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신기(5)]
“둘만의 시간을 즐기자니. 취향 한번 독특하네.”
“네깟 것과 말다툼할 생각은 없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보려고 빈정거렸건만, ‘허영의 사내’는 대화의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난번 동작대교에서 만났을 때, 제대로 밉보인 듯싶다.
“어휴, 위대하신 초월자님과 말다툼이라뇨. 그냥 그쪽은 내 취향이 아니란 걸 알려주는 거지.”
“미물 주제에 이 몸을 우롱하려 들다니!”
“아무래도 그냥 보내줄 생각은 없는 것 같네.”
조심스레 궁중 식도를 꺼내 들자 ‘허영의 사내’가 손을 뻗었다.
순식간이었다. 지하 감옥을 밝히던 횃불이 빛을 잃고, 엄습한 냉기가 온몸을 파고든 건.
시야가 좁아진 데다가 추위에 움직임까지 둔해져, 그 뒤에 이어진 공격은 피할 수 없었다.
“큭.”
찌릿한 고통이 느껴지고 나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붉은 열기에 달궈진 쇠창살 하나가 저 앞쪽에서 뻗어와 궁중 식도를 든 왼손을 관통하고 있었다.
상처엔 금세 냉기가 스며들었고. 쇠창살에 닿아 부글거리던 피는 얼마 안 가 얼어붙고 말았다. 땅에 떨어진 궁중 식도를 걷어차며 ‘허영의 사내’는 내 앞까지 다가와 그대로 목을 움켜쥐었다.
“미물 따위가 이 몸의 신경을 긁었다는 데에 만족해라.”
“시, 신경을… 그, 긁긴 긁었나 보네… 그럼 됐어….”
“그럼 됐다? 무엇이 말이지?”
어차피 지금 내 상태로는 자신에게 반항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목을 조르던 손이 살짝 느슨해졌다. 덕분에 조금이나마 편히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네 신경 긁었으면 됐다고. 그럼 내가 이긴 거니까.”
“이해가 안 가는군. 네깟 것의 목적이 신기 ‘트리아이나’의 탈취란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이 몸의 신경을 긁은 것으로 승리했다는 거지?”
“그러게. 왜일까나?”
“분명히 말해두지. 네깟 것은 이 몸을 영원히 이길 수 없다.”
‘허영의 사내’의 입꼬리가 뒤틀렸고, 다시 내 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 업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명색이 초월자란 자가 쪼잔하다고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저 초월자는 날 괴롭게 하는 데에 온 신경을 쏟고 있는 듯했다.
“뒤에서 무슨 짓을 꾸민다고 해도 말이다.”
“그… 그 말도 맞아….”
뭐, 결과적으론 ‘허영의 사내’ 말이 맞았다. 난 저자를 이길 수 없다. 초월력을 쓰는 신적인 존재를 나 따위가 무슨 수로 이긴다는 말인가.
“내, 내가 그쪽을 이기는 건 불가능하지.”
[플레이어 ‘정성훈’을 이길 수 없는 존재라고 인식하였습니다.]
[‘시기’ 특성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정현’과 플레이어 ‘정성훈’의 모든 스탯이 같은 수치로 맞춰집니다.]
[두 플레이어 중 한 명이 죽는 순간 스탯은 본래의 수치로 돌아갑니다.]
‘시기’ 특성이 발동됨과 동시에 ‘허영의 사내’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붉은 눈동자는 그가 무척 분노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어째서 네깟 미물한테 그 특성이 있는 거지? 그 특성은 이 몸이 ‘레비아탄’에게 특별히 부여해준 거란 말이다!”
“아깐 둘만의 시간을 즐기자더니. 사실은 괴물 쪽이 취향이었던 건가? 온갖 폼은 다 잡아놓고선. 좀 깨는데?”
“닥쳐라!”
