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또 다른 이름 >
"어으. 죽겠다."
신예지는 풀썩 침대에 엎어졌다. 떡진 산발에 구겨진 트레이닝복 차림. 누가 봐도 이틀 이상은 씻지 않았을 거 같은 몰골.
물론 집에서 그렇게 지낸다고 해서 아무도 뭐라할 사람은 없다. 바로 자취 생활의 장점. 그녀는 베개에 마구 얼굴을 비볐다.
"음. 좋은 냄새."
다만, 그 장점은 본인 집에서나 성립되는 얘기.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곤 신발을 정리한 후 방에 들어온 크로스보우는 얼굴을 확 구겼다.
"야. 내 베개에 얼굴을 왜 비벼."
"뭐 어때. 닳는 것도 아니고."
"닳진 않아도 누래진다고."
"포상이야. 햇반이라도 가져오던가."
"...."
이 녀석. 전에는 분명 이러지 않았던 거 같은데. 분명 크로스보우가 막 복학했을 시점에 신예지는, 미모에 몸매를 겸비한 걸로 유명한 신입생이었다. 허구한 날 대쉬를 받는 것은 예삿일이요 학교 커뮤니티에 그녀를 찾는 글이 일주일에 두 세 번은 올라왔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에도 게임에만 관심 있던 크로스보우의 귀에 까지 들려온 이야기니 아마 실제로는 훨씬 더 인기가 많았겠지.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랬던 그녀가 편집하려면 인터넷 밈을 알아야겠다는 선언 이후로, 뭔가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으음. 예전에 오빠 방 침대에 토했던 거 생각난다."
"...."
아니. 안 변했나?
"그게 그 때 그 베개야."
"뭐? 우웩!"
어이가 없어진 크로스보우가 헛소리를 하자 단번에 대경질색하는 신예지.
"뻥이다. 임마."
"아. 그치? 난 또 오빠가 이상한 취향이라도 생긴 줄 알았지."
"헛소리말고 밥먹기 전에 먼저 씻어. 드럽게 그러고 있지 말고."
그녀는 이번엔 어색하게 트레이닝복의 자크를 목끝까지 채우기 시작했다.
"오빠...그게 무슨 말이야? 씻다니...왜?"
"옛날엔 허구한 날 쳐들어와서 씻어놓고 이제와서 뭔 소리냐. 막말로 너 토하고 기절했을 때 씻겨준...."
"으아! 으아으어으아! 안 들린다!"
크로스보우는 대충 손을 휘젓고 배달어플을 실행했다. 초밥은 저번에 먹었으니까 오늘은...여름도 끝나가는 겸 막국수나 먹을까?
"아. 근데 난 그냥 좀 자면 안될까? 이틀 동안 한숨도 못 잤어."
"뭐? 왜."
그녀는 베개에 얼글을 묻은 채로 씨익 웃었다. 그러고보면 이틀동안 신예지의 연락이 전혀 없었다.
"너. 혹시 무슨 일...."
"아니아니. 지난 번에 균방전 그거. 편집했지."
"아."
"올려놨으니까 확인해봐. 편집점이 엄청 많아서 2편으로 나눠서 업로드했다. 힘들어 죽겠다구."
그렇군. 그러고보면 그런 까톡을 받았던 거 같다. 그는 스마트폰으로 아이튜브에 접속했다.
[긴 말 안합니다. 올오버 최초 균방전 노희생자 SSS랭크 클리어 -1]
[조회수 980회]
-10분 전
[이게 된다고? 균방전 노희생자 SSS랭크 클리어-2]
[조회수 1,072회]
-9분 전
"오."
크로스보우는 눈을 끔뻑였다. 문외한의 눈으로도 잘 뽑은 영상임이 분명한 느낌. 조회수 대비 댓글도 상당히 많다.
-ㅋㅋㅋ1분 만에 왔는데 내 앞에 300명의 레전드들....이 넘들은 밥먹고 크보 채널만 주시하나
-백수들 못 보게 오전 업로드? 하지만 어림도 없지. 25시간 기상법!
-제목보고 어그론줄 알았는데 진짜였네;
-이 채널 올해 안에 천 만간다. 이 댓글은 성지가 됨.
-그저 갓
-세나 누구임? 세나 누구임? 세나 누구임?
-WHAT IS THIS??!! HOW HELL HE DID THAT?
"음."
평소 보던 베스트 댓글과는 조금 다른 느낌. 아마 올린 지 얼마 안된 탓에 별난 시청자들이 먼저 댓글을 다는 모양이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다른 느낌으로 바뀌겠지. 그는 영상을 빠르게 흩어보다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진짜 상당히 퀄리티였기 때문. 이걸 이틀만에 혼자서 해냈다고?
"예지야. 너 정말 영혼을 끌어모아서...."
"으, 응?"
왜 가슴팍을 가리는데.
"편집했구나? 진짜 고생했겠는데. 그 짧은 시간동안 이 정도면 공중파라도 가야하는거 아냐?"
"아. 편집. 편집 얘기한거구나."
"그럼?"
"편집이야 뭐. 항상 하던대론데 뭐. 잠도 조금씩은 잤어."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이번엔 특별히 공들인 게 분명하다. 이틀동안 한숨도 못 잤다는게 과장은 아닐 터.
이러니 저러니해도 그녀는 항상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구리다 못해 똥에 비견되는 게임인 '더 원 그라운드'로 어떻게든 수익이 창출되었던 건 많은 부분 그녀의 공로.
