라도, 이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나보다야 너한테 더 필요할 거야.”
“그냥 내가 이야기한 대로, 오빠랑 내 역할을 바꾸는 게….”
“너도 이게 최선인 거 알잖아. 우리 역할을 바꾸면 작전이 제대로 진행 안 될 것도 알고.”
“그래도….”
“난 괜찮아. 다른 분들 기다리고 있으니, 이야긴 여기까지 하자.”
동생의 말에 무심하게 답한 걸로 신기 탈환 작전의 시작을 알렸다. 여기서 실랑이하며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는 걸 나만큼이나 잘 알고 있던 이화도 더 무언갈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집안싸움은 끝났어? 그럼 이제 출발하는 거지?”
‘방구석 만화광’의 도서관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침울한 상태였던 김화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힘차게 파이팅을 외쳤다. 그에 호응하여 몇몇이 손을 흔들어주고, 일행 모두가 박다현 주위로 모였다.
“더 준비할 건 없지 않나?”
“그렇죠.”
작전은 간단하다. 두 팀으로 나뉘어, 한 팀은 노파를 찾아 신기를 빼앗고. 다른 한 팀은 그동안 최대한 적의 시선을 끈다. 신기를 빼앗는 순간, 작전은 종료. 그땐 이면을 통해 무사히 ‘캠비온 마을’로 돌아오면 된다.
“그럼 이야기했던 대로, 선발대부터 출발하죠.”
내 말에 선발대로 지목된 일행들이 거울을 바라보았다. 곧 그들은 하나하나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제 나만 남았나.”
선발대가 이면 속으로 떠난 걸 보고, 거울을 바라보려던 찰나. 수연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 방법은 최대한, 안 썼으면 해.”
수연이가 말하는 그 방법이 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됐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억지로 죽어가면서 목적을 이룰 방법을 찾지 말라는 거겠지.
“…가능하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제일 적절한 말이었다. 나도 당연히 죽고 싶지 않다. 그런 끔찍한 고통과 공포를 또다시 겪고 싶진 않다. 그렇지만, 앞으로 나아갈 방법이 더 없다면 내가 쓸 수 있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지 않겠다고 장담할 순 없었다.
그런 상황이 오면, 난 분명 죽음을 택할 게 분명했으니까.
“잘 부탁해.”
수연이의 복잡한 심경이 이해 안 가는 건 아니라서, 화제를 돌렸다. 이번 작전에서 수연이의 역할은 ‘캠비온 마을’에 남아 이면을 통해 상황을 지켜보며, 앞으로 흩어져서 본인이 맡은 바를 수행할 일행들에게 정보를 공유해주는 것.
이번 작전에서 서로의 상황을 파악하는 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기에 누군가는 그 역할을 맡아야 했고. 일행에게 걸어줄 수 있는 버프를 모두 걸어준 수연이가 자연스레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다른 일행과 달리 본인은 안전한 곳에 있는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브리핑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인지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연이 역시 진지하게 답해 주었다.
“응.”
수연이의 답을 듣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빛나는 눈의 전략가’님이 당신의 승리를 축복합니다.]
곧, 내 몸은 이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이면 밖으로 다시 나왔을 때, 주변은 고요했다.
“구름 때문인가. 정말 어둡구먼.”
노인의 말대로 구름이 달빛을 가려 어둠이 땅을 완전히 침식한 채였다. 평소 같으면 불편하다고 불평했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지금만큼은 이 어둠이 반가웠다.
시야가 익숙해져 어느 정도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마침내 주변 풍경이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을 때, 상황이 틀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나온 곳엔 수많은 유리 파편이 깔려 있었다.
“아까 둘러볼 때까지만 해도 이러지 않았던 거 맞죠?”
“그랬다네.”
‘허영의 사내’ 측은 이미 박다현의 이면에 관해 알고 있다. 이곳에 유리 파편이 한데 모여 있다는 건, 우리가 이면 밖으로 나오면 반드시 이곳으로 나오게끔 미리 준비해 두었다는 뜻. 즉, 이건 의도된 함정이었다.
