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신기(6)]
“존함? 높여 부르는 걸 보니, 내 생각이 맞았나 보네.”
“이 몸이 물은 거에나 답해라.”
“그리 센 척 다하더니만, 결국엔 본인보다 강한 ‘알 수 없는 자’ 쪽에 붙어서 더러운 일 도맡은 거였잖아.”
“닥쳐라! 그분의 존함은 고작 네깟 것이 입에 담을만한 것이 아니다!”
도박 수가 역효과를 낸 것인지 ‘허영의 사내’가 곧장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궁중 식도를 꺼내 들기도 전에, 그는 내 목을 붙잡아 그대로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추, 충성스러운 부하 납셨네….”
“미물, 이 몸이 닥치라고 하지 않았나!”
“그쪽은 못 이기게 생겼으니까, 여기 와서 우리한테 화풀이라도 하는 거야?”
지하 감옥의 땅바닥에 처박힌 충격이 다 가시기도 전, 또다시 강한 충격이 몸을 강타했다. ‘허영의 사내’가 날 그대로 쇠창살 쪽으로 집어 던진 탓이었다.
‘허영의 사내’가 손을 뻗자 뜨거운 열기가 몸을 감싸더니, 곧 뒤편의 쇠창살이 녹아 내리는 게 느껴졌다. 흐물흐물해진 쇠창살은 내 팔을 휘감아 움직임을 봉해 버렸다.
펄펄 끓는 쇠창살에 닿은 부분의 살이 타들어 가는 걸 애써 무시하려 했으나, 결국 그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미물 주제에 이 몸을 우롱하려 들다니!”
분노에 가득 차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내게 다가오는 ‘허영의 사내’. 초월력을 쓴 건지, 주먹에선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저 주먹이 배를 관통하면, 큰소리쳐놓고 얼마 안 가 ‘크로노스’와 재회하는 흐름으로 가게 된다.
그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만 했다.
“이 행성… 관리자도 너희가 활개 치는 걸 알고 있나?”
“…거기까지 알고 있는 건가.”
‘허영의 사내’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무래도 내가 여기까지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나 보다.
“한낱 미물 따위에 한눈팔려 입이 가벼워진 초월자가 있나 보군.”
‘허영의 사내’는 눈을 감고 뭔가를 중얼거리더니, 허공을 향해 외쳤다.
“이 미물을 후원하는 초월자라면 분명 ‘빛나는 눈의 전략가’, 네년이지 않았나? 이깟 것에게 반해 우리 초월자에 관해 일러주기라도 한 것이냐!”
[‘빛나는 눈의 전략가’님이 혐오스럽다는 눈으로 플레이어 ‘정성훈’을 내려다봅니다.]
“그분이 알려준 건 아니야. 애초에 그분이 나 따위 놈한테 한눈 팔일도 없고.”
“그러면 대체 누가 그 사실을 알려준 거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잖아. 중요한 건, 네놈들이 관리자 몰래 여기서 활개 치는 중이고. 넌 ‘알 수 없는 자’란 놈 밑에서 힘자랑이나 하고 있다는 거 아니겠어?”
“아까부터 계속….”
심호흡한 뒤, ‘허영의 사내’ 말을 끊었다. 그러곤 그의 말투를 최대한 흉내 내 말했다.
“닥쳐! 날 후원해주시는 초월자님의 존함은 고작 네깟 것이 입에 담을만한 게 아니니깐!”
[‘빛나는 눈의 전략가’님이 자신이 플레이어 ‘정현’을 제대로 평가하고 있었음에 만족해합니다.]
결국 ‘허영의 사내’는 제대로 폭발하고 말았다. 입을 부르르 떨며, 거친 숨을 내쉴 뿐 제대로 말조차 잇지 못했다.
온몸을 떨면서 화를 표출하던 ‘허영의 사내’는 마침내 진정했는지, 단어 하나하나 끊어가며 고했다.
“약속하지. 네깟 것의 동료. 한 명도 빠짐없이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주겠다. 네 놈의 눈앞에서 모두를 죽인 뒤. 제일 마지막 순간, 네놈만은 사지를 절단한 채 살려두지.”
“겨우 그 정도야? 그런 협박은 이미 여러 번 들어봤는데, 다른 레퍼토리는 없나?”
한 번 더 살살 긁어주자, ‘허영의 사내’는 주먹으로 턱을 강타했다. 일행을 전부 죽일 때까진 살려두겠다는 말을 지킬 생각인 듯, 초월력은 완전히 빼 그 충격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허영의 사내’는 한참 동안 주먹을 휘둘렀다. 주로 얼굴만 노려 때린 탓에 결국 입술이 잔뜩 부어 신음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역시… 난… 널 이기지… 못하겠네.”
입에 고인 피를 주르륵 흘리면서 어떻게든 말하자 글씨가 새겨졌다.
[플레이어 ‘정성훈’을 이길 수 없는 존재라고 인식하였습니다.]
[‘시기’ 특성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정현’과 플레이어 ‘정성훈’의 모든 스탯이 같은 수치로 맞춰집니다.]
[두 플레이어 중 한 명이 죽는 순간 스탯은 본래의 수치로 돌아갑니다.]
‘시기’ 특성이 발동되니, ‘허영의 사내’가 주먹질을 멈췄다.
“어째서 네깟 미물한테 그 특성이 있는 거지? 그 특성은 이 몸이 ‘레비아탄’에게 특별히 부여해준 거란 말이다!”
“괴물 취향은… 다시 들어도… 깨네….”
“닥쳐라!”
‘허영의 사내’가 힘껏 외치자, 냉기가 지하 감옥을 가득 메우며 한순간에 모든 횃불이 빛을 잃었다.