명색이나마 고용인으로써 이 정도 고생을 그냥 넘어가선 안되겠지.
"뭐 먹을래. 비싼 것도 사줄테니까."
"음...오빠 근데 오늘 일찍 일어났네? 원래면 잘 시간이잖아."
엉뚱한 질문이 대답으로 나왔다. 오랜 인연, 크로스보우는 그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곤 피식 웃었다. 뭔가 사소한 거라도 하려고 일찍 일어났다고 하면 그걸 빌미로 배달음식이나 시켜먹자고 하겠지.
민폐끼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녀석이다.
"나가자."
"엑. 이 꼴로?"
"모자 써."
***
"대게로 큰 거 하나랑요. 음. 그리고 킹크랩도 하나. 네. 작은 걸로."
크로스보우는 손을 덜덜 떨며 물을 따르고 있는 신예지를 본 채 만 채 하며 말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가까운 곳에 있던 해산물 전문점.
자꾸만 동네 백반집으로 발길을 돌리려는 신예지를 억지로 끌고 온 참이었다. 차려입은 옷차림도 아니니 이게 최선이겠지.
"대게랑 킹크랩 나왔습니다."
"와....잘 먹을게. 오빠."
그리고 음식이 나오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응을 보니 꽤 괜찮은 모양이다. 살도 많이 차 있는 것 같고.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망치망치! 망치여자!"
"뭔 소리야. 이게."
"아. 미안. 내가 영상 튼 소리. 오늘자 트게더(트리키 뷰 전용 커뮤니티) 확인 좀 했어."
"그런 것도 확인하냐?"
"요새 트리키 뷰가 어떻게 돌아가나 정도는 알아야지. 지금 [타 스트리머들의 크로스보우 도네 반응] 영상 기획하고 있거든."
"어. 음."
시키지도 않은 영상이다. 더 비싼 걸 먹였어야하나? 크로스보우는 침음성을 뱉었다.
"나중에 한우도 사줄게. 투쁠로다가."
"됐습니다. 사장님."
"혹시 또 뭐 나 몰래 하는거 있냐."
"모, 몰래 하는거? 그런 건 왜 물어봐. 오빠도 몰래 하는거 있잖아."
"이게 자꾸 개소리할래?"
"가끔 커뮤에서 티 안나게 홍보하거나 댓글반응 좋은 쪽으로 유도하고 뭐 이런거? 이 정도는 남들도 하잖아."
"...."
크로스보우는 깨달았다. 어쩌면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방송으론 아예 밥벌이도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너...."
"아. 나 신파극 싫어하는거 알지? 오빠가 이번에 월급도 올려줘서 열심히 하는 거니까 괜히 감동받지 말고."
올려줘봤자 얼마나 올려줬겠는가. 그는 말을 잊고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보세요. 저는 그냥 빚 갚는 셈 하던건데 돈까지 많이 줘서 미안하거든? 그렇게 보지마."
"예지야. 혹시 원하는 거 없냐?"
"아. 됐고 이거 좀 봐."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저은 그녀는 크로스보우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방금까지 그녀가 보고 있던 트게더의 영상.
"이게 뭔데."
"오빠가 보기에 이 사람 어느 정도 하는거 같아?"
그는 스마트폰을 받아들고 영상을 봤다. 그리고는 눈썹을 움직였다.
광적으로 망치를 휘두르는 낯선 여자 한 명. 스트리머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영상 속 스트리머가 받은 영상후원에, 그녀와 비슷하게 망치질을 하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똥의호흡]
"...."
낯익은 닉네임. 그는 깜짝 놀라 영상을 다시 처음부터 자세히 확인하곤 이마를 짚었다.
"...어그로 제대로 끌렸네. 이거 누가 후원한거야."
그의 말대로였다. 영상후원을 받은 스트리머도 온갖 스킬이 난무하는 레이드 도중에 몇 번 정도 영상을 돌려보는 모습.
"모르지? 본인이 1대1대전 마스터티어라고 주장하는 시청자인 거 같던데."
"아...그 때 그..."
"응? 미안. 못 들었어."
크로스보우는 영상을 한 번 더 확인하곤 스마트폰을 돌려주었다. 얼굴이 나오진 않았다. 동의 없이 촬영된 영상에 올오버 내에서 모자이크를 씌워주는 기능이 있는 모양이다.
"내가 누굴 보고 오빠보다 잘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거든? 근데 이 사람.... 음.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 오빠만큼 잘...어쩌면 그 이상? 근데 하는 짓이 좀 변태같아."
그야 그렇겠지. 같은 사람이니까.
"누구...?"
"트리키 뷰에 짬탐이라는 사람이야. 아이튜브 보니까 영상 주인공 찾는거 같더라."
"예지야. 그...오해하지 말고 들어. 이거...."
크로스보우가 은밀한 취미를 들킨 중학생처럼 고백을 시작할 때였다.
[띠링!]
돌연 그녀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어. 잠깐만. 공지 올라온 소린데."
신예지는 말을 끊고 스마트폰에 얼굴을 박았다.
[올 오버 공식 홈페이지에 새로운 공지가 올라왔습니다!]
힐끗 확인하자 그녀의 화면에 떠오른 메세지.
[지금까지와는 또다른 올 오버 네이션스 컵이 시작됩니다!]
"...올오버 네이션스 컵?"
네이션스 컵.
그러니까, 국가대항전이 시작될 예정이라는 공지였다.
한중일 3국이 지역 예선에서 맞붙게 될 거라는 소식과 함께.
< 17화-또 다른 이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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