“박다현 헌터, 다른 곳에 우리가 이동할 만한 유리 조각은 없던 거 맞지?”
거울에 대고 물으니, 잠시 후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면에서 나오기 전, 박다현으로부터 거울 조각들이 원래 있던 곳에서 어느 한 곳으로 이동했다는 이야기를 듣긴 들어서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이런 식으로 누가 모아둔 걸 보니,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 거예요? 계획대로 움직일 건가요?”
하지만 함정이란 걸 알았다고 해서, 인제 와서 다시 ‘캠비온 마을’로 돌아갈 수도 없는 법. 애당초 신기를 지닌 노파가 이 마을에 머무르고 있던 것부터가 우릴 끌어내기 위한 함정이란 말이었다.
뭐, 대놓고 함정이란 걸 어필할 것까진 몰랐지만. 이렇게 된 이상 정면으로 부딪치는 게 답이다.
“저 측에서 먼저 움직일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 계획대로 맡은 일 하면서,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죠.”
“알겠습니다.”
주변에 적이 매복해있는 눈치도 아니다. 우리만이 마을 구석진 곳의 공터에 덩그러니 놓인 상황.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수도 없어서, 원래 예정했던 대로 자신의 위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거리에서 저격을 통해 우리를 엄호해줄 노인은 숲속으로 모습을 감췄고. 김화영과 한성수는 헌터들이 붙잡혀 있던 쪽으로 향했다.
세 사람이 먼저 떠난 뒤, 나와 김아람은 노파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였던 곳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아까 저희가 확인했을 때는, 지하감옥 쪽에 있었거든요. 일단 그쪽으로 가보죠.”
“응. 그 전에….”
허리를 굽혀 곳곳에 흩어진 유리 조각을 집자, 김아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곧 내 의도를 알아차린 듯, 함께 유리 조각을 집어 들었다. 주머니가 유리 조각으로 채워지고 나서, 우리는 지하감옥 쪽으로 이동했다.
그때쯤, 반대편에서 환한 빛이 일었다. 예정대로 김화영과 한성수 측에서 불을 지른 것 같다.
“저쪽에 시선 쏠렸을 때가 기회야.”
“네, 저도 알고 있어요.”
시선 분산시키는 게 성공했는지, 지하감옥으로 향할 때까지 마주친 적 측 헌터는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목적지에 도착했다.
굳게 닫힌 감옥 문.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이 아래에서 누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김아람 헌터, 여기선 나 혼자 내려갈게.”
“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이 말을 듣는 게 오늘만 벌써 이 말을 두 번째다.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잖아? 그럼 안 괜찮아도 해야지.”
“조심하세요.”
고개를 끄덕이자 김아람은 곧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공포 영화 속 장면 같네.”
누군가 아래에서 날 기다리고 있음을 아는 데도, 내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니. 정말 끔찍하다.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감옥 문을 열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로 이어지는 통로에 놓인 횃불에는 온통 불이 밝혀져 있었다. 역시 지하감옥 아래에 있을 노파는 누군가 자신을 찾아 내려오길 기다리는 게 틀림없다. 그러니까 이리 불을 환히 켜둔 채 숨어있겠지.
통로의 끝까지 내려가니, 역시나 삼지창을 든 노파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함정이라고 대놓고 말하는데도, 여까지 오다니. 끌끌, 자네도 어지간한 강심장이구먼.”
“함정인 걸 아니까, 여기까지 온 거죠.”
그리고 노파 옆에는 ‘허영의 사내’가 서 있었다.
“미물, 기다리고 있었다.”
“나야말로.”
“이 몸의 여흥에 방해 안 되게, 어디 잘 숨어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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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의 사내’가 손을 휘젓자, 곧 노파는 모습을 감추었다.
“그럼 미물, 둘만의 시간을 즐겨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