“미물 따위가 이 몸의 신경을 긁었다는 데에 만족해라.”
‘허영의 사내’가 다시 한번 내 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이제… 됐어….”
“이제 됐다? 무슨 말이지?”
‘허영의 사내’는 내게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지하 감옥의 바닥에 흩뿌려진 거울 조각에서 빛이 솟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했잖아… 내가 그쪽을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고.”
결국 원했던 대로 흘러갔다.
“대신 내 동료라면 그쪽을 이길 수 있지.”
처음부터 내 목표는 하나였다. ‘허영의 사내’ 시선을 내게로 집중시키는 것. 그래야만 다른 일행들이 맘 편히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테니.
정확히는 후발대로 나선 이화가 말이다.
“그게 무슨?”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듯, ‘허영의 사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반짝이는 거울 조각들을 보고 외쳤다.
“네깟 것이 감히….”
그 뒤로 ‘허영의 사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알 수 없는 자’님이 분노합니다.]
“둘 다 엿이나 먹어.”
‘허영의 사내’에게 짧은 욕설을 내뱉곤, 곧바로 이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으니.
* * *
“다현아, 타이밍 좋았다.”
다물어지지 않는 입술 사이로 피를 질질 흘리며 말하자, 이화가 끼어들었다.
“오빠, 이래서 내가 그 역할 맡겠다고 한 거잖아.”
“결국 성공했으니까… 난 괜찮아….”
넌지시 운을 떼자, 이화가 방 뒤편으로 고갯짓했다. 그쪽을 바라보니, 노파가 들고 있던 삼지창 ‘트리아이나’가 보였다. 그 옆에는 팔짱 낀 채 서 있는 주인장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데, 피차 꼴이 말이 아니네.”
주인장도 나만큼이나 고생했는지, 머리는 잔뜩 헝클어진 채 곳곳에 깊은 상처가 패여 있었다.
“그러게요.”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무사해.”
“그런가요….”
“문제는 저쪽이지.”
방의 반대편,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몇몇 캠비온이 우릴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 일행은 마을에서 지내도 문제없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라는 점에서 불만인 듯했다. 본인들에게 허락도 안 맡고, 멋대로 다른 이들을 마을로 데려온 게 문제였다.
“아람이랑 지은정 헌터가 따로 캠비온 측하고 이야기하고 있으니, 저 문제까지 오빠가 신경 쓸 필욘 없어.”
“그리고 현아, 일단 치료부터 받자.”
어느새 다가온 수연이가 스킬을 사용해줬다.
[스킬 ‘성역’이 발동됩니다.]
[스킬 ‘성역’으로 인해, 플레이어 ‘임수연’이 ‘전투 불가’ 상태가 됩니다.]
[’성역’ 안의 아군 판정 플레이어의 ‘회복력’이 50 상승합니다.]
[‘성역’ 안의 아군 판정 플레이어의 피로가 모두 회복됩니다.]
[스킬 ‘백의의 천사’가 발동됩니다.]
수연이의 손길이 닿자 타들어 간 피부들이 떨어져 나가고, 그 아래에서 새살이 돋기 시작했다. 고통에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수연이는 조금만 더 참으라며 내 몸을 단단히 고정한 채 스킬 시전을 끝내지 않았다.
수연이가 치료하는 동안, 이화는 옆에서 작전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이야기해줬다.
처음 계획대로 선발대가 적의 시선을 끌 동안, 후발대인 이화가 노파에게서 신기를 빼앗았다. 김화영과 한성수는 붙잡혀 있던 헌터들을 풀어줘 우리와 함께 싸울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주인장을 찾았고. 김아람은 거울 조각을 마을 곳곳에 흩뿌려 어디서든 이면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사전 작업을 해두었다.
한편 적들은 우리가 ‘캠비온 마을’에서 나왔을 때, 일망타진할 계획으로 근처 숲에 매복하고 있었다. 그들이 생각했던 대로, 일행과 풀어준 헌터들을 포위하는 데까진 성공했으나. 후발대로 등장한 이화 덕분에 상황은 급반전됐다.
내가 지닌 모든 신기를 이화에게 양도한 덕분에 압도적인 힘으로 적들을 전부 쓰러뜨린 것이다.
‘퀴네에’로 모습을 감춘 채, ‘아이기스 방패’로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아스트라페’와 ‘케라우노스’로 두 줄기 번개를 떨어뜨리는 이화는 적들에게 있어 자연재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물론 초월력을 사용하는 ‘허영의 사내’라면 손쉽게 이화를 처리했을 거지만, 내가 ‘허영의 사내’의 시선을 끈 덕분에 작전은 순조로이 진행됐다.
날 끌어내기 위한 미끼로 사용한 뒤 노파를 마을 쪽으로 텔레포트 시켜, 작전이 더 쉽게 끝나기도 했고.
그렇게 이화가 신기를 빼앗은 순간, 박다현이 능력을 발휘했다. 마을 곳곳에 뿌려져 있던 거울 조각을 통해 모두가 이면으로 이동하며 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이제 남은 건 신기를 하나로 합치는 거네.”
치료가 끝났는지, 수연이가 몸을 툭툭 치며 말했다. 그 말에 주인장이 삼지창을 집어 들었다.
“자, 그래서 내가 해 줘야 해?”
이미 귀띔받은 건지, 본인이 신기를 통해 무언갈 만들어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던 듯했다.
절름발이라면 ‘문’을 열 열쇠를 만들 수 있다.
‘크로노스’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이화에게 부탁해 지금까지 모은 모든 신기를 주인장에게 건넸다.
“’절름발이 공돌이’님께 열쇠 하나 만들어달라고 부탁해주실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