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항소(1)]
“열쇠?”
“네.”
본인 앞에 놓인 여러 신기를 쭉 둘러보던 주인장이 다시 물었다.
“열쇠라면, 무슨 열쇠?”
“‘절름발이 공돌이’님께 말씀드리면 바로 아실 거예요.”
“초월자님께서?”
‘아스트라페’, ‘케라우노스’, ‘트리아이나’, 그리고 ‘퀴네에’. 이 네 신기가 한 곳에 모인 순간부터 ‘절름발이 공돌이’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을 거다. 곧 이것들을 토대로 ‘죽음의 경계’ 봉인을 해제할 열쇠 하나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으리라고.
그 부탁을 받아들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알고 있을 테니. 그를 수락할지 거부할지, 자신이 취할 스탠스 또한 이미 정해두었을 게 분명했다.
“네. 한 번 여쭤봐 주실 수 있나요? 이 신기들로 열쇠를 만들어 줄 수 있는지 말이에요.”
부탁할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일러주자, 주인장은 자기 머리에 대고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고작 열쇠 하나 만드는데, 이 신기들을 써야 한다고?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전부를? 초월자님을 상대했다더니, 머리라도 다친 거야?”
“부탁드릴게요.”
“네 동생이 이것들 가지고 어떻게 싸웠는지 못 봐서 그런 거지? 혼자서 그 많은 적을 다 정리했어. 혼자서 말이야. 그걸 못 봤으니 그런 헛소리를…”
“오빤, 진심으로 부탁하는 거예요. 저도 부탁드릴게요. 그 열쇠, 저희한테 정말 필요해요.”
이화도 내 옆에서 머리 숙여 부탁했다. 난감한 듯 주인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신이나 다름없는 자를 상대해야 한다며? 그런데도 이런 강력한 무기를 버리고 고작 열쇠, 어디에 필요한지도 모르겠을 열쇠 하날 얻겠다고?”
우리가 농담하는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챘는지, 주인장은 이번엔 방 안의 다른 일행에게 묻기 시작했다.
“지금 나만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신의 힘을 빌릴 수 있는 무기를 고작 열쇠 제작 재료로 쓰자는데. 다들 정말 거기에 동의하는 거야?”
주인장의 호통에 노인과 한성수, 김화영 그리고 수연이까지. 모든 일행이 진지한 눈빛으로 동의의 뜻을 밝혔다. 의심하는 기색 하나 없이 모두가 신뢰에 찬 표정을 지은 채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하- 알겠어. 알겠다고. 신기 하나 훔치려 적진 한가운데로 돌아오기까지 했으니, 그 빌어먹을 열쇠가 그리도 중요하다는 거겠지. 한 번 초월자님께 물어는 볼게. 그런데.”
결국 뜻을 굽힌 주인장은 말하다 말고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넌, 내가 전속 계약 맺은 초월자님이 ‘절름발이 공돌이’님이란 걸 어떻게 안 거야? 지금껏 누구한테도 말한 적 없건만.”
“그야 대장장이시니까, 당연히 대장장이 신께서 후원했을 거라고…”
“뭐, 대장장이 신께서 전속 계약 맺어주셔서 대장장이 직업을 얻을 수 있었던 건 맞긴 하지. 그래도 대장장이 신이 한두 분도 아니고. ‘절름발이 공돌이’님이라고 딱 잘라서 지정할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해서. 내가 전에 말실수라도 한 건가?”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제가 아는 대장장이 신이 한 분밖에 없으니까, 대충 맞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절름발이라면 ‘문’을 열 열쇠를 만들 수 있다.
‘크로노스’와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가 전한 저 말의 진의는 금방 파악했다.
‘절름발이 공돌이’란 초월자라면. 즉, 올림포스 12 주신 중 하나이자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라면 ‘죽음의 경계’ 봉인을 해제할 열쇠를 만들 수 있다. 그러니, 열쇠의 재료인 신기를 모두 모아 그에게 도움을 청해라. 그런 뜻으로 저 말을 전한 게 틀림없었다.