“이번에도 네 신경 긁었나 보네. 앞으로 가려울 때마다 이야기해 줘. 시원하게 긁어줄 테니깐.”
“닥치라고 했다!”
저렇게 소리 질러봤자, 현재 ‘허영의 사내’가 깃든 몸의 스탯이 전부 0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초월력을 쓰지 않는 한, 결국 나와 다를 바 없는 하찮은 존재라는 뜻.
당연하게도 한껏 힘주어 몸을 비틀자, 목을 옥죄던 힘은 느슨해졌고. 그 틈을 타 ‘허영의 사내’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퉤.”
입안 가득 메운 침을 뱉자, 검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망할.”
허세 부리긴 했어도 내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왼손엔 구멍이 뚫려 있고, 목구멍에선 피가 역류해 숨쉬기조차 괴로운 상황. 고작 스탯을 0으로 맞춘 것만으론, 안심할 순 없었다.
고통 속에 후들거리는 몸을 간신히 진정시켜, 바닥에 떨어진 궁중 식도를 집어 들었다. 다행히 ‘허영의 사내’는 모든 스탯이 0이 된 충격 탓인지 섣불리 공격해오진 않았다. 이대로 계속 상황을 지켜봐 주면 좋겠다만.
“이 몸에게 무슨 짓을 한 게냐!”
‘허영의 사내’는 곧 분노를 토해내며, 내게 달려들었다.
그가 뻗는 주먹은 무척 빨랐지만, 그래도 못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째서.”
‘허영의 사내’가 뻗는 주먹을 피하고.
“어째서!”
궁중 식도로 공격을 가하길 반복.
“어째서!”
어떻게 합을 잘 맞추나 싶었던 순간. ‘허영의 사내’가 먼저 허점을 보였다.
내가 휘두른 궁중 식도를 막으려는 심보였나, ‘허영의 사내’는 무의식적으로 왼팔을 들어 올렸고. 이윽고 스탯이 0이 되었다는 걸 깨달아 팔을 내리려 할 때는 이미 식도에 베인 후였다.
상처에서 피가 한 줄기 흘러내리자 마침내 분노 게이지 MAX를 찍었는지, ‘허영의 사내’는 초월력을 실은 공격을 가했다.
“어째서, 이 몸이 초월력을 써야만 네깟 것을 붙잡을 수 있냔 말이다!”
뒤편의 어두운 공간에서 어느샌가 뻗어온 쇠창살이 양팔을 묶었고. ‘허영의 사내’의 주먹은 명치에 꽂혔다.
“커억-!”
‘허영의 사내’가 팔을 뽑자, 가슴에 뚫린 구멍에서 엄청난 양의 피와 함께 내장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네깟 미물은 이딴 허약한 몸을 갖고 시련을 헤쳐왔던 건가?”
‘허영의 사내’는 어이없어하며 말을 이었다.
“고작 이런 공격에 꺼질 목숨이었다니. 참으로 덧없고 하찮군. 이딴 미물을 위해 ‘피의 살육자’에게 대신 죽어준 헌터가 있다는 게 어이없을 정도야.”
끓는 듯한 극심한 고통에 뭐라 대꾸할 순 없었다. 입을 뻐끔거려봤자, 피만 흐를 뿐.
“그래도 이 몸에게 조금이나마 흥미를 안겨준 상은 줘야겠지. 가는 길 외롭지 않게 네깟 것의 동료들도 차례차례 죽여주겠다고 약속하지. 어차피 지루해지면 미물들이나 학살하며 남은 시련을 지켜볼 생각이었으니 말이야.”
점차 흐려지는 시야 속, 내 마지막 생각은 이러했다.
저 자식, 말하는 레퍼토리가 저거 하나뿐인 건가.
[죽음의 경계로 이동합니다.]
* * *
「왜지?」
“왜냐니?”
「이 몸이 무얼 묻는지는 알고 있지 않나.」
“…내가 주인공일 필요는 없으니깐.”