‘크로노스’를 향한 믿음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단순한 내 바람이라고 해야 할지. 저 말의 진의를 파악한 시점에서 난, 지금껏 한 번쯤 ‘절름발이 공돌이’와 전속 계약 맺은 헌터와 인연을 쌓은 적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네가 ‘멸망 이전의 과거’로 가서 ‘허영의 사내’가 강림하기 전에 네 개의 신기를 모아 이곳의 봉인을 해제하는 거지.」
‘크로노스’는 분명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가 날 과거로 보내며 맡긴 일은 ‘네 개의 신기를 모아 봉인을 해제하는 것’. 거기에 ‘절름발이 공돌이’란 초월자를 찾는 일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만일 내가 ‘절름발이 공돌이’와 전속 계약 맺은 헌터와 안면 튼 적 없더라면, ‘크로노스’는 이런 식으로 말했을 것이다.
「자네가 ‘멸망 이전의 과거’로 가서 ‘허영의 사내’가 강림하기 전에 네 개의 신기를 모아 ‘절름발이 공돌이’에게 부탁해서 열쇠를 만든 다음, 이곳의 봉인을 해제하는 거지.」
지금껏 내가 안면을 튼 대장장이는 주인장뿐. 만일 내 주변에 ‘절름발이 공돌이’와 전속 계약 맺은 헌터가 있다면 그녀일 가능성이 컸다.
“결국 그냥 찍었다는 거네.”
“뭐, 그렇죠.”
“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머리가 좋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정답은 정답이야.”
주인장은 한숨을 쉬고는 공중에 대고 말했다.
“그래서 초월자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죠? 제가 저 친구 말을 들어줘야 할까요?”
[‘절름발이 공돌이’님이 당황합니다.]
[‘호색한 찬탈자’님이 진노합니다.]
[‘호색한 딸바보’님이 봉인 속 존재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합니다.]
[‘부동의 노인’님이 눈치를 살핍니다.]
[‘별의 적대자’님이 ‘절름발이 공돌이’님의 선택을 지켜봅니다.]
‘캠비온 마을’에 온 뒤로 잠잠하더니, 순식간에 초월자들의 관심이 쏠렸다. 대부분 ‘절름발이 공돌이’에게 부탁을 거절하라고 권하는, 혹 협박하는 내용이었다. 결국 다른 초월자들의 압박에 못 이겼는지, 이런 글씨가 새겨졌다.
[‘절름발이 공돌이’님이 무리한 요구라며 그를 거부합니다.]
“그렇다는데?”
주인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다시 초월자들의 반응이 쏟아졌다.
[‘거품에서 피어난 꽃’님이 한심한 남자라며 ‘절름발이 공돌이’님을 비웃습니다.]
[‘폐허가 뒤따르는 자’님이 ‘거품에서 피어난 꽃’님에게 근육을 뽐냅니다.]
[‘번개의 아내’님이 ‘절름발이 공돌이’님의 뒤를 봐줄 것을 약속합니다.]
[‘무형의 관리자’님이 ‘절름발이 공돌이’님이 무시당하던 시절을 일깨웁니다.]
[‘빛나는 눈의 전략가’님이 새로 시작할 기회임을 일러줍니다.]
이번에는 부탁을 수락하라고 권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글씨가 새겨지는 화력은 아까에 비해 덜했지만, 그래도 ‘허영의 사내’ 측이 아닌 우리 측을 응원하는 초월자들은 생각보다 더 많았다.
정확히 어떤 초월자의 말이 ‘절름발이 공돌이’ 생각을 바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이런 글씨가 새겨졌다.
[‘절름발이 공돌이’님이 플레이어 ‘신혜진’에게 ‘마스터키’ 제작법을 전수합니다.]
[‘알 수 없는 자’님이 그 선택을 후회하게 되리라고 경고합니다.]
[‘절름발이 공돌이’님이 두려움에 몸서리칩니다.]
[‘빛나는 눈의 전략가’님이 ‘알 수 없는 자’를 향해 적의를 드러냅니다.]
이후 초월자 간 대립하는 내용의 글씨가 한참 이어졌다. 그 와중 주인장은 본인 앞의 신기를 집어 들며 말했다.
“초월자님께서도 동의한 거로 알고, 열쇠 만들기 시작할게. 시간은 좀 걸릴 거야. 그래도 괜찮지?”
그에 괜찮다고 답하려 할 때,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내용의 글씨가 보였다.
[‘호색한 찬탈자’님이 플레이어 ‘김동현’과 ‘이나은’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라며 경고합니다.]
“방금, 그건…”
불길한 예감에 바로 박다현을 불렀다. 당연하게도 언제나 그랬듯이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이면을 통해 바라본 마을 광장에는 온몸이 묶인 채 붙잡혀 있는 동현이 형과 이나은이 있었다.
‘허영의 사내’가 칼을 뽑아 든 채 그 둘 주위를 빙빙 도는 걸로 보아, 얼마 안 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대충 예상이 갔다.
이대로 열쇠를 제작했다간, 동현이 형과 이화를 죽이리라는 ‘허영의 사내’의 협박이 분명했다.
“망할 자식들.”
자리에서 일어서려 할 때, 이화가 팔목을 붙잡았다.
“이번엔 여기 남아있어.”
“뭐?”
“저 초월자가 이렇게까지 나왔다는 건, 오빠 생각이 맞았다는 거야. 그러니까 오빠는 여기서 열쇠가 만들어지길 기다렸다가, 초월자님을 강림시켜.”
“그러면 동현이 형하고 이나은 헌터는…”
“내가 맡을게.”
시간은 더럽게 안 갔다.
이화가 일행 몇몇을 데리고 마을로 나간 지도 꽤 됐다. 그런데도 아직 돌아올 기미는 안 보였다.
물론 이화는 처음부터 초월자 상대로 ‘시간만 끌어보겠다’라고 이야기했다. 정면으로 맞붙었다간 본인이 죽을 거란 걸 이화도 알기에 섣부른 짓은 하지 않을 터였다.
가능하다면 동현이 형과 이나은을 구하고, 여력이 안 되면 열쇠가 제작되는 동안 둘이 죽지 않도록 시간을 끄는 것. 이게 이화의 목적이었다.
초월자를 상대로 인질을 무사히 구출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화는 자신이 생각해둔 방법이 하나 있다며 자신만만하게 말했고. 지금으로선 그를 믿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곤 해도 역시 내가 갔어야 했나.”
“아까부터 자꾸 어딜 간다는 거야.”
주인장이 등을 툭 내리치며 다가왔다.
“걱정만 하지 말고, 동생 좀 믿어줘. 다 큰 애 붙잡고 이래라저래라하는 거 누가 좋아하겠어?”
“그런 거랑은 상황이 다르잖아요.”
“다르긴 무슨. 어쨌든 네가 필요하다는 건 여기 있어.”
주인장은 따끈따끈한 열기를 뿜는 황금빛 열쇠를 건넸다.
초월자의 도움으로 네 개의 신기를 녹인 뒤, 주조한 열쇠라고 했다.
“고작 이만한 열쇠로 뭘 하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자식은 꼭 쓰러 뜨러 줘.”
“네.”
알겠다고 답하며 열쇠를 받아들었다. 그러곤 궁중 식도를 꺼내 들었다.
“이번엔 반드시 저 자식 쓰러뜨리죠.”
내가 하는 짓을 보고 당황한 주인장에게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궁중 식도가 팔을 긋는 익숙한 고통을 느끼며, 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죽음의 경계로 이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