「자네가 주인공일 필요가 없는 것과 자네가 일부러 그자의 함정에 걸려든 건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데?」
“누군가는 맡았어야 할 일이었어. 당연히 죽었을 때 코인 하나 더 있는 내가 맡는 게 당연한 거고.”
「불과 몇 시간 전에, 되도록 그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으면서도. 되려 그 방식을 고집해 작전을 세우다니. 자네 고집도 대단하군.」
「신기를 전부 동생에게 넘겨줬을 때부터 이미 죽을 생각이었던 거겠군.」
“그야 내 힘으로는 그자를 이길 수 없으니깐.”
「처음부터 그자와 대면할 생각이었다니.」
「배짱 하나만큼은 인정해야겠군.」
“그나저나 전부터 궁금했던 게 있는데, 그쪽은 왜 날 도우려는 거야?”
「그야 자네를 지켜보는 게 즐거우니까.」
「전에도 한 번 이야기한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 이 몸이 틀렸나?」
“정말 그것뿐만이길 바랄게.”
「자네 설마…」
「고작 그런 이유로 이곳에 온 건가?」
“고작 그런 이유라니.”
누군 목숨 버려가며 고생하는데, 거래한 측이 진심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건 당연한 거다.
이번에 ‘트리아이나’를 탈취하면 ‘크로노스’를 내 몸에 강림시킬 준비는 모두 마치게 된다. 즉, ‘크로노스’의 진심을 확인할 마지막 기회는 지금이란 소리.
강림한 ‘크로노스’가 ‘허영의 사내’와 맞설지. 혹 자신을 가두었던 자들에게 복수하려 할지. 최악의 경우, 또 다른 ‘허영의 사내’가 될지. 그의 진심을 확인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지금껏 내가 해 온 모든 게 물거품이 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이 몸은 자네에게 거짓을 고할 생각은 없으니.」
「자네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순 있어도. 자네를 실망하게 할 일은 없을 거네.」
의외로 ‘크로노스’는 덤덤하게 말했다. 내가 진의를 의심했단 걸 알면, 실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이었다.
「이 몸의 진의를 확인하는 게, 자네의 목숨과 바꿀 만큼 가치 있었길 바라네.」
“충분해. 그러니 이만 돌려보내 줘.”
「자신만만한 걸 보니, 그자에게 더 죽을 생각은 없나 보군.」
“다음에 찾아왔을 땐, 여기서 풀어줄 테니까 미리 외출 준비나 해둬.”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듯 ‘크로노스’는 호탕하게 웃었다.
「기다리고 있겠네.」
[‘이름 없는 자’님이 최근 저장 지점을 앞당깁니다.]
[CONTINUE?]
[최근 저장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 * *
머리가 웅웅 울린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고, 속이 울렁거리는 걸 보니 다시 현실로 돌아온 듯싶다. 돌아온 시점은.
“그럼 미물, 둘만의 시간을 즐겨볼까.”
다행히도 ‘허영의 사내’와 만난 직후였다.
뒤집힐 것 같은 속을 억지로 억누르고 ‘허영의 사내’를 향해 말했다.
“그건 좀 곤란하겠는데.”
아무리 ‘시기’ 특성으로 모든 스탯을 0으로 만들더라도, 초월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기 시작한 ‘허영의 사내’ 상대로 시간을 끌기란 역부족이란 사실을 안 이상. 이젠 다른 방법으로 시간을 끌어야만 했다.
잔뜩 화난 상태라 나랑 따로 대화할 생각은 없어 보이고. 그렇다면.
“그쪽 뒤에는 ‘알 수 없는 자’가 있는 거지?”
도박 수를 던질 때다.
[‘풍요와 파괴의 군주’님이 당황합니다.]
[‘알 수 없는 자’님이 피조물이 자신의 이름을 언급한 데에 분노합니다.]
“네깟 것이 그분의 존함을 어떻게 알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